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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1. 21:58

D-War, 심형래 영화2010. 8. 1. 21:58

'디워'가 우리나라에 개봉된다고 했을때 그야말로 영화팬들은 큰 기대를 갖고 있었다. 우리나라 개그맨 출신의 감독이 수준높은 컴퓨터 그래픽을 필두로 세계적인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었다는 기대였다. '용가리'에서 큰 실패를 맛보았지만, 그동안 몇년동안 절차탁마 했기에 이번에는 무언가 다른 작품을 선보여줄 것이 분명했다. 그리고 가장 먼저 한국에서 영화가 개봉되었다.

그 영화는 인터넷상에서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나 영화평론가 진중권씨와 네티즌 간에 혈전이 벌어졌다. 영화의 엉터리 스토리를 이유로 진중권씨가 영화에 쓴소리를 했고, 이에 심형래 감독과 '디워'를 옹호하던 네티즌들이 반발함으로써 종국에는 감정싸움으로 비화했다. 소모적인 논쟁이었다. 영화의 스토리는 분명 영화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내고 있었고, 반면 그것을 제외한다면 나름대로 기대 수준을 충족시킨 셈이 되기 때문이다. 물론 영화에서 구성의 짜임새나 스토리의 개연성은 그 무엇보다도 중요하기에 '디워'의 세계적인 성공은 기대하기 힘들었다. 하지만 우리나라 관객들은 영화에 대한 애정이 있었고, 기대하는 수준의 CG가 어느정도 충족되었다는 점, 그리고 향후 더 좋은 작품을 만들어줄 것이라는 염원 등을 담아서 '디워'를 흥행작으로 만들어주었다. 

영화가 개봉된지 한참이 지나서야 비로소 영화를 접하게 되었는데, 한마디로 말하자면 실망이 컸다. 영화를 본 많은 관객들이 이미 그 실망을 이야기했기에 어느정도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막상 영화를 접하고 나니 진정 '스토리'는 어이가 없을 지경이었다. 무엇보다 500년 전과 현재와의 연결고리가 미약하고, 표현 방식도 무언가 엉성하다. 영화 자체가 코믹스러움을 지향하지도 않는 무거운 분위기를 유지하는데, 사실 그것 외에는 어떤 색깔도 지니지 못한다. 드라마도 아니고, 호러도 아니다. CG 외에는 스토리에서 어떤 어필도 하지 못하는 셈이다. 추격신들이 몇몇 등장하긴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극적 효과를 내기 어렵다. 인물들에 대한 개성도 밋밋하고, 진지한 영화가 추구하는 어떤 철학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들지도 않는다.

사실 별볼일 없는 영화들이야 수도 없이 많지만, 심형래 감독에 대한 아쉬움이 남는다. 영화에 대한 그의 열정을 높이 사지만, 사실 자신이 시나리오에 자신이 없으면 역량있는 사람에게 위임하거나 도움을 구하는 것이 맞다. '디워'의 스토리는 왠지 심형래 감독의 색깔이 묻어나는 것 같다. 과거 어린이 영화에서나 통했을 법한 단순함이다. 하지만 성인들을 대상으로 영화를 만들려고 한다면 보다 신중하고도 면밀한 접근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영화의 역사를 새로쓴 세계적인 영화 '아바타'는 스토리만 몇년을 고민했다고 한다. 엉성한 스토리 때문에 훌륭한 'CG'가 사장되는 것 같아 무척이나 안타까웠다. 주변의 충고를 새겨듣고, 지난 결과를 경험삼아 심형래 감독이 마음을 열고, 향후 작품에서는 자신만의 시나리오를 고집하지 않기를 바란다. 우리나라의 관객들 역시 두번은 관대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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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7. 23. 23:36

동감, 유지태, 김하늘 영화2010. 7. 23. 23:36

개봉된지 꽤 시간이 흐른 영화답게 등장하는 배우들의 앳되고 순수한 모습이 눈길을 끌었다. 색다른 스토리를 등에 업은데다 미처 생각치 못한 반전이 더해져서 관객들에게 좋은 평을 받은 것 같다. '사건'보다는 '대화'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일면 지루하게 느껴지는 면도 있었다. 아름다운 영상과 감미로운 음악으로 깊은 인상을 남겼던 대만 영화 '말할 수 없는 비밀'과 궤를 같이 하는 작품이다. '동감'도 다소 신비로운 분위기를 영화 속에 담았으면 어땠을까 싶다.
 
참으로 영화다운 스토리로 그저 있는 그대로 마음에 담아야 하는 영화다. 한편으로 영화 속 소은(김하늘 분)이 묵묵히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현재와 미래가 뒤죽박죽 혼재되는 느낌을 받는다. 마치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는 先後 논쟁처럼, 현재와 미래가 서로 '원인'과 '결과'가 되어버리는 상황이다. 영화 속 소은의 가슴아프고 힘든 선택에 지인(유지태 분)은 안타깝고도 안쓰러운 감정을 느낀다. 

타임머신을 타고 과거로 돌아가 인류의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또는 나의 미래를 내다볼 수 있다면... 일상 속에서 연상할 수 있는 수많은 가정들을 출발점으로 여러가지 스토리들이 파생된다. '나비효과'에서는 주인공이 다른 사람들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는 소용돌이에 빠져들고, '사랑의 블랙홀'에서는 똑같은 일상이 반복되면서 '시행착오' 투성인 삶을 다듬을 기회를 가진다. 비단 두 영화를 차치하고라도, 시간을 넘나드는 이야기들은 언제나 인류의 호기심을 자극한다. '불가능'의 영역을 언제나 '가능'의 영역으로 돌변시키는 '위대한 과학'에 대한 맹목적인 믿음을 간직하고 있는 인류는 여전히 언젠가 '시간 여행'을 즐기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믿고 있다. '미스터리 더미' 속에서 길을 잃은 인류의 사고는 여전히 '전지전능한 신'에 의지하지 않고서는 '평안한 안식처'로 돌아가지 못하기도 한다. 

지인(유지태 분)이 지난 신문을 찾아서 여러 가지 사건들을 소은에게 알려줄 때는, 천성이 선하지 못한 탓인지 그런 상황을 악용할 수 있는 여러가지 가능성들이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이 가지지 못하는 조그만 힘이라도 소유하게 되면 그것을 악용해 과시하고, 또 지배하려는 속성이 인간의 의식 안에 잠재되어 있는 것일까. 자족을 모르는 인간의 무한한 '소유욕'과 '지배욕'을 생각하면 그 오래전 '성선설'을 주창한 맹자 선생님께 따져야 할 판이다.

종종 인간의 욕구는 '공동체의 시선'이라는 감시 상태에 영향을 받는다. 다른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못된 짓은 못하지만, 그 시선들을 제거하면 전자의 상황에서만큼 인간은 도덕적이지 못하다. 다른 사람에게 직접 물리적 폭행을 가하는 것에 비해 제3자에게 지시를 하는 것은 이른바 '양심'이라고 불리는 '도덕적 책임감'을 경감시켜 준다. 군수권자가 이등병에 비해서 쉽게 '전쟁'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것은 그 첫째가 '죽음의 위협'으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유롭다는 것이겠지만, '도덕적 책임'으로부터도 자유롭다는 것도 영향을 미칠지 모른다. 인간의 본성에 대한 지루한 '선악' 논쟁은 인류가 사라지는 날까지 해답을 찾지 못할 것 같다. 인간은 그저 나약한 존재가 아닐까. '절대자'에 의지하지 않으면 '옳고 그름'의 판단을 못하고, '꿈과 희망'이 없으면 하루를 살아가지 못하는, 언제나 갈팡질팡 방향감각을 잃어버린 곤충처럼 살아가야 하는 운명이다. 빛을 향해 맹목적으로 돌진하다 그 뜨거움에 타버리는 불나방들을 마냥 비웃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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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7. 18. 16:51

반가운 살인자, 유오성, 김동욱 영화2010. 7. 18. 16:51

2005년 우리나라의 극장수는 301개, 2008년에는 309개였다고 한다. 반면 스크린수는 2005년에 1648개, 2008년에 2004개였다고 한다. 극장수는 그대로인반면, 스크린수는 꽤 증가했다는 통계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소규모 극장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에 단관극장은 유일하게 서대문아트홀(舊 화양극장, 드림시네마)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영화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저 현재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자료를 검색해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2,000개가 넘는 화면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상영되고, 또 상영되고 있다. 요즘은 모든 것이 '홍수의 시대'다. 흔히들 정보의 홍수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습득해야 할 정보를 찾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졌다고들 한다. 그래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를 잘 파악하고, 그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찾아내고, 습득된 정보를 잘 이해하고 조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어떤 영화를 선택해서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할지 궁금할때가 있다. 사회의 가치 체계가 다양해지고, 개인들의 기호 역시 다변화하는 시기에 '좋은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의 구분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영화 속에서 어떤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

몇년전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D-War'를 놓고 문화평론가와 네티즌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학교 교수는 영화 속에서 스토리의 구성 요소인 '개연성'은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하고 감독을 향한 동점심을 유발하는 저질 영화라고 폄하했었다. 네티즌들은 반면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관객의 기호'일 뿐 아니라, 나름 열심히 노력해서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 그토록 '저질'스러운 평을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반발했다. 애초부터 논쟁 자체가 '감정' vs '감정'이었다. 최초에 어떻게 논쟁이 촉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진중권 前 교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영화에 대한 평을 한 것이 네티즌들의 감정적인 반감을 사게 되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진중권 교수의 평소 어투나 문투를 감안했을때, 당시 외국 시장 진출을 앞둔 '디워'를 염려하고 사랑하고 또 기대하는 네티즌이나 국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공격적인 어투'는 늘상 시원시원한 면이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기분이 더 상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적인 대립'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그럼, 우리 논리적으로 따져보자'고 한들 제대로된 논쟁이나 토론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더욱이 그것이 소수 대 다수의 대결구도라고 한다면 '마녀사냥'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좋은 영화'인지 '그렇지 못한 영화'인지를 놓고 토론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스토리(plot)도 있지만, 영상, 음악, 배우, 유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종합예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화다. 스토리가 다소 엉성하더라도, 아름다운 영상이나 음악에 매료될 수 있고, 배우의 열연에 감동할 수 있으며, 유머코드에 박장대소할 수도 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어지러운 '혼돈'을 표현하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듯이 예술엔 '규정된 틀'이 있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산물들을 평가하는 주체는 '평론가'나 '비평가'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론가나 비평가는 일반 대중이나 관객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따져보았을때 다수의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 '성공작'인 셈이다. 물론 '포퓰리즘'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상업영화'나 '대중영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보편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맞다. '상업성'과 '대중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신적인 가치를 외면하거나 주제 의식이 없어질 수 있다고 염려할 수 있지만, 그 가치들은 모두 '보편성'의 하부 목록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다.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여러가지 가치를 발견하면서 성숙해가기 마련이다. 독립영화와 같이 일반 '대중'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편성' 외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대중문화를 대변하는 '상업영화'와는 별개로 다양한 창작 욕구를 고취시키고,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존재 기반이 취약한 '독립영화'와 같은 영세 제작자들을 위한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독립영화 전문관이나 독립영화제 지원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일부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또 하나, 가치 체계가 다양해지고, 정보의 공유가 쉬워지며 대중 지식의 전문화가 진행되는 이 시대에는 문화 영역에서의 '전문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 역시 과거 대중을 가르치고 선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쓰레기 영화'인지 아닌지 논쟁을 한번 해보자는 태도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마녀사냥'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어떤 영화에 대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다.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고 하여 감정적으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것은 '소수의 이견'을 무시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한 모습이다. 2006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 심판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종적을 감춘 신문선 해설위원도 '마녀사냥'의 피해자다. 무조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온정을 주고 받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상대방과 상대 집단의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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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7. 16. 14:56

내 깡패같은 애인, 박중훈, 정유미 영화2010. 7. 16. 14:56

친구들을 만나 저녁을 먹고 일찍 들어왔다. 토요일이라서 그런지 이른 귀가가 왠지 어색하기도 하고, 허탈하기도 했다. 먼가 대단한 걸 할리야 없겠지만, 그래도 오랜만에 만났는데 두시간 밥만 먹고 헤어진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집에 돌아오니 또 이렇게 좋을 수가 없다. 녀석들.. 결혼해서 아이를 키우는 아빠가 되었거나 결혼을 앞두고 있거나... 삶의 오랜 여정에서 오늘 우리가 이렇게 만나서 저녁을 먹었다는 사실은 어떤 의미가 있는걸까. 서로 비슷하면서도 다르고, 다르면서도 비슷한 게 우리네 일상인 것 같다.
 
네이버 평점이 8.9점이라는 사실에 깜짝 놀라 보게 되었다. 코믹영화치고는 꽤 높은 평점으로, 적어도 아주 웃기거나 그렇지 않으면 어느 정도는 '감동'적이어야 바라볼 수 있는 평점이었다. 주인공 오동철은 건달이다. 건달은 이른바 '폼에 살고 폼에 죽는다'는 폼생폼사의 인생인 경우가 많다. 오동철 역시 전형적인 건달 패거리에서 잔뼈가 굵은 인물로 젊은 시절 조직을 위해 감옥행도 불사했지만, 돌아오는 현실은 백수에, 단칸방 신세였다. '쪽팔리면 죽는다'는 철칙을 마음에 품고 살아온 인생이지만, 어찌된 게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인생은 더욱더 '쪽팔리는 신세'로 전락하고 만다.  그러던 차에 다니던 회사에서 짤리고 취업준비를 하고 있는 한세진이 옆방으로 이사를 온다. 역시 건달 영화의 전형이랄까. 평생 남에게 못된 짓만 일삼고 살던 주인공은 다른 사람을 돕는 행복감을 발견하며 자신의 지난 삶을 회한하고 '새로운 인물'로 거듭난다. 

나 역시 그렇게 '대책있는 놈'은 아니지만,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고삐 풀린 망아지마냥 '현실감각'을 잃어버린 건달 오동철이라는 인물에 그다지 호감을 가질 순 없었다. 세상은 언제나 나를 기준으로 더 강한 사람이 있고, 더 약한 사람이 존재한다. 그런 입장이야 언제든지 달라질 수 있지만, 한 시점을 기준으로 강자 앞에서 얼마나 떳떳하고 약자에게 얼마나 관대한가가 한 사람의 인격을 가늠하는 잣대가 된다고 생각한다. 약자에게 관대할 수 없는 곳이 바로 '주먹의 세계'이다. 어찌 그 곳에서 인간성을 논하고, 도리를 논한단 말인가. 영화 속 동철 역시 굳이 찾자면 솔직하고 가식적이지 않다는 것 하나의 장점 외에는 장점을 찾기 어려운 인물이다. 물론 세진의 면접장에서 흘린 '회한의 눈물'만큼은 진실된 마음에서 우러나온 것이며, 영화라서 가능한 변신일 수 있겠지만, '인생의 새출발'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더러운 인간'들을 혼내줄때만큼은 통쾌했다. 이런 나를 보면 '폭력성'이라는 것이 어느정도 인간의 본성이다 싶을 때가 많다. 가치관이 정립되기 이전 과도기의 학생들이 '폭력써클'이니 뭐니 하며 나쁜 길로 빠지기도 하며, '스타크래프트'나 '워크래프트'처럼 죽이고 파괴하는 게임들은 어른이 되어서도 즐기는 사람들이 많다. 액션 영화를 보면서 열광하기도 하고, 혀를 끌끌 차면서도 '살인사건' 뉴스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인다. 요즘 전쟁을 다룬 영화나 드라마는 관심이 없어진 반면, 여전히 건달 영화는 늘상 재미있게 본다. 더불어 여담이지만, 여주인공으로 나온 '정유미'라는 배우.. 참하고 선한 인상으로 이미지가 참 괜찮았다.

아이폰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戰爭

아이폰 4세대 출시가 연기되었다고 한다. 애플의 CEO 스티브 잡스는 당초 한국에 아이폰을 공급할 예정이었지만, '정부의 승인 지연'으로 공급대상국가에서 제외한다고 밝혔다. KT나 애플의 늑장인지 정부의 탓인지는 베일에 가려진 상황이지만, 아이폰 4세대 출시를 고대하던 사람들은 19일 KT의 공식 입장발표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을 것 같다. 

갤럭시 S 출시와 맞물려, 지난 1-2달간 아이폰 4세대와 갤럭시 S는 핫 이슈였다. 언론에서는 연일 두 제품을 비교했고, 이미 아이폰이 출시된 미국의 시장동향을 전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그런 와중에 '언론의 아이폰 때리기'가 도가 넘쳤던 것도 사실이다. 언론은 주관적 판단이 가미된 기사를 통해서 아이폰의 결함 때문에 소비자들이 외면하고 있다거나 그런 결함에도 불구하고 애플이 독선적인 태도를 버리지 못했다는 이미지를 소비자들에게 심어주기 위해서 노력했고, 반면 삼성전자가 내놓은 갤럭시 S 는 사용자들이 만족하고 있는데다가 아이폰과의 비교에서도 조금도 부족하지 않다고 선전하고 있다. 애플이 아이폰을 통해서 전세계 통신시장에 끼친 영향은 가히 경이적이다. 한동안 우리의 언론이나 업계에서는 그런 애플의 '놀라운 업적'을 눈뜨고 지켜봐야만 하는 현실을 통해서 그동안의 '안주'를 겸허하게 받아들이고, 심기일전의 각오를 다졌었다. 하지만 지금은 '눈가리고 아웅'이다. 그저 씁쓸할 뿐이다. 나 스스로가 아이폰 사용자이기도 하지만, '아이폰'이 과거 매킨토시의 전철을 밟게 될지, 아니면 과거의 교훈으로 경쟁에서 살아남을지, 참 궁금하다. 하지만 그 결과를 떠나서 30여년동안 IT 역사에서 2차례 지각변동을 일으키게 한 애플의 저력엔 그저 감탄... 또 감탄할 뿐이다.
                    
고스톱이 남긴 것

이제 아이폰 고스톱은 그만할까 싶다. 도박에 빠지는 인간의 심리는 참으로 단순하다. 이미 하나의 이론이 있을지, 아니면 미래의 심리학의 한 이론으로 등장할지 모르겠지만, 비단 물리 현상뿐만 아니라 인간의 심리에도 '관성의 법칙'을 적용할 수 있을 것 같다. 사람의 의식과 무의식은 알게 모르게 그러한 관성의 힘에 이끌려 때론 '통제력'과 '의지력'을 상실하고 만다.
 
참 신기하게도 계속된 파산을 거듭하다가 한번 크게 먹고 나니, 그 다음부터는 일사천리로 '자산'이 불어났다. 특별히 원칙을 따른 것도 없는 것 같은데, 여러번 거듭하면서 내가 '스킬'이 늘어난건지 의구심이 들었다. 그러면서 괜히 '이제 크게 잃을 걱정은 없다'라는 안도감이 생기기 시작하는 것이다. 스스로 방어력이 생겼다고 생각하면서 '크게 따고 적게 잃는' 고수라도 된 것처럼.

500만원이 넘으면서부터는 판돈을 점당 만원으로 올릴 수가 있다. 500만원이라는 금액은 액면으로 큰 액수이지만, '점당 천원'으로 치고 있을때의 50만원에 불과한 금액이다. '점당 천원'일때 500만원은 큰 자산에 속하며, 왠만한 경우가 아니면 좀처럼 파산하지 않는다. 하지만 '점당 만원'으로 판돈을 올리면 단 한판에도 '파산'할 수 있는 불안정한 액수다. 따라서 '점당 천원'의 판돈으로 보다 안정적인 자산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 2천만원 정도라면 '점당 만원'의 세계에서도 쉽게 파산당하지 않을 수 있다. 이를테면 자산이 2천만이 넘을 경우에 '점당만원'으로 판돈을 올리되, 돈을 잃어 천만원 이하로 내려가면 다시 '점당천원'의 세계로 돌아간다는 기준을 세워 놓아야 한다. 자산이 늘었다고 '판돈'을 바로 올리는 행위는 '매번 전재산을 걸고 가위바위보를 하는 것'과 같다. 로또만큼은 아니겠지만 요행을 바라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런데도 사람 마음이 참 우습다. 그런 원칙을 정해놓았다고 하더라도, 사람 마음은 바람부는 날 흩날리는 비누방울처럼 가볍고 위태로운 것 같다. 나는 채 2천만원이 다다르기 이전에 '판돈'을 올렸고, 이후 천만원 이하로 자산이 감소했음에도 '판돈'을 내리지 않았다. 몇번 잃고 그것을 만회하려다 보니 조급해질 뿐만 아니라 '모험성 GO'를 감행하게 된다. 여기서 한번 더 'GO'를 가면 큰 돈을 딸 수 있는데, 독박의 위험 역시 있는 상황에서 조급함은 '모험'을 부추기게 된다. 그나마 '사이버 머니'이기에 망정이니 실제 돈이라면 오죽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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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7. 4. 23:27

아부지, 전무송, 박철민 영화2010. 7. 4. 23:27

이번 주말 연휴의 두번째 영화. 배우 박철민의 코믹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어느덧 매료되어 빠져들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의 분위기가 마음에 와 닿아 별 기대없이 보았는데, 선생님 역으로 나온 박철민과 학생들 역할을 맡은 아역 배우들의 '코믹 에피소드' 덕분에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고지식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진부한 스토리지만, 정감가는 시골풍경과 구수한 사투리, 잔잔한 배경음악 등이 어우러져 영화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감독이 영화 속에 담고 싶은 '주제의식'은 충분히 전달력이 있지만, 그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영화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해진 면이 없지 않다. 기발하고 짜임새있는 스토리나 극적인 반전으로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웃음 포인트'를 적절히 가미함으로써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관객들의 집중력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박철민 혼자서 그 역할을 도맡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생각' 속에 갇히는 것을 경계해야 함은 마땅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름의 원칙과 믿음, 소신이 없다면 매번 번민하고 방황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고, 자칫 '삶의 동기 부여' 자체가 미약해져 의욕 자체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런 '삶의 가치관'은 개개인의 일생을 지탱하는 근간이기도 한 셈이다. 더구나 나이가 먹을수록 '지난 과거'와 '영광스러웠던 추억'을 '그릇된 시간'으로 스스로 매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자신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깊은 좌절감과 패배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생을 땅에 의지해 농사짓고 살아온 아버지로서는 한글을 깨우치는 일보다 밭을 갈아엎는 일이 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고, 그런 원칙과 믿음이 '과거의 시간'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비단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나 학교 안팎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면 '살아온 시간' 즉 나이에 비례해서 '믿음'이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세대차'라고 하는 문화의 격변과 더불어 때로 '시니어 세대'와 '주니어 세대'간의 트러블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 혹은 前 세대들의 굳건한 '생각의 틀'을 무너뜨리려는 後 세대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번번히 좌절되곤 한다. 영화속에선 '아들의 죽음'이라는 피눈물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아버지가 변했다.

'오픈 마인드'라는 말은 그런 '생각의 틀'을 굳게 걸어잠그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나이에 무관하게 꾸준히 '생각의 융통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문화 혹은 올바른 생각에 항상 귀기울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나치게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기보다는 삶의 '초점'을 오늘에 맞출때라야, 비로소 '자기 생각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느날 문득 내 지난 날의 생각들이 모두 틀렸음을 인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항상 그 순간에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어떤 삶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대본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삶은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수학 문제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세상과 부단히 소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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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