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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 7. 09:49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도서2011. 1. 7. 09:49

기행문이라기보다는 여행에 대한 의미를 알랭 드 보통 특유의 관점과 필치로 서술한 책이다. 어떤 지방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관점을 동원하기도 했고, 스스로 여행하면서 느낀 바를 기술하기도 했다. 알랭 드 보통의 소재는 때론 '사랑',  '일'이고, 또 '여행'으로 바뀌지만 보통은 언제나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한다. 철학적인 사유라는 말이 다소 거창한 느낌을 주지만, 사람이 하는 어떤 생각과 행위의 저변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나 패턴에 대해서 항상 호기심을 갖고 고민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처음 접했을때만큼의 신선함과 반가움이 없는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을까 싶다. 

다분히 추측에 불과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이상주의자이다. 많은 철학자들처럼 보통은 집요하게 '이면'을 들추어보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왜 '이상적'이지 못한지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그러한 고민은 '고통'이 아니라 '사유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상적이지 못한 사회'는 애상과 허무를 동반한다. '허무'는 '관조'를 동반하여 삶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삶 밖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심리적인 거리감을 제공한다. 비로소 나무 대신 숲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는 계기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삶을 요모조모 살펴보면서 즐거워지는 것이다. 

보통은 그래서 여행이 때로 실망스러웠다고 말한다. 그의 여행은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해방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는데서 출발한다. 어느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 특정한 TV프로그램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기대'에 따르는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그런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대가 없이 학창시절 유럽으로 베낭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유럽의 여러나라들을 둘러보면서 그동안 책이나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했던 장소들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기대'에 따르는 실망이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그 장소에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또는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존재들 때문에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일상이 팍팍했던 사람일수록 '존재의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게 되면 '관대'해질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반면 특정한 목적을 가진 여행은 '기대'에 따른 '실망'의 위험성이 좀 더 크다고나 할까. 그건 프랑스에서 실망하면 '아, 그럼 네덜란드로 가볼까'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흐를 떠올리면서 프랑스 아를을 여행하는 사람은 '고흐의 자취'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에 실망할 수 있다. 그리고 대안은 없다. 그것이 여행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랑을 이야기할때도 같은 관점이었지만, 보통은 '상상'과 '경험'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상상' 속에선 맘껏 기대하고, 맘껏 조작하면서 설레고 즐겁다. '사랑'이 무한한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지만,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낭만에 취해 일출을 보러 정동진에 갔는데 잔뜩 고생만 하고 돌아왔다면 그때부터 '경험 전의 상상'과 '경험 후의 현실'의 괴리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보통의 자연 예찬은 일관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발달된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연으로 더 깊숙히 들어갈수록 진한 향기를 내뿜는 '고요한 자연의 생명력'에 감동한다고 말한다. 아를에서 '고흐의 채취'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자연을 기대하는 말그대로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있는 동식물들의 생명과 일상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감동이 오래 지속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 '자연'은 일상이 아니라 여행이기 때문에 감동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시각과 가치관은 모두가 제각각일테지만, 전체적으로 보통이 이야기하는 삶에 공감한다. 사유를 즐기고, '자연스러움'을 사랑하기에 알랭 드 보통은 파스칼의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담고 싶은' 구절이었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팡세, 파스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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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12. 30. 07:16

삼국지 오디세이, 다카시마 도시오 도서2010. 12. 30. 07:16

삼국지의 여러 인물들이나 사건들을 최대한 정사 '삼국지'에 기반하여 다루고 있다. 소설 '삼국지연의'의 어떤 부분이 허구적이며 실제 인물들의 모습과 평판은 어떠했는지 사료를 참고해가며 보여주고 있는 셈이다. 전체적으로 소설 '삼국연의'가 촉나라 관점에서 씌였기 때문에 그 부분에 대한 지적이 많았고, 위나라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조조라는 인물에 대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어떤 책이든 저자의 주관적인 가치 판단이 들어가 있기 마련이다. 그런 점에서 다카시마 도시오라는 저자가 삼국지의 정세와 인물들에 대해 전체적으로 어떤 판단을 하고 있는지 가늠해볼 필요가 있다.

인간은 불완전하기 때문에 인류의 역사 역시 불완전할 수 밖에 없다. 시간이 흐르면서 각색되고 윤색되다 보면 어떤 사람은 '영웅'이 되고, 심지어 '신화'적인 존재로까지 격상되기 마련이다. 그런 연유에서 역사를 기술하는 사람은 그만큼 이성적이면서도,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해야 하고, 냉철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저자도 언급했듯이 역사의 기술 역시 그 시대의 정황이나 저자의 입장, 주관적인 기호 등이 반영될 수 밖에 없다. 결국 판단의 몫은 독자의 몫이 되고 만다. 

사람은 다양한 삶을 살고, 개개인마다 다양한 가치관을 갖고 있다. 조조든, 유비든, 손권이든 역사적인 인물을 판단할 때도 맹목적인 접근법은 굉장히 위험하다. 사람마다 장점과 단점을 겸하고 있는 만큼 자신만의 '철학'을 가지고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시대가 난세였던만큼 그 시대에 필요한 사람이 영웅이 되었다. 저자의 말처럼 평화로운 시절에는 건달이나 해먹었을법 한 사람들이 큰 인물이 되기도 했던 것이다. 전쟁의 시대에 훌륭한 군인이 탄생하는 것처럼. 

여전히 삼국지에 대한 나의 시각은 리동혁의 '삼국지'를 읽고 쓴 소감하고 크게 다르지 않다. 난세에서의 '처세'. 죽음은 두려워하지만 전쟁에 열광하고, 난폭한 것을 배격한다고 하지만 다른 사람들의 목숨 따위는 파리 목숨 취급하면서 영웅이 되는 사람들에 열광하는 인간의 심리를 어떻게 설명해야 할까.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논리 하나로 모든 것을 수긍할 수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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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9. 6. 02:04

경제 저격수의 고백, 존 퍼킨스 도서2010. 9. 6. 02:04

'화폐전쟁'이라는 책에서 그 책의 역자는 '절반은 진실, 절반은 허구'라는 생각으로 책을 접하라는 이야기를 서문에 남겼다. 2004년에 출판된 '경제 저격수의 고백'이라는 책은 '화폐전쟁'에서 참고로 삼은 책 중의 하나다. 저자가 실존인물이고, 실제 경제 저격수로 활동했다고는 하나, 이 책의 이야기 역시 비슷한 입장에서 접근하는 게 맞을 듯 싶다. 워낙에 복잡다변하고, 정보가 홍수처럼 넘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보니 직접 보지 않는 이상 언제나 '진실은 저 너머에...'라는 생각도 들고, 때론 보고 있는 것도 믿어지지 않을 때가 있다.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 경구가 있는데, 많이 알게 될수록 오히려 진실과 옳고 그름에 대한 확신이 없어진다고나 할까. 겸손해진다는 말도 맞지만, 자신이 없어진다는 말도 맞을 것 같다.

'경제 저격수'라는 거창한 칭호를 사용해서 무언가 대단한 비밀이라도 밝혀낼 것과 같은 기세로 씌여진 책이지만 막상 책을 읽다보면 크게 놀랄만하다거나 굉장한 비밀을 폭로한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왜일까. 워낙에 '음로론'에 길들여진 탓일까, 아니면 이미 많은 정보들이 더이상 '비밀스럽게' 취급되지 않기 때문일까. '화폐전쟁'이라는 책을 먼저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을 것이다. 사실 그동안 '미국'이라는 나라가 '경찰 국가'를 자임하면서 세계 곳곳에서 그 맹위를 떨쳐 왔지만, 실제로 자국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그들만의 이데올로기나 경제 모델을 세계의 각 나라에 주입시키려고 애써 왔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어려울 것이다. 그것은 이미 다양한 사람들을 통해서 제기되어왔고, 또 비판을 받아온 부분이다. 미국의 CIA나 FBI, 해병대 등이 비공개적으로 활약했다는 사실은 이제 공공연한 사실이 되었다.

저자가 주목하는 부분은 '기업 정치'에 대한 부분이다. 다국적 기업이라고 하는 허울 아래 많은 미국 기업들이 개발도상국이나 빈곤 국가를 상대로 비열한 장사를 했다고 폭로하고 있다. 더불어 그런 기업들의 만행은 단순히 시장 경제 차원에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부와의 결탁을 통해 더욱 치밀하고 계획적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마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의 엄석대의 역할을 미국이 하고 있는 셈이다. 

국가와 민족, 종교간의 갈등과 분쟁은 비단 어제 오늘만의 역사는 아닐 것이다. 세계사라는 크고도 긴 강줄기에서 '미국'이라는 나라는 20세기에 최고의 국력을 자랑했던 나라로 기억될 것이다.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보면 시대마다 '미국'의 역할을 담당했던 나라들이 있었다. 다만 과거의 역사가 상대적으로 솔직했던 반면, 지난 세기의 역사는 위선과 거짓의 시대였다. 힘의 우위를 과시하고, 침략 전쟁을 통해 약소국을 예속시키던 단순했던 논리에 비해 지난 세기의 미국은 '세계 정의'를 내세우면서 지난 시대와 선을 그었다.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조하며 '정의'를 외면하는 나라들을 가차없이 심판대 위에 올렸다. 과연 그 '정의'는 말그대로 정의로웠는지. 단순히 '미국의 정의'는 아니였는지. 저자는 그 정의의 폐부를 속속들이 파헤쳐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세계인들에게 경종을 울리고 있다. 

맥빠지는 이야기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누가 '옳고 그름'을 재단할 수 있으며, '정의'를 규정할 수 있는지 자꾸 회의가 드는 것도 사실이다. '절대 권력은 반드시 부패한다.'는 말은 국가간의 '힘겨루기'에서도 예외가 아니다. 우리는 '불우이웃돕기'를 하고, 기도를 하고, 사랑을 베풀면서 인류의 '선한 본성'을 믿고, 그 기반 위에 역사가 발전하고 사회가 진보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개인이 공동체가 되고, 공동체가 국가가 되면서 '인간의 본성'은 야멸찬 집단 논리에 희생되어 설 자리를 잃게 되는 경우가 많다. 저자의 말처럼 다국적 기업에 종사하는 대다수의 종업원들은 그들의 일이 인류에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심각하게 고민하지 않는다. 누군가를 착취하는 걸 싫어하고, 양심의 가책을 느끼지만, 몸담고 있는 기업이 그렇게 할 경우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는다. 개인 윤리와 집단 윤리는 큰 차이가 있다. 구성원이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개인으로 존재하느냐, 집단으로 존재하느냐에 따라서 큰 차이를 보인다는 것은 한번 생각해 볼 문제이다.

사람은 보통 개인으로 존재할때, 부끄러워하고, 다른 사람을 연민하고, 좋은 일을 하면서 뿌듯해하는 경향이 나타난다. 그러한 '선한 본성'은 집단의 구성원으로 존재할때 힘을 발휘하지 못하고 무기력해진다. 집단의 크기가 커질수록 '무감'의 정도는 심해진다. 심지어 집단의 논리가 개인에게 역전도되어 마치 '약육강식'이니 '적자생존'이니 하는 '정글의 법칙'이 인간의 가장 근원적인 본성이라고 믿게 된다. 자본주의 태생과 함께 요즘은 '기업의 논리'가 개인과 집단의 논리가 된 셈이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고통을 보면 마음아파하던 많은 이들이 이제 다른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하는 기업에 몸담고 있으면서 마음의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런 현실을 인지하고 있다고 하더라도, 피해자의 체온을 직접 느낄 일이 없는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 되고 만다. 왜냐하면 '기업의 본성'이 곧 '인간의 본성'이고, 경쟁은 피할 수 없는 일이며, 세상은 '승자'와 '패자'로 양분되기 마련이니까. 

리차든 도킨스의 '이기적 유전자'라는 책에서는 '이타적 유전자'와 '이기적 유전자'가 어느정도 일정한 비율을 유지하며 존재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 말인즉, 어떤 '기준'을 가진다고 해도 100% 이타적이고 선한 사람들만 존재하는 건 불가능하다는 이야기이다. 그 주장에 따르면 다소 위험한 결론에 도달하게 되는데, '이타적'으로 살아야 할 당위성을 상실하게 되는 것이다. 하지만 그러한 성급한 결론에 한가지 이의를 제기하자면, 다분히 결과론적으로 해석했을때 그렇다는 것이다. 즉, 어떤 과정을 통해서 그런 비율을 유지하고 있으며, 그러한 비율 속에서 어떤 식으로 '정의로운 공동체'를 구성할 수 있는지에 대한 논의가 생략되어 있다. 

만일 그러한 비율이 일정한 게 사실이라면, 비율의 변동폭이 클 경우 사회가 혼란스러워지게 된다. '이기적 유전자'가 증가했다가 그에 대한 반작용으로 '이타적 유전자'가 증가하고, 다시 '이기적 유전자'가 증가하는... 이러한 되풀이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반목과 배신, 무질서가 뒤따르게 된다. 더불어 '이타적 유전자'와 '이기적 유전자'의 삶에 뚜렷한 차이가 있어야 하고, '이타적 유전자'에게 어떤 식으로든 보상이 이루어지는 게 중요하다. 도킨스가 저서에서 그 비율을 나누는 시뮬레이션을 할때 쓴 방법이 바로 '이기적 유전자'의 배신하는 속성과 그것을 인지하는데 걸리는 시간을 고려하여 비슷한 방법으로 복수하는 '이타적 유전자'들의 행동 패턴을 분석하는 것이었다. 즉, '이타적 유전자'들도 한 두번 속다 보면 '이기적 유전자'들의 패턴에 익숙해져 대응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인류의 오랜 역사는 이러한 패턴의 정형화를 가능하게 하고, 그로 인해 이기적 유전자들의 그릇된 행동을 통제할 수 있는 다양한 방법들을 강구할 수 있는 여지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100:0의 비율이 불가능하더라도 그 비율의 변화는 가능할 것이다. 보다 더 '이타적'인 사회가 되는 셈이다. 

인류는 느린 발걸음으로 더디게 진보하고 있다. 종종 '생의 유한성' 때문에 인류를 논하고, 역사를 논하는 것이 허무하게 느껴질 때가 많지만, 다행스럽게도 세상의 곳곳에서 그 발걸음을 떠받치고 있는 분들이 많다. '동물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인간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말처럼 역사에 뚜렷한 족적을 남기고자 불굴의 신념과 의지로 똘똘뭉친 '위대한 유전자'들도 많다. 책의 내용이 얼마만큼의 진실을 담고 있느냐의 논쟁을 떠나 '경제 저격수'를 자칭하는 존 퍼킨스의 조언대로, 우리들 '보통 유전자'들이 할 일은 세상을 향한 따뜻한 시선과 냉철한 이성을 토대로, 인류의 밝은 미래를 꿈꾸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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늦은 저녁 귀가길에 찾아드는 쓸쓸함과 고독 그리고 허무에는 상반된 감정이 묻어 있다. 이상에 대한 애절함과 평범함에 대한 애틋함. 마음 한 켠에는, 너무도 평범하게 살고 있다는 생각 때문에 탈출하고 싶은 충동이 도사리고 있고, 다른 한 켠에는 '평범한 행복'을 향한 쓸쓸함이 자리잡고 있다. 어느 한 쪽도 제대로 살고 있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 때문인 듯 싶다. 살아보지 못한, 가져보지 못한 저 건너를 영원히 동경하면서 살아가는 것이 '삶의 숙명'인 것일까.

지난 시대와 이 시대를 살아왔고, 또 살아가는 위인들의 삶을 접하다 보면 항상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 수 밖에 없다. 마치 태어날때부터 '계시'를 받은 것처럼 특출난 삶을 살아가는 그들을 바라보면 늘상 존경과 동경의 마음과 함께 부러움과 자격지심이 함께 한다. 어떤 기회나 역량이 운명적으로 '예정'되어 있고 그것들의 개인차가 현저하다고 느껴질때면 참 어리석게도 종종 억울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조영래 변호사는 그런 관점에서 보면 '선택'받은 분이었다. 남다른 지적 능력과 판단력, 카리스마, 거시적 안목. 모든 것을 갖춘 대가로 '짧은 생'을 부여받기라도 한 것처럼 불꽃같은 삶을 살다가 떠나셨다. 개인으로서 '자아성취'를 이룰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었지만, 정작 그 많은 역량과 시간들을 자신을 위해 쓰지 않았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욱더 '선택'받은 인생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시간이 흐를수록 비인간화 되어가고, 모든 것들이 자본화 되어가는 삭막한 세상에 '그래도 살만한 세상'이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신이 인류에게 베푸는 '은혜'같은 분이라고나 할까. 그렇게 '따뜻한 마음'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줄 아는 분이 계셨다는게 마냥 감사할 따름이다. 그저 평탄하게 살아갈 수 있었는데도, 학생운동을 하고 인권변호를 한 것이 후회되지 않느냐는 질문에, "찍소리도 못하고 가는 사람들이 수많은 세상에서" 어렵고 고통받는 사람들 근처에 가서 시대적 고통에 대해서 냄새라도 맡은 것이 다행이라고 말하셨다고 한다. 

조영래 변호사는 90년 12월 12일에 운명하셨기 때문에, 삶의 자취는 대부분 함께 했던 친구들과 동료들에 의해서 회자된다. 어떤 면에서는 미화된 부분도 있을테고, 어떤 점에서는 폄하되는 부분도 있을 것이다. 직접 겪어보지 않은 이상, 여러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고 판단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한가지 유일하게 경험할 수 있는 것이 있다. 바로 조영래 변호사가 쓴 글들이다. 그 엄청난 필력에 정말 놀라지 않을 수가 없다. '글'은 단순한 단어들의 조합이 아니다. 한 사람의 지식과 철학이 집약되어 있는 '사고의 총체'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에 씌여진 글들만 접하더라도 가히 어떤 분이었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다.

책을 읽는 동안 '잊고 지내면서 자칫 잃어버릴 뻔했던 소중한 가치'를 되찾는 것 같아 무언가 형언할 수 없는 벅찬 감정에 빠지기도 했다. 더불어 책의 후반부에 수록된 조영래 변호사 주변분들의 '추도사'를 읽을 때는 가슴이 먹먹해지면서 눈물이 났다. '뜻깊은 삶'으로 몸소 보여주셨던 그 소중한 가르침을 조금이나마 실천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  

인터넷사용 PC대수 제한

우연히 회사 선배와 KT의 인터넷사용PC 대수를 제한하는 정책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KT에서 어떤 방법으로 PC대수를 파악할 수 있느냐 하는 것과 그것이 합당한지에 대해서였다. 인터넷에 떠도는 이야기들을 보면공유기만  IP를 쓰기 때문에, 실제로 PC대수를 파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는 말이 있는데 맞는 말은 아닌 것 같다. 실제로 KT에서 사용대수 제한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공유기에 연결된 각각의 PC들로 패킷이 잘 전송되기 위해서는 어떤 식으로든 패킷의 목적지 안에 PC나 공유기의 포트 정보가 들어가 있을 것이라는 말은 일리가 있다. 패킷의 구조에 대한 보다 상세한 분석이 필요할 듯 싶다. 사용자들 중에 KT에서 익스플로러를 통해서 메세지를 띄우기 때문에 파이어 폭스와 같은 브라우저는 괜찮다고 하는 분들이 있는데 아마도 그것은 KT에서 인터넷회선을 특정PC를 대상으로 막을 수가 없기 때문에 브라우저를 통해서 통제하는게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 KT인터넷을 쓰진 않지만, 사용대수 제한 정책은 사리에 맞지가 않다. 요금제도를 보면, 사용량 기준이 아닌 업로드/다운로드 대역폭 기준으로 요금이 결정된다. 데이터 전송시 단위시간당 최대로 주고받을 수 있는 데이터량을 기준으로 요금을 산출하는데, 느닷없이 그 대역폭을 나누어쓴다고 추가요금을 내라고 하는 것은 엄밀히 중복요금 부과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가정에 PC를 여러대 두고 있더라도 동시접속 수만 제한을 하는 걸 보면, 단순히 단말대수가 기준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만약 1대를 더 추가접속 할때 대역폭이 두배로 늘어난다면, 요금이 늘어날 수 있는 명분이 되지만, 그것은 회선의 공급/관리의 역할을 맡은 KT에서 관리해야할 문제이지, 사용자에게 책임을 떠넘겨서는 안된다. 휴대폰, E북 등 인터넷 접속기기들의 종류는 매우 다양해지고 있다. 이 와중에서 기기들을 통제하겠다는 KT의 발상은 시대착오적인 면이 없지 않다. 누군가의 말마따나 한전에서 전구의 갯수에 따라 추가요금을 부과하겠다는 것과 다름 아닌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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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8. 30. 00:54

스티브 잡스처럼 일한다는 것, 린더 카니 도서2010. 8. 30. 00:54

또다시 주말이 후다닥 하고 지나갔다. 결혼식을 일주일 앞두고 성당에서 간단한 예식을 하는 병현이를 위해 증인이 되어주고 왔다. 이번 주말 일정은 그것 뿐이었는데, 그것도 한마디의 대사도 필요치 않는 그저 5분동안 책받침(예식에 관한 문구가 담긴)을 들고 있는 게 전부였다. 예식이 끝나고 병현이와 예비신부, 그리고 예비신부측 증인으로 참여한 예비신부의 친구들 2명과 함께 조촐하게 저녁을 먹었다. 결혼을 일주일 앞둔 그 느낌은 어떨까. 사뭇 궁금하기도 하면서, 무언가 설레임과 아쉬움이 교차할 것만 같은 상상이 되기도 한다. 어떤 면에서 평범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가장 행복하게 사는 길이기도 할 것이다. 그런 점에서 평생을 함께하고픈 상대를 만나, 적절한 시기에 인생의 큰 전환점을 맞게 되는 병현이에게 더없이 축하를 보낸다. 

주말내내 집 안에 있으면서 빗소리를 즐겼다. 왠지 가을을 부르는 소리처럼 들려 여간 반가웠다. 올해도 가을을 맞이하는 그 마음이 더없이 벅차지 않을까. 그 선선하고, 청명한 바람과 공기가 피부에 와 닿는 느낌이 벌써부터 기다려진다. 시간이 지날수록 곁에 오래 머무르지 않는 가을이지만, 올해 남은 몇개월은 어느 해보다도 알차게 지내고 싶다. '시간의 소중함'을 이제라도 절절히 느끼게 되었으니, 그나마 다행이 아닌지. 

주말의 여유로운 시간을 활용해서 스티브 잡스 책을 마저 다 읽었다. 예상했던 것 이상의 내용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니었지만, 천재로 불리우는 사람의 삶의 역정을 따라가 본다는 것은 꽤 흥미로운 일이다. 더구나 IT 일을 하고, 관심을 더 많이 가지고 있는 나 같은 사람에게는 '세상을 변화시키는' 기술제품을 만들고, 새로운 IT문화를 창조하는 선구자적인 역할을 하는 사람의 매력에 빠지지 않을 수가 없다. 자신에 대한 강한 자부심과 부단한 열정과 노력, 완벽주의, 편의주의, 디자인에 대한 집착, 강한 신념으로부터 우러나오는 화술 등 스티브 잡스는 많은 특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자, 그 많은 자신만의 개성을 잘 버무려서 하나의 완성형 인간으로 다시 태어난 사람이다. 스티브 잡스와 애플, 픽사를 접하면서 요즘 이래저래 혼란스러운 마음이 앞선다. 왠지 아무 생각 없이 걸어가고 있는 길이 갑자기 절벽을 만나서 오갈 곳을 잃어버린 느낌이다. 새로운 길을 찾자니 어느 방향으로 가야할지 감히 엄두가 안나고, 다시 돌아가자고 하니 그 시작이 어디인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저 '색다른 유전자'들이 바꾸어나가는 이 세상에 '보통 유전자'가 별 수 있겠어? 라고 체념해야 하는 것인지. 

친구가 사업을 한다고 해서 요즘 분주한 모양이다. 많은 준비를 한 것인지, 어떤 확신과 비전이 있는 것인지, 그 길이 새로운 블루오션으로 자리잡을 수 있을 것인지... 여러가지 면에서 염려가 된다. 시간적 여유를 가지고, 같은 분야에 나 역시 열정과 애정을 가지고 있었다면, 그 상황을 바라보면서 다소 객관적인 판단이라도 가능하겠건만, 그런 입장도 되지 못한다. 다만 그 일이 '상품가치'가 있는 것인지, 수익성을 가져다줄 수 있는지에 대해서 나 역시 의구심을 채 지우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자가 실험'을 해보고 있는 상태이다. 그 덕에 이번 주말에 시간과 돈을 많이 잃었다. 화가 나고 속상하기도 하지만, 인내심을 좀 더 가져보려고 한다. 세상 모든 일을 그저 '운'에 맡기기엔 그 무대가 녹록치만은 않다. 

애니메이션이나 드라마, 다큐멘터리 여러 편을 대강 살펴보았는데 이번 주말엔 허사였다. 그다지 마음에 든 작품이 없었다. 주말드라마 '결혼해주세요'는 10편이 넘어가면서부터 초반에 설정했던 인물들의 신선함이 조금씩 사라지는 느낌이고, 우리나라 드라마의 전통적인 '시간끌기'에 돌입할 테세이다. 전개가 조금더 빨랐으면 좋겠는데, 기대대로 될 것 같지는 않다. 이천희와 배두나가 주연하는 '글로리아'는 종종 케이블방송에서 해주는 재방송을 우연히 봤는데, 다양한 개성을 지닌 인물들이 등장해서 호기심이 일었다. 하지만 내 기호에 맞는 드라마 전반의 분위기에 유쾌함과 즐거움, 통쾌한 웃음을 선사해주는 나만의 '킬링 캐릭터'를 발견할 수 없어서 아쉬웠다. '동쪽의 에덴'이라고 하는 일본 애니메이션은 한 두 세편 대강 훓어보다가 말았다. '허니와 클로버'의 작화를 그린 사람이 작화를 담당했다고 한다. 그래서 주인공들을 보고 있으면 왠지 허니와 클로버에 등장했던 모리타와 하구가 생각난다. 하지만, 다소 황당무계하고 현실 괴리적인 시나리오를 즐기지 않는터라 전체적인 이야기 전개가 흥미진진하지 않았다. 일본 드라마나 애니메이션들이 색다른 소재나 상황을 많이 채용하는데 반해, 나의 의식은 너무도 '현실적'인 셈이다. '초속 5센티미터', '허니와 클로버'가 베스트 애니메이션이라는 것만 생각해봐도 그 점은 분명한 것 같다. 회사 선배가 요즘 보고 있는 영국 BBC 방송의 '살아있는 지구' 1편도 조금 살펴보았다. 새끼 북극곰이 오랜 동면에서 깨어나 설원 위를 낑낑대면서 돌아다니는 모습은 너무도 사랑스러웠고, 순록이 이리에게 쫓기는 모습은 몹시 안타까웠다. 생명의 신비는 참으로 놀랍다. 마치 어린아이처럼 엄마 곁에서 재롱을 떨고, 눈 위에서 바둥거리는 어린 생명체들을 보면, 이 세상의 생명체를 '인간'과 '인간이 아닌 것'으로 나누어 별다른 양심의 가책없이 생태계 파괴를 일삼는 인간의 잔인성이 참으로 부끄럽다. 오랜만에 기아 경기를 봤는데 답답해서 혼났다. 지난해 우승은 참으로 감사할 노릇이지만, 2010년의 기아는 여러가지로 나에게 유무형의 손실만 남기는 팀이다. 거리를 좀 두기로 했다. 

몹시 생산적인 삶을 살고 있는 스티브 잡스를 다룬 책을 읽으면서 감탄했으면서도, 소중한 휴일에 그다지 생산적으로 보내지 못한 것 같아 이번에도 주말의 끝자락에 진한 아쉬움이 남는다. 고 조영래 변호사의 글들을 엮은 '진실을 영원히 감옥에 가두어 둘 수는 없습니다'라는 책을 읽고 있으니, 어떻게 사는 것이 올바른 삶일까... 해답없는 의문들만 자꾸 머리속을 빙빙 돌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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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