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7. 09:49
여행의 기술, 알랭 드 보통 도서2011. 1. 7. 09:49
기행문이라기보다는 여행에 대한 의미를 알랭 드 보통 특유의 관점과 필치로 서술한 책이다. 어떤 지방에 머물렀던 예술가들의 관점을 동원하기도 했고, 스스로 여행하면서 느낀 바를 기술하기도 했다. 알랭 드 보통의 소재는 때론 '사랑', '일'이고, 또 '여행'으로 바뀌지만 보통은 언제나 인생에 대한 철학적인 사유를 한다. 철학적인 사유라는 말이 다소 거창한 느낌을 주지만, 사람이 하는 어떤 생각과 행위의 저변을 지배하고 있는 원리나 패턴에 대해서 항상 호기심을 갖고 고민해보는 것이다. 그래서 알랭 드 보통의 책들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으면서도 왠지 같은 느낌을 주게 된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를 처음 접했을때만큼의 신선함과 반가움이 없는 이유도 그래서이지 않을까 싶다.
다분히 추측에 불과하지만, 알랭 드 보통은 이상주의자이다. 많은 철학자들처럼 보통은 집요하게 '이면'을 들추어보기 때문에 모든 일들이 왜 '이상적'이지 못한지에 대해 고민한다. 물론 그러한 고민은 '고통'이 아니라 '사유의 즐거움'을 제공한다. '이상적이지 못한 사회'는 애상과 허무를 동반한다. '허무'는 '관조'를 동반하여 삶 속에서 삶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삶 밖에서 삶을 바라볼 수 있는 심리적인 거리감을 제공한다. 비로소 나무 대신 숲을 볼 수 있는 통찰력을 갖는 계기가 된다. 다른 사람들의 일상을 훔쳐보면서 재미를 느끼는 것처럼, 삶을 요모조모 살펴보면서 즐거워지는 것이다.
보통은 그래서 여행이 때로 실망스러웠다고 말한다. 그의 여행은 그저 일상에서 벗어나는 것만으로 충분한 해방감을 주는 것이 아니라 '여행'이 어떤 특별한 의미를 부여해 줄 것이라고 잔뜩 기대하는데서 출발한다. 어느 특정한 장소, 특정한 사람, 특정한 TV프로그램 등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기대'에 따르는 '결과'가 있기 마련이다. 만약 그런 특정한 장소에 대한 기대가 없이 학창시절 유럽으로 베낭여행을 떠나는 사람들은 유럽의 여러나라들을 둘러보면서 그동안 책이나 매체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접했던 장소들을 직접 체험하게 된다. '기대'에 따르는 실망이 당연히 있을 수 있지만, 그 장소에 방문했다는 것만으로, 또는 생각지도 못한 사소한 존재들 때문에 '행복감'을 느낄 수도 있다. 일상이 팍팍했던 사람일수록 '존재의 울타리' 밖으로 탈출하게 되면 '관대'해질 수 밖에 없는 셈이다. 반면 특정한 목적을 가진 여행은 '기대'에 따른 '실망'의 위험성이 좀 더 크다고나 할까. 그건 프랑스에서 실망하면 '아, 그럼 네덜란드로 가볼까'하는 그런 개념이 아니기 때문이다. 고흐를 떠올리면서 프랑스 아를을 여행하는 사람은 '고흐의 자취'에 대한 막연한 기대 때문에 실망할 수 있다. 그리고 대안은 없다. 그것이 여행의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더불어 사랑을 이야기할때도 같은 관점이었지만, 보통은 '상상'과 '경험'의 간극을 이야기한다. '상상' 속에선 맘껏 기대하고, 맘껏 조작하면서 설레고 즐겁다. '사랑'이 무한한 행복으로 우리를 인도해줄 것이라고 믿지만, '사랑'을 경험한 사람들은 꼭 그런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낭만에 취해 일출을 보러 정동진에 갔는데 잔뜩 고생만 하고 돌아왔다면 그때부터 '경험 전의 상상'과 '경험 후의 현실'의 괴리가 생기게 된다.
하지만 보통의 자연 예찬은 일관된 어조를 유지하고 있다. 발달된 문명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자연으로 더 깊숙히 들어갈수록 진한 향기를 내뿜는 '고요한 자연의 생명력'에 감동한다고 말한다. 아를에서 '고흐의 채취'를 기대하는 것이 아니라 자연에서 자연을 기대하는 말그대로 아주 '자연스러운' 과정이기 때문이다. 물론 살아있는 동식물들의 생명과 일상에 섬세한 주의를 기울일 수 있는 감성을 지닌 사람이라면 감동이 오래 지속되겠지만, 보통 사람들에게 그 '자연'은 일상이 아니라 여행이기 때문에 감동일 수도 있다.
삶에 대한 시각과 가치관은 모두가 제각각일테지만, 전체적으로 보통이 이야기하는 삶에 공감한다. 사유를 즐기고, '자연스러움'을 사랑하기에 알랭 드 보통은 파스칼의 이야기로 자신의 생각을 대신했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마음에 담고 싶은' 구절이었다.
'인간의 불행의 유일한 원인은 자신의 방에 고요히 머무는 방법을 모른다는 것이다.' - 팡세, 파스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