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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에 해당되는 글 171

  1. 2011.01.13 2010년의 메모 모음
  2. 2011.01.01 김장훈의 행복 하이킥
  3. 2010.07.19 표류하는 정보와 사고
  4. 2010.07.12 너는 내 운명 2010
  5. 2010.07.02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과정
2011. 1. 13. 15:05

2010년의 메모 모음 일상2011. 1. 13. 15:05

9/8

경제학 카페 - '경제학은 인간의 무한한 욕구 충족을 위한 희소 자원 활용 학문'

'상트 페테르부르트 로터리', 기대값이 무한대인 도박이나 참여자는 없다.

위험한 도박에 탐닉하는 것은 매력있는 이성을 향한 열정만큼이나 사회적으로 용인되는 도박과 지탄받는 도박의 차이란?

사회보험은 국가의 개입을 통해 '개인의 실패'를 바로잡는 제도로, 아름다운 사회적 연대를 내포.
개인의 합리적 대응의 장애물 : 위험의 과소평가, 현재 욕구의 과대평가

모차르트, 반짝반짝 작은별 변주곡
원래제목 : 블란서의 노래 '아, 어머님 들어주세요'를 따른 12개의 변주곡 C장조

"무엇부터 말씀드릴까요, 어머님. 괴로워서 견딜 수가 없습니다. 저는 실방도르가 부드러운 눈길로 저를 쳐다본 뒤부터는 언제나 속삭임 소리가 들려와요. '연인이 없어도 넌 아무렇지도 않니?' 하고요..." -> 제목에 논쟁이 있음.
모차르트는 35세에 두개골 골절로 요절함

먀약 - 북유럽에선 최종소비자는 처벌하지 않음. 허용되는 나라도 있음. 성적 서비스의 비가치재 정의에 대한 문제

(미술) 폴 세잔느, 대가들 중 가장 지독한 악평을 평생 걸머지고 살아야 했다. 자신을 제외하고는 자신의 천재성을 믿어주는 사람이 없었음.

지옥으로 가는 길은 선의로 포장되어 있다. 
매춘 암시장, 가격상승. 매춘 여성을 나락으로. 탈세. -> 결국 알선조직을 강력 처벌하는 것으로 조치
가치재 : 술, 담배, 마약, 비가치재 : 독서, 공부, 운동
지니계수 : 소득배율, 로렌츠곡선(빈부격차의 정도를 표시)

이자에 얽힌 수수께끼는 아직도 풀지 못했다.

9/9

국가 채무에 대한 이야기
국고채권, 국민주택채권(국민주택기금의 부담으로 발행되는 채권), 외국환평형기금채권(외화자금 수급조절 위함)
구축효과 : 정부의 국채발행으로 기업의 투자 수요 감소되는 것.

(음악) 알리 - 365일, '그땐 정말 죽을 것 같았어'

슬픈 종부세, 이준구,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
꼴베르(루이14세때 재상) - 조세 징수의 기술은 가장 적은 비명을 지르게 만들면서 가능한한 많은 깃털을 얻는 방식으로 거위의 깃털을 뜯어내는 것과 같다.

재산세 정당한가(현금흐름의 문제 해결 가능한가)
소득보다는 재산세 탈세 위험이 적다, 이중과세는 필요에 따라서 정당
종부세는 기본적으로 교정과세(Corrective Taxation)
귀책사유, 입에 재갈을 물리다. 

9/10

바벨탑은 신의 권위에 도전. 언어 분화
사무엘슨의 천사 - 국제 자유무역 허용하는 우화(인간에게 내린 벌?)
데이비드 리카도(정치경제학과 과세의 원리) - 비교우위론
부작용1. 강대국의 이데올로기
부작용2. 산업간 노동력 이동에 따른 일시적 해고, 생존권 위협
-> 자유무역은 쌍방이 이득이라고 하나, 주인과 하인이 고착화될 수 있다. 하인은 노동집약. 주인은 자본집약으로 서로 거래하나 하인은 결코 주인이 될 수 없다.

프리드리히 리스트는 경쟁력을 가질 때까지 보호무역을 주장.

상념, '회사 일이라는 것이 불가피한 면이 있긴 하지만 1P가 꼭 필요한가 싶다. 길 가운데 박힌 돌처럼 다른 차량의 통행마저 가로막고 있다. 나는 그저 정지한 채로 앞으로 나아갈 줄을 모른다. 의욕도 상실되고'

9/11

경제학 카페 완독하고, '인문의 숲에서 경영을 만나다' 시작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김민철 국장의 멋진 사랑고백, 최고였다!
정지오가 주준영의 성에 안찬다는 윤영의 말도 흥미롭다.
노희경 작가 드라마는 독특하지만 묘한 매력이 있다.

재산을 모으는 것처럼 '덕'도 똑같다. 저축하고 보험을 들듯이 평소 차곡차곡 모든 '덕'은 훗날 반드시 되돌아온다. 진지하게 성찰하고 살아가면서 망각하지 말자. 그런 면에서도 부자가 되자. 

강희제, 옹정제, 건륭제, 3대 133년
레오나르도 다빈치, 쇠붙이에 그치지 말고 면도날이 되라.
천국의 문, 기르베티, 대성당의 돔, 프레스코 벽화

9/14

육일약국 갑시다
회자정리, 8분마다 현대인들을 거짓말을 한다.
한 사람이 평생 긴밀하게 유지하는 관계수 250명(미국 통계)

9/18

이기적 유전자
유전자는 생존기계를 통해 존재를 유지한다.
유전자와 개체, 종을 분리해 내야 함. 유전자는 협력하고 인간을 조종한다. 

11/3

대포새우와 물절망둥이의 공생관계
삶은 계속 돌고 도는 것 같다. 그저 주어진 시간을 색칠하는 것만으로는 한없이 아쉬운 일상이다. 무엇이 그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일까.

11/10

항상 내 입장만 생각해서는 안된다.
다른 사람의 생각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마음이 필요하다.
삶의 목표를 어디에 두는 것이 중요한지 고민해 볼 일이다.

11/13

긍정의 미학, 순간의 최선, 지식의 축척
긍정적이며 여유를 갖고 배려하되, 슬픔을 공유할 줄 아는...
절대적인 것은 없다.
:
Posted by retriever
2011. 1. 1. 11:56

김장훈의 행복 하이킥 일상2011. 1. 1. 11:56

2010년이 가고 2011년이 왔다. 2010년을 보내는 마지막 밤에 인간극장 '김장훈 편'을 보았다. 한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그런 기분은 이제 식상해져 그저 어제와 오늘을 애써 구분지으려는 인류의 작위에 시큰둥한 그런 시기에 내 앞에 펼쳐진 '진짜 인생'이고 '멋진 삶'이었다. 고맙고도 또 고마운 일이다. 한해가 저물어간다고 모두가 요란한 시기에 '행복하고도 벅찬' 시간을 보냈다. 

누구에게나 삶은 소중하고, 개개인마다 가치관이 있다. 그런 이유로 가수 김장훈의 삶이 가장 이상적이라거나 다른 사람들의 삶과 비교해 더 낫다는 이야기를 하기란 쉽지가 않다. 김장훈 역시 어떤 면에선 자신의 행복을 찾아 나서는 것이고, 자신이 생각하고 또 고민하는 삶을 살고 있기 때문이다. 다른 목표를 위해서 살아가는 사람들도 많이 있다. 목표를 찾아나서는 과정이 진지하고, 또 성실하다면 그 모든 삶은 존중받을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존중'과 '존경'은 다르다. 존중은 단순히 인정한다는 의미지만, '존경'은 본받고 싶고, 우러른다는 의미다. 

나는 가수 김장훈의 삶을 '존경'한다. 사람들이 다른 이들을 두고 좋다 하고, 또 싫다 말들 많이 하지만, 잘 생기고, 또 이쁘고, 노래를 잘 부르고, 연기를 잘하고, 말을 잘하고...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김장훈의 삶과 동일선상에서 놓고 볼 수는 없다. 나는 김장훈의 '노래'보다 그의 삶을 사랑한다. 난 대중문화와 관련해서 종종 맹목적인 것을 싫어한다. 맹목적인 방송, 시청자, 팬들... 개개인의 '가치 판단'의 범주 안에서 뚜렷하게 목적성을 갖고 있는 모습이 좋다. 남들의 삶보다는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고민할 줄 아는,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을 더 많이 이해하고, 인간적으로 교류할 수 있는 모습이 좋다. 그저 일방적인 것은 피하고 싶다.

김장훈은 지금 살아있는 것이 믿기지 않는다고 했다. 이미 죽었어야 할 삶인데, 여전히 살고 있는 느낌이라고 한다. 그것이 지금의 김장훈을 더 강하고, 더 위대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매일 죽고 싶었던 20대에 느꼈던 그 허망함들이 어느정도 인생을 관조할 줄 아는 삶의 깊이를 만들어냈다. 찾아낸 해답은 사람들을 행복하게 하는 것. 그럼으로써 내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잉거솔의 말처럼 내가 행복해지는 방법은 바로 남을 행복하게 해주는 것인 셈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내던지며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돕고, 그리고 그들의 웃음에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 다시 태어나고 또 태어나도 나로서는 도저히 자신이 없는 그런 삶을, 이 하늘 아래 누군가는 그렇게 살고 있다는 것이 한없이 경이로울 뿐이다. 그저 욕심만 많아 매일 부족하기만 한 내 삶이 부끄럽다.

몇십억씩 기부를 하면서도 정작 자신에게는 인색하고, 가까운 가족들마저 챙기지 못한다. 작은 옷집을 하는 누나를 찾아가 술을 마시고 눈물을 훔치는 모습에 나도 따라 눈물을 흘렸다. 행복해지기 위해서 저 나름대로의 일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는 언제나 애닯다. 가족을 챙기지 못했다는 그의 회한어린 눈물에 오랜 고민이 담겨 있는 것도 같다. 다른 사람들처럼 또다른 '자신만의 가족'을 만들지 못하는 고민도 그 안에 같이 담겨 있을 것만 같다. 

2010년을 감사하게 마무리했다.   
:
Posted by retriever
2010. 7. 19. 11:49

표류하는 정보와 사고 일상2010. 7. 19. 11:49

[특허] 소프트웨어 관리

네트워킹의 발달은 영화, 음악 등 문화적 산물에 대한 불법 배포의 위험을 키우기도 했지만, 동시에 소프트웨어 관리의 효율성 측면에서 기여한 바가 크다. 인터넷이 발달되지 않은 시절에는 디스켓이나 CD를 직접 판매했고, 사용자 입장에서는 한 부를 구입해서 여럿이 나누어 쓸 수 있었다. 종종 개발자 및 판매자가 설치횟수를 제한하는 경우도 있었지만, 그것이 정상적인 행태는 아닐 것이다. S/W를 구입했다는 것은 그 프로그램에 대한 사용권리를 획득했다는 의미이지, PC의 포맷이나 교환에 따른 설치횟수를 제한한다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 복제방지기술 등을 개발하여 CD 복제를 예방할 수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하나의 CD를 가지고 여러 곳에 설치하는 것까지 일일이 감시할 수는 없는 일이다. 실행할때마다 CD를 삽입해야 하는 대안도 있지만, 그 번거로움은 이루말할 수 없다. 더욱이 '뛰는 놈 위에 나는 놈 있다'고 언제나 개발자들과 판매자들의 끊임없는 노력을 좌절시키는 무리들이 있다. 그들은 크랙을 통해 각종 제약의 빗장을 열어젖히며 S/W 사용자들의 '공유'를 돕는다.

요즘은 라이센스의 개념을 도입해 네트워크를 통해서 '온라인 등록'을 하도록 유도하는 경우가 많다. 따라서 고유한 PC의 맥어드레스를 통해서 설치 수량을 관리하고 감시할 수 있게 되었다. 종종 '온라인 등록'을 장려하는 메세지가 많은 걸 보면, '강제 온라인 등록'이 아직 공공연하지는 않은 모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온라인 등록을 요구하는 추세는 앞으로 더욱 강화될 것이고, 소비자 입장에서 생산자의 그런 정책에 마땅히 '반기'를 들만한 법적 조항도 없을 것이다. 

특허 교육을 받다가 컴퓨터 S/W와 관련하여 궁금한 사항 하나는 생산자가 CD 두개와 두 명분의 라이센스 수량을 제공했을때 '강제 온라인 등록'을 통해서 라이센스 수량 감시야 되겠지만, CD 갯수까지 감시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만일 CD 자체가 추가로 복제되었다는 사실을 알았을 경우 그것이 제공자의 고소 여부에 따라 불법이 될 수 있는지 여부가 궁금하다. 더불어 라이센스 수량 2개의 의미는 정확하게 '동시접속자 2명'을 의미하는 것이지, 동시접속만 피할 수 있다면 사용자 수는 무관하다는 이야기가 된다.

논쟁의 자세

어렸을때부터 '건전한 토론문화'에 대해서 많이 배우게 된다. 요즘은 모르겠지만, 초등학교 시절부터 '학급회의'라는게 있어서 일주일에 한시간씩은 한반 친구들끼리 어떤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의견을 제시하기도 하고, 때론 토론을 하기도 한다. 토론을 할때는 항상 상대방의 의견을 경청하고 존중하는 것이 기본이라고 배운다. 감정이나 권위에 호소해서도 안되고, 성급하게 일반화를 시켜서도 안되고, 흑백논리를 내세워서도 안된다고 한다. 그 모든 것들이 당연한 이야기다. 하지만, 당연한만큼 또 말처럼 쉽지 않다. 

'토론 문화'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 각 공중파 방송들은 하나 이상씩 '토론 프로그램'을 편성하고 있다. 정치, 사회, 학계에서 나름 인망있는 지식인들이 나와 토론을 벌인다. 때로 건전한 토론이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엉망인 경우도 많다. 그나마 사회자가 있어서 어느정도 통제가 되지, 사회자가 없다면 아수라장이 될 소지가 있는 토론도 많다. 그만큼 토론이라는 게 어렵다. 

나 역시 참으로 토론을 못하는 사람이다. 물론 토론할 기회가 많지는 않지만, 토론으로 시작하면 논쟁이 되고, 끝에 가서는 '언쟁'이 되기도 한다. 상대방 의견을 존중하는 자세를 잃다보니, 점점 조급해질뿐만 아니라 이해 안된다는 표정, 상대방의 말을 끝까지 경청하지 못하고 일방적으로 이야기하려는 태도, 점점 톤이 높아지는 목소리 등 항상 시간이 흘러서 후회를 할 때가 많다. 불필요하게 '논쟁 구도'를 만들 필요가 없는 상황에서도 꼭 시비를 가리려는 태도도 엿보인다. 

백언이 불여일행... 백번 입 아프게 떠들어 봐야 한번 행동하니 못하다. 반성할 건 하고, 고칠 건 고치자.      

:
Posted by retriever
2010. 7. 12. 11:23

너는 내 운명 2010 일상2010. 7. 12. 11:23

나에게 가장 인상적이었던 한국영화를 꼽으라고 한다면, 그 으뜸으로 나는 황정민과 전도연이 주연을 맡았던 '너는 내 운명'이라는 영화를 꼽을 것이다. 현실적인 상황에서의 '비현실적인 행위'는 언제나 감동을 가져다주기 마련이다. 우직하게 평생을 살아온 주인공 석중은 그에게 찾아온 사랑 앞에서도 우직하다. 실제로 그 상황이 우리에게 닥친다면 이루말할 수 없는 고난과 슬픔이 뒤따르겠지만, 관조자 혹은 방관자의 입장에서 바라본 그의 모습은 아름다웠다.
 
2005년 극장에서 영화를 처음 접한 후 지금까지 이래저래 3-4번은 본 것 같다. 영화의 성공 요인 몇 가지를 꼽는다면 첫째로 양주인공의 극단적인 설정이다. 실화를 토대로 했다는 이야기가 무성했는데, 그 이야기를 두고도 네티즌들이 사실 여부를 놓고 지대한 관심을 보였던 것 같다. 서로 다른 성격을 지녔거나, 살아온 또는 살아가는 환경이 다른 사람들이 만나면 좌충우돌 에피소드들이 많기 마련이다. 그러한 엇갈림이나 충돌 때문에 관망하는 사람들은 즐겁다. '사랑은 절대로 변하지 않는다'고 고집하는 석중과 '사랑은 변한다'고 생각하는 은하 그리고 한 곳에서 가장 정직한 일을 하면서 살아가는 석중과 여러 곳을 떠돌며 사회적으로 부도덕한 일을 업으로 삼고 있는 은하는 모든 면에서 서로 상충된 존재였다. 둘째로, 극적 반전이다. 석중의 열렬한 구애가 영화의 전반부를 장식하면서 두 사람이 탄 행복 열차가 이제 막 출발하려던 찰나에 영화는 반전을 준비하고 있었다. 주인공들의 감정에 동화되어 넋을 잃고 있는 관객에게 찾아드는 '벼락같은 슬픔'은 정말 '쥐약'이 따로없다. 관객들은 미처 감정을 추스를 여유도 갖지 못한채 걷잡을 수 없이 빠져들고 만다. 많은 '신파' 영화들이 그런 반전 시나리오를 따른다. 마지막으로, 위의 두 사항보다도 더 중요하다고 여겨지는 것이 조연들의 활약과 짜임새있는 구성이다. 구성은 유쾌하면서도 흥미로운 대본과 적절한 속도의 스토리 전개를 포함한다. 석중이와 함께 노총각 3총사, 즉 '삼노총'이라고 불리는 조연들과 어머니 역을 맡은 나문희, 동네 이장 역을 맡으신 분 등이 감초 역할을 해줌으로써 영화를 한층 더 돋보이게 했다. 위 세가지가 '삼위일체'가 되어 비로소 '좋은 영화'가 탄생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사랑, 변한다(?), 변하지 않는다(?)

석중과 은하가 자동차 극장에서 '봄날은 간다'라는 영화를 보고 귀가하는 장면은 영화에서 인상적이었던 부분 중 하나였다. 그들은 사랑에 대해서 대화를 나누었다. 그들이 보았던 영화 '봄날은 간다'의 마지막 장면에서 유지태는 이영애에게 '어떻게 사랑이 변하니?'라며 애절하게 물었다. 석중은 사랑은 변하지 않는다고 강변하고, 은하는 사랑은 변하는 것이라고 맞선다. 과연 사랑은 변하는 것일까. 개인적으로 나는 아직도 그 답을 모르겠다. 사랑은 하나의 색깔을 가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단지 그 '色'이 달라졌다고 하여 변했다고 단정짓기 어렵다. 가시적으로 달라졌지만, 본질적으로는 달라지지 않았을 수도 있다.
 
사람의 人性은 변하기 쉽지 않다고 생각하지만, 감정은 조석으로 달라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열 길 물속은 알아도 한 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옛말은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인간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다. 따라서 사랑을 '감정의 크기' 만으로 재단한다면, 사랑은 매순간 변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혹자는 '이성의 사랑'을 실천하는 것도 매우 중요하다고 이야기한다. 특히나 평생을 함께 해야 하는 동반자적인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서는 가슴으로 하는 사랑과 머리로 하는 사랑이 적절히 균형을 이루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더욱이 사랑의 범위를 '이성간의 격정'으로 한정시킨다면, '사랑의 유통기한'이라는 세간의 말처럼 허망하기 그지 없는 감정이 그 '사랑'이기도 하다. 하루가 멀다 하고 또 보고 싶고, 한 시간이 멀다 하고 목소리를 다시 듣고 싶어하는 시기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놀랍고 신기하기만 하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한결같이 무감해지는 것은 더욱더 놀랍다. '변하지 않는 사랑'이란 유통기한이 지나면 상해서 버려야만 하는 '우유같은 사랑'이 아니라 숙성시키면 시킬수록 더 가치가 더해지는 '와인 같은 사랑'이 아닐까 싶다. '격정'은 사라지더라도 '사랑 그 자체'는 항상 은은하게 향기를 내뿜는 그런 사랑.       
:
Posted by retriever
2010. 7. 2. 15:16

삶과 죽음, 그리고 그 과정 일상2010. 7. 2. 15:16

장마의 시작을 알리던 비가 아침에 주륵주륵 내리더니 지금은 잠시 숨을 고르고 있는 듯 하다. 한껏 늦잠을 잘 수 있는 쉬는 날, 빗소리에 눈을 뜨는 아침은 참 반갑다. 물론 그다지 아침은 아니지만. '여름비' 하면 왠지 황순원의 '소나기'가 떠오른다. 산골 마을에서 마음껏 뛰놀았던 내 어린시절의 모습이기도 하고, 지금도 지구촌 곳곳에서 '어린시절 나의 모습'이 다른 아이들에 의해서 재현되고 있을테지.
 
철학과 종교의 한 사조로 '윤회사상'이 있다. 끊임없는 반복을 의미하는 불교의 '윤회'는 종말을 전제로 하는 기독교의 '구원 그리고 영생'과 대비가 된다. 수많은 철학사조가 있고, 종교가 있지만, 그 무엇하나 뚜렷하고 분명하게 우리의 미래와 삶의 본질을 제시해주지 못하고 있으며, 논리를 벗어난 논쟁 속에서 어떤 부류도 그 와중에 비교우위를 논하지 못한다. '새옹지마'의 역사를 돌이켜보면, 민족과 국가처럼 철학사조와 종교도 각각 흥망성쇄의 시기를 거쳐서 오늘에 이르렀다. 과학과 기술은 나날이 진보하고, 인류는 하루가 다르게 더욱더 영리해지고 있지만, '민족' 또는 '종교'를 구심점으로 하는 '집단주의'가 인간의 본성 안에 계속 자리하는 한, 우리의 미래는 또다시 오랜 역사를 되풀이하는 방향으로 전개될 것이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휴일아침의 무료함이 종종 진한 허무를 대면케 하는 까닭에 괜히 이런저린 사색에 궁리를 해보게 되는 것이다.
 
며칠전 인기연예인 박용하씨가 고인이 되었다. 삶을 지탱할 힘을 잃은 나머지 스스로 세상을 등졌다. 각종 경쟁, 추측 보도가 난무한 탓에 잠들기 전 그의 진실된 마음을 알아볼 길은 소원하지만, 그가 직접 남긴 몇몇 글과 말을 통해 그 심정을 어렴풋하게나마 유추해볼 수 있다. 병든 아버지를 모시면서, 지난 몇년간 꾸준히 불면증에 시달리고 있었다는 사실에서 삶과 힘겨운 투쟁을 해 왔음을 상상할 수 있을 것 같다. 마음이 여린 사람들에게 어김없이 찾아드는 '허무'와 '고독'은 악성 바이러스처럼 그들의 삶에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하는 경우가 많다. 일면 인간의 근원적인 성질인 부분도 있겠지만, 많은 철학자와 사상가들이 경고하는 것처럼, 온정없이 차갑기만 한 우리의 '현대사회'가 더없이 여린 영혼들을 죽음의 늪으로 자꾸만 내몰고 있는 것은 아닐까.
 
술이 취한 채로 귀가해서 병든 아버지의 다리를 주물러 드리며, 아버지 대신 아프지 못해 미안하다고 울먹인 것이며, 트위터에 남겨진, 부모님에 대한 애잔한 마음을 담은 글에서 공인이 아닌 평범한 사람 '박용하'의 '따뜻하고 여린 마음'이 전해진다. 사람으로서 도리를 다하지 못하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자신의 이익에만 급급한채 주변을 둘러볼 여유를 잃어버린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 '지난 날'이 지나면 '새 날'이 온다는 인생의 평범한 진리를 알고 있으면서도, 또는 '삶'과 '죽음'이 하나의 세계 아래 존재할지도 모르지만, 그 어둠의 터널을 지나지 못하고 주어진 몫의 생을 다하지 못한 채로 스스로 포기할 수 밖에 없었던 사람들을 향해 연민의 마음이 생긴다.
 
공교육과 사교육, 그리고 신해철

사립 '음악학원'을 설립한 탓에 얼마전 가수 신해철씨가 다시한번 언론의 도마 위에 올랐다. 도마 위에서도 언제나 팔딱팔딱 소신을 굽히는 법이 없는 그다. 이번에도 역시 마찬가지였고. 지난해에는 사실상 '입시교육'를 전문으로 하는 '학습지' 광고를 촬영해 '의혹의 눈길'을 받기도 했었다. 그동안 어느정도의 수위로 '교육정책'에 대해서 비판을 했었는지 모르겠지만, '공교육 비판'에 대해서는 이번에도 스스로 수긍을 하는 바 그동안의 이미지는 '입시경쟁 과열'로 함축할 수 있는 우리나라의 교육 현실을 개탄하는 모습이었던 것만은 사실인 것 같다. 그런 그가 현행 입시제도의 틀에 잘 끼워맞추어져 있는 '사교육단체'를 광고하고, 올해는 스스로 사설학원을 설립까지 했으니 사람들의 '의아한 눈초리'는 당연하지 싶다. 

이번에 도마 위에 오른 신해철은 '입시경쟁을 조장하는 공교육을 비판했을 뿐, 건전하고 영양가 있는 사교육을 비판한 적은 없다'고 말하고 있고, '21세기 사라져야 할 것은 학교'라는 엘빈 토플러의 의견을 덧붙인 뒤, 보다 대중적이고 보편화된 사교육의 필요성을 언급했다. 더불어 자신은 학교생활을 통해 얻은 것이 하나도 없다고 주장했다. 

사람들의 이야기를 듣다보면 종종 궁금한 것이 있는데, '평소의 지론'과 '자기합리화'의 경계가 모호해 질 때가 있다는 것이다. '철학콘서트'라는 책의 저자이자 '사회주의'에 대해 긍정적인 시각을 갖고 있는 황광수씨가 고향에 수업료가 비싼 '사립학원'을 설립해서 운영하는 것이 그런 '모호한 경계'의 한 예랄까. 비록 신문지상의 짧은 답변에 불과하지만, 신해철의 이야기를 접하면 왠지 '교육 민영화'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학교'와 '학원'은 그 본질이 '배움의 전당'으로 운영하는 주체만 다를 뿐이다. 마치 비효율적이고 방만한 '공기업'의 '사기업화'를 주장하고, 의료의 품질을 떨어뜨리는 '공공보험' 파기를 외치는' 의료보험 민영화 논조'와 맞닿아 있다는 느낌이 든다. '품질이 우수한 대중적인 사립학원의 필요성' 역시 다른 '민영화' 논리에서 빠지지 않는 이야기다. '민영화'는 '자본'과 '시장'을 의미한다. '시장'은 '자본'이 있는 곳으로 움직이며, 그 방향은 '보편화된 전체'를 계층화해서 '분리된 그룹'을 만들어내는 방향으로 진행된다. 물건을 진열해놓고 판매하는 백화점마저 '명품관'과 '영플라자'로 나뉘고, 인터넷 공간에서마저 회원을 '등급별'로 구분하며, 이미 사교육의 현장에서는 '비평준화'의 바람이 거세고, '특목'이 판을 치고 있다. '자본과 시장' 그리고 '인간의 본성'이 가리키는 자연스러운 방향이기도 하다. 그러한 흐름을 거스르기 위해서는 거대한 힘이 필요하며, 그러한 힘은 '통합된 권력' 즉 국가나 정부로 대변될 수 있는 '공공의 힘'이다. 교육은 '시장'에 내어줄 수 없는 '공공부문'의 마지막 보루이기도 하다. 학교가 '전문교육의 품질'이 떨어지고, '전인교육의 장'으로서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며, 획일화된 사회인을 배출하고, 국가의 사상을 주입시키는 '사상교육'의 장이 된다고 하는 것이 불만이라면, 공동체의 벽을 허물지 않는 선에서 올바른 지도자를 선출하고, 불합리한 제도 개선을 위하여 힘을 모아야 한다. 그것이 설령 가시밭길인데다가 오랜시간이 걸린다고 할지라도 '소탐대실'의 우를 범하는 것보다는 현명한 방법이 아닐까.

다양한 구성원들이 함께하는 공동체에서는 서로의 중지를 모으는 것이 가장 중요하고, 오늘도 끊임없이 사회는 그것을 고민하고 있다. 개인의 경험으로 재단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이번 지방선거에서 서울과 경기 교육감을 비롯해 진보 교육감들이 대거 당선된 것을 보아도 그 '고민의 흔적'을 엿볼 수 있다.
 
네덜란드 vs 브라질

네덜란드와 브라질의 8강전이 오늘밤 열린다. 유럽과 남미를 대표하는 팀들이자 이번 월드컵의 가장 강력한 우승후보들이기도 하다. 객관적인 전력과 경험, 전통에서 브라질이 한 수 위지만, 그 차이가 미미하기에 예측하기 쉽지 않은 명승부전이다. 항상 강팀의 전력을 유지하면서도 유독 우승과는 인연이 없는 네덜란드의 선전을 기대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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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