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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6. 27. 21:14

이문열 중단편전집, 도서출판 둥지 도서2010. 6. 27. 21:14

작가 이문열의 대표 중편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을 비롯하여 총 8편의 작품이 수록되어 있다. 홍경인이 주연으로 연기한 영화 속 '엄석대'의 모습이 아직도 어렴풋이 각인되어 있기에 언젠가 읽어봤을지도 모를, 소설책을 구입하게 되었다. 가장 먼저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부터 펼쳐서 읽었는데, 다시봐도 참으로 명작이다. 현실을 교실 안으로 옮겨 상징적이면서도 응축적인 스토리를 만들어 냈다. 학급 반장인 '엄석대'는 '독재자' 내지는 '독재정권'을, 한병태는 '양심적인 지식인'을, 다른 학급 급우들은 '국민'들을 대변하고 있다고 보면 맞을 것 같다. 눈에 보이는 것도 진실이라고 할 수 없는 '눈과 귀'가 통제된 삭막한 독재정권 하에서 발 디딜 곳이 없는 양심있는 지식인들의 고뇌와 각종 압제와 비인권적인 처사에도 이렇다할 항변조차 하지 못하는 국민들의 비애를 담았다. 안으로 그렇게 썩어들어가고 있는 '비인간적인 사회'에서 겉만 번지르르하게 포장된 '엄석대의 천하'는 한때 우리의 현실이기도 했었다. 

묘하게도 이 이야기를 읽고 있다 보면, 선악의 분명한 대비가 되지 않아 다소 혼란스러운 면이 있다. 먼저 작중 화자인 한병태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도대체가 불합리하고 상식이 통하지 않는 '엄석대의 천하'에 별의별 방법을 동원해 항거하고 반항을 해보았지만, 변하는거 하나 없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거나 각종 차별과 박해만 더 심해졌다고 말한다. 결국은 항복해 주류에 편입하고 나니까 더없이 달콤한 보상이 뒤따랐다. '엄석대 천하'가 끝장이 나자, 그때까지 침묵하고 있던 급우들이 하나같이 응어리진 감정을 토해낼때 한병태는 오히려 침묵한다. 자신이 그토록 도움이 필요로 했을때 외면했던 급우들에 대한 '억하심정'도 일면 드러내고 있고, 어떤 면에서는 엄석대에 대한 인간적인 연민이 담겨 있을 수도 있다. 한병태가 작중화자인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독자는 한병태의 '지속적인 노력'이 사회로부터 모멸차게 야유를 받는 상황을 지켜보고, 그의 '인간적인 고뇌'를 따라가면서 그 입장을 이해하게 되거나, 또는 공감대를 형성하게 된다. '모두가 옷을 벗고 있을때 혼자 옷을 입고 있지 말아라'는 탈무드의 구절과, '로마에 가면 로마법을 따르라'는 명언이 모두 '원칙의 가변성'을 가리키고 있지 않느냐, 한병태로서도 그게 최선의 길이 아니었겠느냐는 기묘한 '패배의식'이 자리잡게 된다.

'누가 이 여인에게 돌을 던지랴'는 예수님의 말씀처럼 누구도 한병태의 '변심'을 쉽게 손가락질할 수 없을 것이다. '시대정신'이 없다고, 또는 '사명감'이 없다고 비난할 수 있는 사람도 많지는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쉬움이 없는 것은 아니다. '불가피성'과 '양비론'의 지나친 설파는 자칫 '자기합리화' 내지는 '비겁한 변명'의 수단이 되기 쉽다. 담임선생님이 바뀐 소설 속의 변화는 꿈쩍도 하지 않을 것 같은 '환경의 변화'를 상징하고 있다. 역사는 그러한 '변화'에 대한 꿈을 포기하지 않는 불굴의 의지와 인내의 힘으로 우직하게 정진해 왔음을 상기할 필요도 있을 것 같다.
 
책 속의 다른 작품들도 재미있게 잘 보았다. 이문열 작가의 필력에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풍부한 어휘를 사용하는, 일면 화려한 문장력을 구사하면서도, 독자에겐 쉽게 읽히는 것이 더없는 매력이다. 앞뒤 문장의 논리적 흐름이 매끄러운 탓인지, 물흘러가듯 부드러운 독서가 가능했고, 묘사나 비유 역시 적절하고도 위트가 있었다. '고래'로 유명한 천명관이라는 작가가 이문열 작가의 작품에서 표현력을 기르지 않았나 싶다. '25년 전쟁사'와 '장군과 박사'는 우리나라 현실을 빗대어 '가상의 역사'를 만들어낸 덕분에 흥미롭게 읽었다.      

마지막으로 저자 이야기. 진보적인 색채의 젊은 사람들 상당수는 저자 이문열을 두고 '악마에게 영혼을 팔아버린 작가' 취급을 하기도 한다. 지식인의 사명은 무엇일까. 이른바 '펜 굴리기'를 업으로 삼는 문인 그룹은 언제나 시대정신을 대변하고, 각종 사회적인 불합리와 제도적인 차별에 항거해왔다. 갓 인쇄된 도서의 정결함과 깨끗함처럼 문학을 필두로 한 '누군가에 의해 씌여진 글'들의 특징은 '순수에의 동경', '정의 실현', '정신적 가치의 추구' 등을 대전제로 하는 경우가 많다. 일제 또는 독재정권의 압제에 항거하는 민족(민주) 투사들의 활약을 다루거나, 새벽부터 밤까지 노동을 해도 단칸방 신세를 벗어나지 못하는 가난을 노래하거나, 물질만능이 판치는 각박한 사회 풍조를 풍자하고, '따뜻한 인간애'를 다루는 휴머니즘을 강조하기도 한다. 겨레를 잃은 고난의 시대에 조국을 빼앗긴 슬픔을 노래하던 윤동주와 같은 저항시인이 있었던 반면 일제의 앞잡이가 되어 민족개조론을 외친 이광수와 같은 문인도 있었다는 것을 우리의 역사는 기억하고 있다. 단지 죽음앞에, 총칼앞에 '어쩔 수가 없었다'는 인간적인 호소에 면죄부를 내려준다면 '바르고 정직하게' 살아가는 지난 시대와 이 시대의 '깨끗한 영혼' 앞에 더 큰 죄를 짓는게 아닐까. 내가 어떤 판단을 내릴 수 있을만큼 이문열 작가의 언행을 유심히 지켜보지 못했지만, 그러한 여론의 따가운 시선을, 가슴에 손을 얹고, 겸허하게 받아들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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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