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8. 12. 09:10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도서2009. 8. 12. 09:10
누군가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을 떠올리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나는 양귀자 선생님의 '희망'을 그 으뜸 중에 하나로 손꼽을 것이다. '아리랑'이나 '태백산맥'을 낳은 조정래 선생님에게서 느끼는 그 방대함, 그 역량과 문체에 대한 경외감과는 다른, 읽는 동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종종 폭소하며 즐겁게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바로 '희망'이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하고, 엉뚱하면서도 반듯한 소설로 '희망'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뒤 양귀자 선생님의 '모순'이라는 책도 선물을 받아 읽어보긴 했지만, 왠지 '희망'이라는 소설만으로도 그 분의 꽤 많은 작품을 읽었다는 착각이 든다. 서점에서 기웃거리다가 '원미동 사람들'을 발견하고 반가웠던 이유도 그런 '희망'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만에 그 경쾌한 문체와 간결한 스토리 전개에서 오는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소설은 다소 '해학'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 안에 녹아 있는 삶에 대한 진지한 시각에 깊이 매료되었다. 어느 작품이든 전반부와 후반부와 그런 대비는 큰 효과를 가져오는 법인데, 영화 '애정의 조건' 역시 전반부의 밝음과 후반부의 어두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시청자가 후반부의 어두움에 깊게 매료되는 효과가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실소를 흘리며, 때론 밝고 경쾌한 걸음을 걷듯이 책장을 넘기다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당황하며 이내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밝고 꾸밈없는 얼굴에 아무도 침을 뱉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원미동 사람들'에서 작가는 그 밝음을 작품의 후면에 숨겨놓고 빈틈이 있을때 간간히 보여주는 것에만 만족한다. 줄곧 작가가 꾸며놓은 '원미동'이라는 특정 지역에 존재하다 보면, 마치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안개낀 거리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밝은 태양이 사라진 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각각의 독립된 단편 형식으로 묶어낸 소설이다. 역시 그 안에 다소의 '해학'이 들어있지만, 그 강도가 약하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이라고 해도 독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원미동'의 안개낀 거리 때문에 독자들은 줄곧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않기 때문이다. 뒤뚱거리는 걸음은 즐거운 마음에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게 아닌, 괴로운 심사의 갈팡질팡임을 아는 까닭이다.
책의 끝머리에 실린 비평가는 소설이 그저 현실을 표현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그 원인이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하는데는 소홀했다고 이야기한다. '지하생활자'의 편에서 공장의 사장과 노동자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모두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결론으로, 무리한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작가의 평소의 지론은 약간 뜻을 달리하는 것 같다. 작가는 오히려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답답함을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작가에게 있어 소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긴 하지만, 그 현실을 뒤바꿀 강력한 매개체로 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있는 '원미동의 거리'가 과거가 단지 과거의 시대를 복원한, 그럼으로써 독자가 향수에 젖게끔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 그런 거리가 많이 있다. 더구나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른 생활 수준의 향상은 상대적 박탈감의 크기를 키웠다. 종종 우리가 과거보다 얼마나 잘 살게 되었냐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절대적인 기록보다는 상대적인 순위가 중요함을 아는 까닭이다.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현대인들을 불안하게끔 만드는 주범은 천민자본주의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마치 TV에서 하는 '인간 극장'을 볼때처럼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도 '원미동 거리'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어떤 희망을 보고 싶음인지도 모른다.
'희망'이라는 소설은 다소 '해학'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 안에 녹아 있는 삶에 대한 진지한 시각에 깊이 매료되었다. 어느 작품이든 전반부와 후반부와 그런 대비는 큰 효과를 가져오는 법인데, 영화 '애정의 조건' 역시 전반부의 밝음과 후반부의 어두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시청자가 후반부의 어두움에 깊게 매료되는 효과가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실소를 흘리며, 때론 밝고 경쾌한 걸음을 걷듯이 책장을 넘기다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당황하며 이내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밝고 꾸밈없는 얼굴에 아무도 침을 뱉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원미동 사람들'에서 작가는 그 밝음을 작품의 후면에 숨겨놓고 빈틈이 있을때 간간히 보여주는 것에만 만족한다. 줄곧 작가가 꾸며놓은 '원미동'이라는 특정 지역에 존재하다 보면, 마치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안개낀 거리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밝은 태양이 사라진 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각각의 독립된 단편 형식으로 묶어낸 소설이다. 역시 그 안에 다소의 '해학'이 들어있지만, 그 강도가 약하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이라고 해도 독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원미동'의 안개낀 거리 때문에 독자들은 줄곧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않기 때문이다. 뒤뚱거리는 걸음은 즐거운 마음에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게 아닌, 괴로운 심사의 갈팡질팡임을 아는 까닭이다.
책의 끝머리에 실린 비평가는 소설이 그저 현실을 표현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그 원인이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하는데는 소홀했다고 이야기한다. '지하생활자'의 편에서 공장의 사장과 노동자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모두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결론으로, 무리한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작가의 평소의 지론은 약간 뜻을 달리하는 것 같다. 작가는 오히려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답답함을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작가에게 있어 소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긴 하지만, 그 현실을 뒤바꿀 강력한 매개체로 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있는 '원미동의 거리'가 과거가 단지 과거의 시대를 복원한, 그럼으로써 독자가 향수에 젖게끔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 그런 거리가 많이 있다. 더구나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른 생활 수준의 향상은 상대적 박탈감의 크기를 키웠다. 종종 우리가 과거보다 얼마나 잘 살게 되었냐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절대적인 기록보다는 상대적인 순위가 중요함을 아는 까닭이다.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현대인들을 불안하게끔 만드는 주범은 천민자본주의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마치 TV에서 하는 '인간 극장'을 볼때처럼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도 '원미동 거리'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어떤 희망을 보고 싶음인지도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