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1. 14. 09:19
[애니메이션] 아이언 자이언트 애니2009. 1. 14. 09:19
평점이 굉장히 높은 작품이다. 개인적으로 실사체에 평범한 일상을 보여주는 애니메이션을 좋아하고, 지나친 비현실성에 다소 거부감을 느끼고 있긴 하지만, 애니메이션의 장점은 무엇보다 '세상밖으로'에 있다. 의인화된 동물 캐릭터에 열광하는 애니메이션 애청자로서 금속의 로봇에게 감정을 부여한 것에 대한 거부감은 전혀 없었다. 동물이든 '아이언 자이언트'에서의 로봇이든 언제나 의인화된 캐릭터는 어린 아이의 눈에 비추어진다. 어른들은 볼 수 없는, 산타 할아버지가 세상 어딘가 존재할 것이라고 믿는 어린아이의 순수성과 때묻지 않은 마음에서 자연스럽게 탄생한다고 볼 수 있다. 어린아이의 시각을 이해하고 함께 하는 것, 그것이 애니메이션을 이해하는 지름길일 것이다.
로봇, 했을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애니메이션은 '최종병기 그녀'였다. 아이언 자이언트처럼 '최종 병기 그녀'에서의 그녀는 감정을 가진 금속인간이다. 오히려 인간이 로봇이 된건지, 로봇이 인간이 된건지 작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오묘함을 담고 있다. 사실 무생물체에 생명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늘상 있어 왔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도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인류애'를 넘어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담겨 있다.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비애'와 맞닿아 있다. 감정을 가진 로봇이나 백조의 무리에 섞여 있는 미운 오리 새끼, 가위손과 같이 불완전한 신체를 가진 사람, 고독한 천재... 모두가 마찬가지다. 평범하지 못함으로 인해 공동체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또 배격된다.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비정상적인 비애를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만이 보호자의 역할을 자청하지만 대부분 어린아이들이거나 힘없는 망상가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한없이 착한 심성을 갖는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은 영화의 재미를 위해 도저히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을 수 없는 시나리오의 희생물이 되어 씁쓸히 생을 마감하거나 조용히 퇴장한다. 애써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어 공상스러운 내용을 더욱 더 공상스럽게 마무리짓는 작품들도 있는데 누가 뭐래도 '비애'는 언제나 '슬픈 결말'과 맞닿아 있다. 아이언 자이언트 역시 슬픈 결말로 마무리를 짓지만, '아이언 자이언트'의 속편을 연상시킬만큼 기발하게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남겨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반대로 멀쩡한 사람으로 태어나 로봇이 되고 싶어하는 캐릭터도 있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 '은하철도 999'에서의 철이가 그렇다. 물론 여정 중에 인간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되어 결국은 그 마음을 다잡는다. 감정을 갖는 로봇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굉장한 고통이나 슬픔의 경험을 지난 사람들에게, 또 그러한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진정 인간에게 부여해준 신의 축복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봇으로서 '감정'을 갖는 고통과 인간으로서 고통과 슬픔으로 로봇이 되고 싶어하는 것.. 그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로봇, 했을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애니메이션은 '최종병기 그녀'였다. 아이언 자이언트처럼 '최종 병기 그녀'에서의 그녀는 감정을 가진 금속인간이다. 오히려 인간이 로봇이 된건지, 로봇이 인간이 된건지 작가도 제대로 알려주지 않는 오묘함을 담고 있다. 사실 무생물체에 생명을 부여하려는 노력은 애니메이션 세계에서 늘상 있어 왔다. 이 영화가 높은 평가를 받은 이유도 우리가 막연히 생각하는 '인류애'를 넘어서는 측은지심의 마음이 담겨 있다.
비정상적이라는 것은 언제나 '비애'와 맞닿아 있다. 감정을 가진 로봇이나 백조의 무리에 섞여 있는 미운 오리 새끼, 가위손과 같이 불완전한 신체를 가진 사람, 고독한 천재... 모두가 마찬가지다. 평범하지 못함으로 인해 공동체와 사회로부터 격리되고 또 배격된다. 그러한 다양성을 인정하고, 비정상적인 비애를 이해하는 몇 안되는 사람만이 보호자의 역할을 자청하지만 대부분 어린아이들이거나 힘없는 망상가에 불과하다. 결과적으로 한없이 착한 심성을 갖는 비정상적인 캐릭터들은 영화의 재미를 위해 도저히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을 수 없는 시나리오의 희생물이 되어 씁쓸히 생을 마감하거나 조용히 퇴장한다. 애써 해피엔딩으로 결론지어 공상스러운 내용을 더욱 더 공상스럽게 마무리짓는 작품들도 있는데 누가 뭐래도 '비애'는 언제나 '슬픈 결말'과 맞닿아 있다. 아이언 자이언트 역시 슬픈 결말로 마무리를 짓지만, '아이언 자이언트'의 속편을 연상시킬만큼 기발하게 새로운 희망의 씨앗을 남겨놓는 센스를 발휘했다.
반대로 멀쩡한 사람으로 태어나 로봇이 되고 싶어하는 캐릭터도 있다. 너무도 유명한 작품 '은하철도 999'에서의 철이가 그렇다. 물론 여정 중에 인간의 따뜻한 온기를 느끼게 되어 결국은 그 마음을 다잡는다. 감정을 갖는 로봇에 열광하기도 하지만, 굉장한 고통이나 슬픔의 경험을 지난 사람들에게, 또 그러한 어두운 터널을 건너고 있는 사람들에게 '감정'이라는 것이 진정 인간에게 부여해준 신의 축복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로봇으로서 '감정'을 갖는 고통과 인간으로서 고통과 슬픔으로 로봇이 되고 싶어하는 것.. 그 사이에 묘한 공통점이 있는 것이다.
인간과 로봇의 중간 단계이 있는 존재가 바로 살아있는 생물들이다. 이 존재들에게 의인화를 시키는 작업은 기본적으로 '감정'을 갖고 있다는 믿음에서 시작할 수도 있다. 오랫동안 함께 생활한 강아지에게서 애정을 느끼고, 측은지심을 갖는 것 역시 '아이언 자이언트' 영화 속의 주인공 어린아이와 똑같은 마음일 것이다. 살아있는 모든 것, 억지스럽더라도 감정을 갖을 것으로 판단되는 그 모든 것들과 교감을 할 수 있다. 왠지 영화의 메세지가 법정 스님의 '살아있는 모든 것들을 사랑하라' 그리고 시인 윤동주의 '죽어가는 모든 것을 사랑하는' 마음을 대변하는 것만 같다. 너무 엉뚱한 오버일까. 여튼 내 생각은 그렇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