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술은 잘 모르는 문외한이다. 어렸을때도 스케치나 좀 관심이 있었지, 미술점수는 늘 그저 그랬던 것 같다. 그림을 잘 그리는 사람이 부러웠었고, 지금도 애니메이션 작화를 보면서 경탄해마지 않는다. 화가들의 그림을 보는 사람들은 보통 예술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표현해내고 싶었던 그 의도를 파악해내느라 여념이 없다. 문학 서적을 읽을때도, 음악을 들을때도 마찬가지다. 때론 그런 시도들이 너무 거창해서 오히려 거추장스럽다는 느낌까지 든다. 문외한인 내가 접근해보는 영역은 그저 화가가 그림에 숨겨 놓은 작은 위트랄까. 자신만의 색이 분명한 보테로의 그림은 보면 볼수록 이상하게도 정감이 간다.
여자 가슴과 겨드랑이에 왠 털을 잔뜩 그려놨나 싶었다. 알고보니 여장을 한 남자였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보테르 작품의 핵심은 '팽창'에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선에 바람을 집어 넣듯이 뚱뚱하게 만들어버린다.
보테르 작품의 또다른 특징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어른처럼 그려져 있다. 단지 몸이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이다. 배경에 오렌지가 흡사 풍선처럼 날아다니는 것 같다. 오렌지는 보테르가 즐겨 그렸던 것 같다.
카드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담배를 물고 있는 사나이의 엉덩이 밑에 삐죽 모습을 내민 한장의 카드가 눈에 띈다. 더불어 이 작품 외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오렌지쥬스가 들어있는 컵. 두 사람의 몸이 팽창한 것을 더욱더 부각시켜 주는 폭이 좁은 테이블. 두 사람의 다리는 서로 포개어져 있어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상하게 관심이 가는 가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영화 '즐거운 인생'이 떠올랐다. 연주자들의 표정이 다소 지쳐보인달까. 똑같은 사람 넷이서 연주를 하는 것 같은 해학이 있다.
그 외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형태가 현실세계의 밖으로 벗어나다보니 표정과 동선 등이 모두 개성을 갖추고 있다. 말도 안되게 부풀어오른 등을 가진 낙타의 무시하듯이 내려다보는 시선, 창에 찔리고서도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 어떤 특별한 깊은 생각이나 의도가 아닌 그냥 '이렇게 그려보면 어떨까', '엉뚱한 상상을 펼쳐볼까' 정도로 받아들이고픈 그림들이 반가웠다.
'자살'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에서는 아래로 뛰어내리는 사람을 거대하게 그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어서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위로 뻗쳐야 하는데, 아래로 뻗쳐 있다. 마치 위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비상하는 것처럼. '투우'를 다룬 그림들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맞서 있는 투우사와 소의 긴장감을 그려내었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 생각이 있는 곳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 속인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 속인지. 그림은 화가가 그리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재탄생하는 게 아닐까.
여자 가슴과 겨드랑이에 왠 털을 잔뜩 그려놨나 싶었다. 알고보니 여장을 한 남자였고, 무대에 서는 사람들을 그린 그림이었다. 보테르 작품의 핵심은 '팽창'에 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풍선에 바람을 집어 넣듯이 뚱뚱하게 만들어버린다.
보테르 작품의 또다른 특징은 어린 아이의 얼굴이 모두 어른처럼 그려져 있다. 단지 몸이 크고 작고의 차이일 뿐이다. 배경에 오렌지가 흡사 풍선처럼 날아다니는 것 같다. 오렌지는 보테르가 즐겨 그렸던 것 같다.
카드놀이 장면을 그린 작품이다. 담배를 물고 있는 사나이의 엉덩이 밑에 삐죽 모습을 내민 한장의 카드가 눈에 띈다. 더불어 이 작품 외에서도 자주 발견할 수 있는 오렌지쥬스가 들어있는 컵. 두 사람의 몸이 팽창한 것을 더욱더 부각시켜 주는 폭이 좁은 테이블. 두 사람의 다리는 서로 포개어져 있어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대변하고 있는 것만 같다.
이상하게 관심이 가는 가는 그림이었다. 그림을 보는 순간 영화 '즐거운 인생'이 떠올랐다. 연주자들의 표정이 다소 지쳐보인달까. 똑같은 사람 넷이서 연주를 하는 것 같은 해학이 있다.
그 외 여러 작품들이 있지만, 형태가 현실세계의 밖으로 벗어나다보니 표정과 동선 등이 모두 개성을 갖추고 있다. 말도 안되게 부풀어오른 등을 가진 낙타의 무시하듯이 내려다보는 시선, 창에 찔리고서도 개구장이 같은 표정을 짓고 있는 소. 어떤 특별한 깊은 생각이나 의도가 아닌 그냥 '이렇게 그려보면 어떨까', '엉뚱한 상상을 펼쳐볼까' 정도로 받아들이고픈 그림들이 반가웠다.
'자살'이라는 제목을 가진 그림에서는 아래로 뛰어내리는 사람을 거대하게 그렸다. 가만히 보고 있으면 그 사람은 아래로 떨어지고 있어서 바람결에 머리카락이 위로 뻗쳐야 하는데, 아래로 뻗쳐 있다. 마치 위에서 떨어지는게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비상하는 것처럼. '투우'를 다룬 그림들에서 삶과 죽음의 기로에 맞서 있는 투우사와 소의 긴장감을 그려내었듯이 삶과 죽음의 경계에 대해 어떤 생각이 담겨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허나 그 생각이 있는 곳이 그림을 보는 사람의 마음 속인지, 그림을 그리는 사람의 마음 속인지. 그림은 화가가 그리지만, 그것을 보는 사람들에게서 재탄생하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