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 1. 7. 21:02
나는 아내와의 결혼을 후회한다, 김정운 도서2011. 1. 7. 21:02
나는 자주 단정적인 어법을 구사하곤 하지만, 그건 가까운 사람들에게 내 의사를 좀 더 강하게 표현하는 것에 불과하다. 단정적인 어법은 청자가 화자의 전체적인 면면에 '긍정'하거나 '호감'을 가졌을때 효과가 극대화된다. 이미 청자 입장에서 충분한 '수용의 자세'를 갖추고 있기 때문에 '어법' 자체는 크게 중요한 변수가 되지 못하는 셈이다. 반면, 화자와 청사 사이에 사전에 그러한 충분한 교감이 없을 경우 단정어법은 종종 부작용을 초래한다. 청자는 앞의 경우와는 달리 객관적인 자세를 견지하게 된다. 충분한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 상태에서 청자의 지론과 상반되는 논지를 펼치는데 있어 '단정어법'은 독이나 다름없다. 굳이 상반되는 논지가 아니더라도 비판적인 청자에겐 비슷한 반응을 이끌어낼 것이다. 대화가 아닌 독서의 경우에도 화자와 청자를 '필자와 독자'로 대치하면 똑같은 결론에 이르게 된다. 전체적으로 공감하는 책의 내용도 많고, 비교적 흥미롭게 읽었음에도 불구하고, 읽으면서 불편했던 점은 그런 '확정형 어법'이었다.
'단정어법'은 강한 자신감, 때로는 상대적 우월감의 표출이다. 누구나 어느 한 분야에서 '어떤 경지'에 오르게 되면 확정형, 설교형 어투에 도취될 수 있다. 실제로 그런 사례가 많으며, 그것이 직업적 특성이나 편견으로 자리잡기도 한다. 특히 전문지식을 탐구하는 분야에 종사하는 사람들이나, 상대적으로 '정보력'이 많이 요구되는 업무를 하는 사람들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어투, 태도 등이 변할 수 있다. 때론 아는 것보다 전달하는 것이 중요하고,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지식을 전달하거나 의견을 주고받는 과정, 또는 의사를 피력하는 과정에서는 그 '내용'만큼이나 '공감대' 또는 '이미지'가 중요하다는 사실을 항상 기억해야 할 것이다.
정신분석학이나 심리학, 사회학 등은 인간의 정신이나 행동을 객관화하여 하나의 학문으로 발전시켰다. 자연과학처럼 하나의 현상을 토대로 '귀납적'으로 보편적인 지식을 추론해낸다. 다만 그것은 언제나 통계적인 수치로 '절대보편'의 100%에는 영원이 도달할 수 없는 딜레마가 있다. 인간의 정신형태, 행동패턴, 사회문화 등은 언제나 유동적인 변화를 겪기 마련이고, 개개인에 따라서 다양한 성격을 지닌다. 더불어 서로 상호 작용을 한다. 그것이 하나의 '편견'으로 고착될 수 있기 때문에 언제나 경계해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열린 학문'이어야 한다. 그 통계적인 수치는 인간의 기호나 바램을 유추해서 궁긍적으로 인류의 '삶의 만족도 향상' 또는 '삶의 질 개선' 등의 가능성을 제공한다는 데서 의미가 있다. 또한 공동체의 '합의'를 이끌어내고, 하나의 '발전적 문화'를 창출하는데도 기여할 수 있다.
인간의 정신과 심리가 문화와 영향을 주고 받기 때문에 저자의 학문분야인 '문화심리학'이라는 것이 생겨났다. 인간의 심리와 문화를 탐구하는 과정에서 다행스러운 귀결이지 싶다. 문화심리학은 보다 큰 그림에서 개개인의 행동양식을 바라보고, 그것이 하나의 공동체 문화로 정립되는 과정을 탐구한다는 점에서 흥미로울 것이다. 다만 무서운 것은 '편견'이다. '열길 물속은 알아도 한길 사람 속은 모른다'는 말처럼 인간의 심리가 어제와 오늘이 다르다면, '문화심리' 역시 확정형을 제시되는 형태가 아니라 여러 과정과 결과들의 '총합'의 형태로 드러나게 된다.
저자가 책에서 다룬 내용 중 하나로 '외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주말에 집에만 머무는 곳보다는 여기저기 나가서 사람들을 만나고 교감하는 것이 훨씬 더 낫다는 내용이었다. 하지만 철학자 파스칼은 '혼자 머무는 것의 즐거움을 아는 사람은 행복하다'고 했다. '인간의 행동'과 '문화'를 논하는 모든 이야기가 '상대적'임을 간과할 수 없다. 따라서 책의 모든 내용들은 앞의 예시처럼 받아들이는 사람 나름이다. 정답은 없는 이야기들이기에 '확정형 어법'의 어색한 기운을 느낀 독자들이라면, '추정형 어법'으로 바꿔 읽는 것도 좋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