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여페이지 되는 책을 한 3,000장쯤은 되는 듯이 지루하게 읽었다. 약간 3.5차원의 세계를 살고 있는 로캉탱 교수의 시선으로 주변을 살핀다. 특별한 줄거리도 없고, 그저 로캉탱 교수의 시선을 통해 벌레의 뒤꽁무니를 쫓는다거나 마음의 안경을 바꾸어가며 사람들을 관찰한다. 가끔 생의 의욕에 고취될라 치면 여지없이 다시 음울한 기운을 내뿜고 터벅터벅 하루하루를 살아간다. 별다른 느낌없이 '어렵다'는 생각으로 읽었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는 순간에는 완독의 뿌듯함은 온데간데 없이 해묵은 숙제 하나를 마친 느낌이었다. 샤르트르의 실존철학에 대해 다소의 호기심을 보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과장하자면, '구토' 덕분에 샤르트르는 물론 실존철학은 그저 모르고 살아도 될 것 같은 마음이 들었다.
책에 대한 설명을 책의 표지에서 그대로 옮기면,
<구토>는 사르트르의 문학과 철학의 바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작가의 태도와 작중 인물의 위치가 확실하다. 가정, 사회, 역사 따위의 문제보다는 한 고독한 지식인이 실존적 의식에 눈떠 가는 과정을 일기체로 쓰고 있다. 주인공은 일반적인 철학자처럼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각, 촉각, 청각 등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살다보면 그러고 싶을때가 있는 것 같긴 하다. 항상 보아왔던 일상의 풍경이나 작은 생물체 또는 자기 스스로가 낯설어 보이거나 보편적이지 못한 것에 다소 집착하게 되고. 그러다가 점점 도취되어 버린게 아닐까.
개인적인 감상이 거의 전무한 관계로 이번엔 책의 뒷표지를 그대로 옮긴다.
그는 바닷가의 조약돌을 주웠을때 처음으로 '구역질'을 느꼈고, 파이프나 포크를 잡는 손에서 다시금 그 '구역질'을 느낀다. 이 '구역질'은 사물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시작되고, 다음에는 그러한 사물이나 타인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을때 생기는 생리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삶에는 하등의 이유도 근거도 없는 '무상성'을 깨달았을때 생기는 당혹과 의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역질'이다. 그것은 각성이며 동시에 명철이다. 왜냐하면 외연적인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에 대한 기대를 거는 것만큼 무의미한 노릇은 없기 때문이다.
왜 책을 읽기 전에 뒷표지를 소홀히 했는지 모를 일이다ㅋ.
책에 대한 설명을 책의 표지에서 그대로 옮기면,
<구토>는 사르트르의 문학과 철학의 바탕을 가장 잘 나타내는 작품으로, 작가의 태도와 작중 인물의 위치가 확실하다. 가정, 사회, 역사 따위의 문제보다는 한 고독한 지식인이 실존적 의식에 눈떠 가는 과정을 일기체로 쓰고 있다. 주인공은 일반적인 철학자처럼 관념적으로 사색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시각, 촉각, 청각 등을 통해 존재의 이유를 찾고자 한다.
살다보면 그러고 싶을때가 있는 것 같긴 하다. 항상 보아왔던 일상의 풍경이나 작은 생물체 또는 자기 스스로가 낯설어 보이거나 보편적이지 못한 것에 다소 집착하게 되고. 그러다가 점점 도취되어 버린게 아닐까.
개인적인 감상이 거의 전무한 관계로 이번엔 책의 뒷표지를 그대로 옮긴다.
그는 바닷가의 조약돌을 주웠을때 처음으로 '구역질'을 느꼈고, 파이프나 포크를 잡는 손에서 다시금 그 '구역질'을 느낀다. 이 '구역질'은 사물과 타인의 존재를 인식하는데서부터 시작되고, 다음에는 그러한 사물이나 타인 속에서 자기 존재의 의미를 깨달았을때 생기는 생리 작용이다. 다시 말하면, 존재의 가면을 벗어버리고 삶에는 하등의 이유도 근거도 없는 '무상성'을 깨달았을때 생기는 당혹과 의식의 뒤얽힘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구역질'이다. 그것은 각성이며 동시에 명철이다. 왜냐하면 외연적인 구원이 존재하지 않는데 그에 대한 기대를 거는 것만큼 무의미한 노릇은 없기 때문이다.
왜 책을 읽기 전에 뒷표지를 소홀히 했는지 모를 일이다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