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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에 해당되는 글 149

  1. 2009.08.31 업, UP, 피트 닥터, 밥 피터슨
  2. 2009.08.24 [연극] 잇츠유
  3. 2009.08.17 국가대표, 하정우, 성동일
  4. 2009.08.08 [연극] 환상동화
  5. 2009.07.20 똥파리, 양익준
2009. 8. 31. 09:35

업, UP, 피트 닥터, 밥 피터슨 영화2009. 8. 31. 09:35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 즈음 생각이 난다. 그 당시 중간고사에서 기적적(?)으로 큰 성과를 거둔 나는 기말고사에서도 담임선생님의 부담스러운 기대 속에서 시험기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중간고사 성적은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뿌듯하게 했었다. 평소 공부보다는 언제나 건강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저녁 늦게 숙제라도 할라치면, 잠자는게 우선이라셨기에 성적을 아시고도 언제나 별 내색하지 않으셨었다. 큰댁에 가서 아버지가 그것을 몹시 기뻐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아버지의 행복이 내 어깨에 있다고 믿던 그 시절의 나는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 역시 지금처럼 마음만 앞섰지 마음먹은 바를 제대로 매듭짓진 못했던 것 같다. 

여튼 내 기말고사 성적은 담임선생님과 아버지의 작은 관심사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애석한 일이라면 나의 관심사가 기말고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것. 그 시기 전까지 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책과 거리를 두던 나는 무서운 훼방꾼을 만났다. 바로 중국의 작가 김용이 쓴 '영웅문'. 3부에 걸쳐 전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무협소설로 여타의 일반 무협지와 비교했을때, 그 방대한 분량과 탄탄한 구성, 단순히 무협적인 속성을 뛰어넘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갈등구조의 섬세한 심리묘사 덕택에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이자 주목받는 고전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때때로 주는 책의 마력이란, 삶의 어떤 여타의 즐거움을 뛰어넘는 것이다. '영웅문'의 포로가 된 나는 교과서 대신 '영웅문'과 함께 밤을 지새웠고, 당연히 성적은 곤두박질을 쳤다. 담임선생님은 다소 의아해하셨고, 아버지는 이번에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 후로도 아버지에게 있어 내 성적은 '중간고사의 기적'으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았다. 항상 무언의 믿음으로 사랑해주신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바보가 있다. 

그리고 당시 '영웅문'으로 밤을 지새울때는 경민이가 복사해준 '슬픈 무드팝송'이라는 테이프가 항상 플레이되고 있었다. 무협소설에 왠 무드팝송? 이라고 의아해할수 있으나, 다시 생각해봐도 그 조합은 '환상의 커플'이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영웅문 1부의 주인공들인 황용과 곽정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한밤의 정취와 구슬프게 흐르는 배경음악 속에서 더욱 빛났다. 그런 경험은 내 기억 속에서 여러 연결고리를 탄생시킨다. 그 당시에 듣던 슬픈 무드 팝송 중 한 곡이 흘러나올때면, 으레 '영웅문'의 러브스토리가 연상되곤 했다. 더불어 기말고사의 곤두박질친 성적도 함께. 

지금까지 내가 접했던 책들과 영화, 공연에는 항상 이면에 다른 이야기가 숨겨진 경우가 많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시의 심리 상태, 주변 정황, 배우의 스타일, 무대의 규모, 동행하는 이 등이 그 이면에 같이 살아숨쉬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요소가 있을테고, 자연스럽게 연상 작용으로 꼬리를 물게 된다. 같은 책과 영화를 보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책을 같은 사람이 보고도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듯이. 

지난해 '월E'가 본 그 직후부터 줄곧 기다려왔던 애니메이션 'UP'이다. 픽사의 작품은 실망을 안겨준 적이 없다. 너무도 큰 기대는 순간 실망으로 변하는 듯 싶으면서도 이내 제자리를 찾는다. 무한한 상상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힘은 애니메이션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지난해에 이어서 이번에도 픽사는 '나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실사영화와의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픽사의 일보 전진을 축하하고 싶다.

영화에서 가장 따뜻했던 장면은 칼과 엘리가 어린 시절에 만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헤어지던 시기까지의 짧은 파노라마 같은 영상이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그 온기가 전달되어 왔다. 특히나 어지럽게 풀어헤친 머리 때문에 성별 분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엘리가 귀여운 할머니가 되어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몰입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게 아쉽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영화다. 항상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기에, 더욱더 행복한 일상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애니메이션 제작자 분들과 픽사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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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8. 24. 16:55

[연극] 잇츠유 영화2009. 8. 24. 16:55

지난 몇년간 '연극'이라는 장르는 참 매력적이었다. 스크린을 통해서 영화나 애니메이션을 접하는 것보다 생동감이 있었다. 배우들의 즉흥적인 위트와 유머는 늘상 통쾌하기에 무료하게 느껴지는 일상에 더없는 청량제가 된다. 기회만 되면 대학로로 향했던 것 같다. 물론 그 기회라는 것은 극히 한정되어 있어 대략 횟수를 놓고 보면 '많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사랑'의 종류는 참으로 다양하다. 때론 운명적이기도 하고, 때론 헌신적이기도 하고, 극히 일부는 가학적이기까지 하다. 대부분 아주 '우연'하다고 느껴지는 '결정적'인 계기를 통해서 사랑은 싹튼다. 알랭 드 보통은 자신의 저서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에서 사랑은 '첫 만남에서 오는 가벼운 떨림'에서 시작한다고 했다. 물론 그것마저 사랑이 시작되는 한 유형일 것이다. 연극 '잇츠유'에서 소개하는 사랑은 그런 기습적인 것이 아닌 가을의 단풍처럼 소리없이 물들어가는 사랑이다. 어쩌면 운명적이기도 하면서, 헌신적이며 그 과정에서 서로에게 상처를 수반한다. 

극 중 두 커플은 서로 다른 사랑을 한다. 한 커플은 다소 운명적인 만남을 통해 천천히 사랑을 싹틔워 나간다. 어느 한쪽으로의 기울임 없이 균형적인 사랑의 시소 위에서 그 떨림을 즐기기도 하고, 마음 조리기도 한다. 시나리오의 극적 요소인 '갈등' 파트를 제거하고 나면, '왜 이렇게 사랑하는 게 어렵냐'고 푸념을 쏟아내는 이 시대의 수많은 젊은 남녀들이 소주병을 집어던지고 싶을만큼 '탄탄대로'의 싹틈이다. 우연한 만남과 그 연장, 사소한 이야기와 잔잔한 호감, 서로의 사랑을 확인하는 적절한 계기로 끝맺음이 된다. 

다른 커플은 귀찮다 못해 지긋지긋할만큼 헌신적인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고서 비로소 성취해내는 '고진감래'형이다. 개인적으로 그다지 추천하지 않는 방식으로 이 방법의 성공률은 아마도 채 5%도 되지 못할텐데도 대부분이 이런 과정을 거친다고 잘못 알려져 있다. '1%의 가능성이 나의 길이다', '불가능은 없다.'라는 말로 젊은 연인들을 현혹시킨 나폴레옹에게 이 책임을 물어야 할지, '자격지심' 속에서 자신을 희생하는 사랑이야말로 진정한 사랑이라고 찬미하는 대중매체를 탓해야 할지 난감하다.  

지난 몇년간 연극 속에서 웃음을 만들어내는 하나의 방식은 바로 '멀티맨'의 등장이다. 관객에서 친숙한, 대부분 연극 시작전 공연안내 및 주의사항 멘트를 하러 나오는, 한 배우가 멀티맨 역할을 통해 스토리와 스토리를 잇는 적절한 연결고리 역할을 한다. 그 과정에서 다소 익살스러운 캐릭터와 변화무쌍한 분장으로 관객들을 사로잡는다. 대개 멀티맨의 역할 설정을 잘 하면, 그 등장만으로도 관객들은 빵빵 터진다.

개인적으로 '잇츠유'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품은 주먹보다도 더 크게 만들어진 BMW라는 로고의 열쇠고리였다. 대화 중에 혹은 분장 중에 그러한 터무니없는 과장으로 웃음을 유발한다. 비단 연극 뿐만 아니라 토크쇼, 스탠딩 코미디 등등에 모두 해당된다. 내가 좋아하는 스타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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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8. 17. 08:51

국가대표, 하정우, 성동일 영화2009. 8. 17. 08:51

영화의 매력에 푹 빠질 수 있었던 시간이었다. 스키 점프라는 스포츠가 얼마나 매력적인지 잘 보여주었고, 마지막 부분이 다소 거북스러웠지만 전체적으로 너무 잘 만든 작품이었다. 대회에 참가했던 마지막 스키 장면은 정말 숨을 죽이면서 영화 속 이야기가 아닌 실제 스포츠의 진수를 느끼는 것 같았다. 굉장히 빠른 속도로 낙하하면서 새처럼 날아올라 비상하는 모습들은 지상의 아둥바둥한 우리들에게 큰 쾌감을 주었고, 막힌 속을 뚫어주는 듯한 통쾌함이 있었다. 더 멀리 날아가고자 몸을 웅크리면서 바람의 마찰을 최소화하는 모양은 한마리의 새를 보는 듯 했고, 떨어지지 않을 것 같은 '영원'의 느낌을 주었다. 

최근에 스포츠를 소재로 한 영화가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얻고 있다. 핸드볼을 소재로 한 '우리 생애 최고의 순간', 그리고 역도를 소재로 한 '킹콩을 들다'. 우생순은 보질 못했지만, 세 영화의 공통점은 비인기종목인 스포츠의 애닲은 현실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좋은 성적을 올리는 선수들의 스토리를 담았다. 일명 '각본 없는 드라마'라고 일컬어지는 스포츠의 세계에 극적인 '각본'을 추가함으로써 관객들의 공감을 이끌어내고 있다. 그 어려운 과정의 중간중간에서 만나는 적절한 '위트'는 참 반갑다. 조만간 또다른 비인기종목 스포츠를 소재로 또다른 영화가 탄생할지도 모를 일이다. 아니면 최근에 인간극장에서도 '킹콩을 들다'에서와 똑같은 환경 속에서 역도를 하고 있는 역도인들을 그린 것처럼, TV에 모습을 보일지도. 다만 올림픽에서 메달을 딴 순간에만 잠시나마 세간의 주목을 받는 것처럼 영화가 흥행할때 잠시 관심을 끌고, 돈을 필요한 사람들에게 돈다발을 안겨주는 것을 넘어서 지속적인 투자가 있었으면 좋겠다. 현실적으로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개인적으로 축구와 같은 인기종목에 대한 투자를 줄이고, 비인기종목에 투자를 분산했으면 하는 바램이다.

영화를 보기 전에 '국가대표'와 '해운대' 사이에서 좀 고민을 했는데 좋은 선택이었던 것 같다. 그렇지 않아도 영화 관람객들 사이에서 두 영화를 놓고 비교가 한창인가 본데, 대체적으로 국가대표의 판정승을 들어주는 것 같다. 해운대가 조만간 1,000만 관객을 돌파한다고 하니 이제 400만에 도달한 국가대표의 향후 선전이 기대된다.

좋은 영화지만 그래도 개인적으로 아쉬운 부분은 있었다. 마지막의 벅찬 스키 장면으로 인해 내용이 과장되거나 다소 비현실적인 것들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하지만 흥분과 긴장 상태가 정점에 이르렀을때 '봉구'의 등장은 큰 실망이었다. 특히나 그 바보스러움이 비현실을 무기로 묻혀지고 희극화되었는데, 가장 중요한 순간에 아주 극한의 현실적인 '바보스러움'이 되었다. 바보가 갑자기 정신이 멀쩡해지는 것처럼 무서움을 느끼고 돌아서는 순간 형한테 따귀를 한대 얻어맞고 다시 출발대로 돌아선다. 따귀를 때리면서 형이 뱉는 한마디. '니가 뛰어야 내가 군대를 안간다고!'. 순간 참 멋대가리 없는 멘트라고 생각했다. 열심히 훈련한 형도 악천후에 부상을 당했는데, 연습도 별로 하지 않은 바보 '봉구'를 그런 위험 속에 빠뜨리는 것은 영화다운 속성을 충분히 감안하여 넘어갈 수 있었다. 오히려 흐름을 비추어보면 바보가 기적적으로 '해피 엔딩'을 끌어내 주는 것까지 바라고 있는 터였다. 여튼 그 찬물은 영화 속에 뜨겁게 몰입하던 흥분을 차갑게 가라앉히고 말았다. 

그 상황에서 태극기와 애국가의 등장은 실로 보기 민망한 장면이었다. 물론 스토리상 아쉽게 실패를 하고 나서, 우리는 졌지만 진게 아니다, 라는 분위기를 끌어내고 다시 영화를 극적으로 만든 상태에서 '성공'을 예감하는 준해피엔딩의 형태로 영화를 마무리짖는 것이 전형적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고, 달리 다른 방법도 없을테지만, '봉구'의 등장에서부터 이어진 어설픈 쇼는 애국가 제창이라는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을 만들어버리고 말았다. 물론 그 상황에서 감동을 받았던 관객들도 많았을 줄로 안다. 그 반응의 형태는 다양하게 나타나는 것이 당연하기 때문에, 단지 개인적인 느낌이 그렇다는 이야기다. 더불어 영화와 관객인 나 사이에서 형성되는 그런 서먹서먹함은 아마도 '해피 엔딩'에 대한 나의 집착에서 연유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여튼 감독이 영화를 마무리짓지 못한 것은 하지 못한 말을 다하기 위해서이다. 주인공으로 나오는 차헌태의 이야기도 들어야 했고, 올림픽의 영웅이었지만 또 차가운 현실로 돌아가는 장면도 보여주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음울한 빛'을 간직한 채로 영화에 마침표를 찍을 순 없었다. 다시 한번 올림픽 장면을 재현하자니 식상하고, 결국 만면에 웃음을 머금은 영화 속 주인공 차헌태의 비행 장면을 끝으로 삼은 셈이다.  

그외 영화의 이런저런 잡설로, 김수로와 오광록님의 등장은 반가웠다. 김수로님의 등장 장면에서는 큰 웃음이 있었고, 오광록님의 등장때는 반가운 마음이 더했다. 스키 점프시 낙하하는 쇳소리(?)도 긴장감있게 좋았고, 하정우의 목소리 및 영어 연기도 괜찮았다. 성동일의 진지하면서도 다소 엉뚱한 캐릭터도 무난했고, 영화의 OST 음악 역시 영화가 끝난 후에도 발걸음을 잡을 정도로 쉽게 익숙해지는 멜로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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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8. 8. 11:31

[연극] 환상동화 영화2009. 8. 8. 11:31


점원은 너처럼 키자 잘고, 그냥 그렇게 생긴 애들이나 하는 거라구.
글쎄 누가 날 내다 버렸더라구요.

공연을 보면서 가장 마음에 들었던, 들으면서 가장 많이 웃었던 두 대사이다. 전자에 비해서는 후자가 더욱 그랬다. 두 번째 대사를 읊은 배우는 그 생김에서부터 광대역이 잘 어울렸고, 자꾸 보다보니 한 친구가 생각이 나서 재미를 주었다. 오랜만에 보는 것이니만큼 다른 때보다 더 웃음이 절실했는데, 기대만큼 큰 웃음없이 스토리가 전개되었다. 대부분의 공연이 그렇듯이 '웃음'과 '감동'을 적절히 버무려서 기분좋은 결말을 이끌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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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7. 20. 08:52

똥파리, 양익준 영화2009. 7. 20. 08:52

'똥파리'같은 영화다. 이런저런 영화제에서 13개의 상을 수상했고, 네이버 평점은 무려 9점을 훨씬 상회한다. 치열한 삶의 현장에 대한 어설픈 감상이 아니라면, 도대체 영화의 어떤 요소가 관객들과 평론가들의 마음을 파고 들었는지 모를 일이다. 어찌보면 안방 브라운관에서 볼 수 없는 '인생극장'을 장소를 옮겨 좀더 리얼하게 보여주었다면 과장일까.
 

한마디로 '밑바닥' 인생이다. 누구나가 '밑바닥' 인생을 경험하고 싶지 않겠지만, 개인적으로 '간접 경험'만큼은 그다지 거부감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유난히도 영화에 정이 가지 않았다. 그런 표현이 맞을 것이다. 시기에 따라서 어떤 경우엔 공감하기도 하니까 이번 경우에 한해선. 영화 속 주인공은 한심스럽다는 말 이외 다른 표현이 어렵다. 무엇보다 삶에 대한 애정, 즐거움이 없고, 가족에 대한 애증, 사람들에 대한 삐딱한 시선은 그의 삶이 '가치가 없다'는 것을 대변하고 있다. 그렇다고 전적으로 삶이 개인의 역량에 의해 좌우된다고 믿는 건 아니다. 비록 극복해내지는 못했지만, 그가 희생자라고 생각한다. 다시는 살고 싶지 않을 힘든 현실을 어쩔 수 없이 맞이해야 하는 상황 속에서 선택의 폭은 아주 좁았을 것이다. 나는 그러한 현실의 한계를 마주하는 슬픈 삶을 바라보는게 거북스러울 뿐이다. 

'우리'라는 사람들이 각각 자신만의 이상과 가치관을 가지고 있고, 그것이 하나로 통하는 일은 없을 것이기 때문에 어떤 사람들에게 삶은 늑 '팍팍'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지식을 쌇고 다양한 식견을 넓힘으로써 올바른 판단력을 기르고, 적어도 이 사회가 개개인에게 주는 마지막 기회인 '민주주의'의 권리를 최대한 활용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무식하고 무지하고, 지옥의 늪에 조금씩 빠져들어가는 '똥파리 같은 인생'을 반복할 뿐이다. 가진 사람들이 더 가지려고 하는 것은 인간의 당연한 욕구다. 그건 가졌다는 것, 못 가졌다는 것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문제다. 어렸을 때 배우는 것처럼, 인간의 욕구는 무한하기 때문에, 그 욕구를 충족시킬만큼 한정된 자원을 균등하게 분배시킬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최대 다수의 최대 행복'이나마 실현하려고 한다면, 다수의 집단에 있는 사람들이 다분히 자신들을 위한 '올바른 선택'을 하는 수밖에 없다. 

영화의 주인공은 사실 그 영역 밖에 있는 사람이다. 물 밑에 있다고나 할까. 이를테면 물 위에 있는 사람은 '힘들어도 열심히 사는 사람', 물 밑의 사람은 '힘들지만 제멋대로 사는 사람'. 굳이 이분법적으로 나누자면 그런건데, 어느 쪽이 더 행복하다고 단정지을 순 없다. 둘다 힘들게 사는 건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니까. 다만 삶의 가치를 '미래'에 더 비중을 두느냐, '현재'에 두느냐 아닐까.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욕설'에는 확실히 어떤 '쾌감'이 있다. 미친놈 같은 소리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모든 사람들이 언어 구사에 있어서 '욕설은 절대 금지'라는 어떤 한계를 정해놓았기 때문에 그것을 자유롭게 넘나드는 것을 보면서 '대리만족'같은 것을 느끼는지도 모른다. 감정이 격해져 있을때, 그것을 절제된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 자체가 스트레스다. 보통 자신에게 표현할때는 미친듯이 '악~'을 질러대면 해결이 되지만, 타인에게 발설할때는 '악~'만으로는 쉽사리 성이 풀리지 않는 경우가 많다. 너무 고운말만 써야 한다고 스스로를 강박하지 말자ㅋ '절제'는 보통 아름다운 것들이 많지만, 때때로 자신을 해치는 경우도 있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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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