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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31. 09:35

업, UP, 피트 닥터, 밥 피터슨 영화2009. 8. 31. 09:35

뜬금없는 이야기지만, 중학교 3학년 기말고사 즈음 생각이 난다. 그 당시 중간고사에서 기적적(?)으로 큰 성과를 거둔 나는 기말고사에서도 담임선생님의 부담스러운 기대 속에서 시험기간을 보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중간고사 성적은 알게 모르게 아버지를 뿌듯하게 했었다. 평소 공부보다는 언제나 건강이 중요하다고 하시면서, 저녁 늦게 숙제라도 할라치면, 잠자는게 우선이라셨기에 성적을 아시고도 언제나 별 내색하지 않으셨었다. 큰댁에 가서 아버지가 그것을 몹시 기뻐하시더라는 이야기를 듣고, 어린 마음에 눈물을 왈칵 쏟을 뻔했다. 아버지의 행복이 내 어깨에 있다고 믿던 그 시절의 나는 항상 감사하고 또 감사하는 마음으로 아버지의 마음을 행복하게 해드리고 싶었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그 시절의 나 역시 지금처럼 마음만 앞섰지 마음먹은 바를 제대로 매듭짓진 못했던 것 같다. 

여튼 내 기말고사 성적은 담임선생님과 아버지의 작은 관심사 중에 하나였을 것이다. 애석한 일이라면 나의 관심사가 기말고사가 아니라 다른 곳에 가 있었다는 것. 그 시기 전까지 교과서를 제외한 모든 책과 거리를 두던 나는 무서운 훼방꾼을 만났다. 바로 중국의 작가 김용이 쓴 '영웅문'. 3부에 걸쳐 전 18권으로 구성되어 있는 무협소설로 여타의 일반 무협지와 비교했을때, 그 방대한 분량과 탄탄한 구성, 단순히 무협적인 속성을 뛰어넘는 등장인물 개개인의 갈등구조의 섬세한 심리묘사 덕택에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에서도 베스트셀러이자 주목받는 고전 작품으로 인정받고 있다. 때때로 주는 책의 마력이란, 삶의 어떤 여타의 즐거움을 뛰어넘는 것이다. '영웅문'의 포로가 된 나는 교과서 대신 '영웅문'과 함께 밤을 지새웠고, 당연히 성적은 곤두박질을 쳤다. 담임선생님은 다소 의아해하셨고, 아버지는 이번에도 별다른 말씀이 없으셨다. 하지만 그 후로도 아버지에게 있어 내 성적은 '중간고사의 기적'으로 고정되어 변하지 않았다. 항상 무언의 믿음으로 사랑해주신 가르침을 실천하지 못하는 바보가 있다. 

그리고 당시 '영웅문'으로 밤을 지새울때는 경민이가 복사해준 '슬픈 무드팝송'이라는 테이프가 항상 플레이되고 있었다. 무협소설에 왠 무드팝송? 이라고 의아해할수 있으나, 다시 생각해봐도 그 조합은 '환상의 커플'이다. 지금도 잊혀지지 않는 영웅문 1부의 주인공들인 황용과 곽정의 애절한 러브스토리는 한밤의 정취와 구슬프게 흐르는 배경음악 속에서 더욱 빛났다. 그런 경험은 내 기억 속에서 여러 연결고리를 탄생시킨다. 그 당시에 듣던 슬픈 무드 팝송 중 한 곡이 흘러나올때면, 으레 '영웅문'의 러브스토리가 연상되곤 했다. 더불어 기말고사의 곤두박질친 성적도 함께. 

지금까지 내가 접했던 책들과 영화, 공연에는 항상 이면에 다른 이야기가 숨겨진 경우가 많다. 그것은 비단 나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들에게도 똑같이 적용된다. 당시의 심리 상태, 주변 정황, 배우의 스타일, 무대의 규모, 동행하는 이 등이 그 이면에 같이 살아숨쉬는 것이다. 그 중에 가장 영향을 많이 미치는 요소가 있을테고, 자연스럽게 연상 작용으로 꼬리를 물게 된다. 같은 책과 영화를 보고도 서로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이유이기도 하다. 같은 책을 같은 사람이 보고도 물론 다른 이야기를 하듯이. 

지난해 '월E'가 본 그 직후부터 줄곧 기다려왔던 애니메이션 'UP'이다. 픽사의 작품은 실망을 안겨준 적이 없다. 너무도 큰 기대는 순간 실망으로 변하는 듯 싶으면서도 이내 제자리를 찾는다. 무한한 상상력과 생명을 불어넣는 힘은 애니메이션의 가장 강력한 매력이다. 지난해에 이어서 이번에도 픽사는 '나의 이해력을 뛰어넘는' 상상력을 보여주었다. 실사영화와의 경계를 분명하게 긋는 픽사의 일보 전진을 축하하고 싶다.

영화에서 가장 따뜻했던 장면은 칼과 엘리가 어린 시절에 만나서 할아버지, 할머니가 되어 헤어지던 시기까지의 짧은 파노라마 같은 영상이다. 그 짧은 시간이지만, 두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을 것처럼 그 온기가 전달되어 왔다. 특히나 어지럽게 풀어헤친 머리 때문에 성별 분간조차 제대로 되지 않았던 엘리가 귀여운 할머니가 되어가는 것이 흥미로웠다. 영화를 더 깊이 이해하고, 몰입할 만한 상황이 되지 못한게 아쉽지만, 기억에 오래 남을 영화다. 항상 새로운 감동을 선사하기에, 더욱더 행복한 일상을 가능하게 해 주시는 애니메이션 제작자 분들과 픽사에 감사를 드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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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