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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11. 19. 23:48

공중그네, 오쿠다 히데오 도서2007. 11. 19. 23: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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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명한 작품이기 때문에, 회사에서 독서통신을 하는 과정에서 자유서적 1권으로 선택한 책이다. 이미 오쿠다 히데오의 작품은 '남쪽으로 튀어'라는 책을 통해 접한 바 있다. '남쪽으로 튀어'라는 책을 읽는 중에는 계속 현실을 부정하는 주인공에 대한 거부감도 없지 않았으나, 지난 후 다시 생각해보니 그러한 주인공을 내세워서 드러내는 작가의 이상이 사뭇 그럴듯해 보이기까지 한다. 어찌보면 이미 충분한 '사회화 과정'을 거치면서 '민주시민'이 되어버린 나이기에 책의 이상에 가까워지는 것이 쉽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공중그네'라는 작품은 주인공인 정신과의사 이라부의 기상천외한 치료방법(?)이나 기행을 소개하며 각각의 스토리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자신의 문제점을 깨닫고 해결해가는 과정을 그린 소설이다. 어느 면에서 과장된 면이 없지 않으나, 누구나 자신은 느끼지 못한 문제들을 안고 있을 수도 있다는 점에서 나름 공감이 가는 작품이었다.

고슴도치 - 선단공포증을 지닌 야쿠자
공중그네 - 곡예사 이야기
장인의 가발 - 장인의 가발과 의사 사위
3루수 - 악송구를 던지는3루수
여류작가 - 강박관념의 소유자

야구를 좋아하는 나로서는 3루수의 이야기를 다루는 스토리에서 번역의 오류 소지가 있는 부분을 발견했다. 이야기 중간에 여러번 등장하는 '개막전'이라는 번역은 사실 '시범경기'나 메이저리그로 따지면 '스프링 트레이닝'으로 번역되어야 했을 단어들이 아닌가 싶다. 실제 정규시즌 개막전이 되기 전까지는 시범경기를 갖는데, 시범경기와 정규시즌 개막전을 모두 통일해서 '개막전'이라고 호칭하고 있었다.

이 책은 다 읽고 나서 다른 사람을 주었다. 책을 사서 읽고, 책장에 꽂아두는 것도 나쁜 일은 아니지만, 공간이 비좁기 때문에 책을 모을 형편은 못되고, 다른 사람이 읽을 기회를 주기로 했다. 그것이 또 책을 더 가치있게 하는 일이라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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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1. 19. 23:47

모방범, 미야베 미유키 도서2007. 11. 19. 23: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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셜록 홈즈 시리즈를 읽던 시절 생각이 나기도 하지만, 여러 면에서 당시에 읽었던 추리소설과는 다른 책이었다.

처음 인터넷으로 주문을 하고 책을 받았을때 놀랐던 것은 녹록치 않은 책의 두께와 빽빽하게 들어찬 활자 때문이었다. 3권씩이나 두껍게 이어나갈 정도로 장편의 소설이라는 생각은 미처 생각해보지 못한 탓이었다. 3주 정도의 시간을 투자했다.

추리소설이 주는 특유의 '범인을 추리해가는 스릴'은 없었다. 이미 극 초반에 범인이 누구인지에 대한 답이 드러났기 때문이다. 전체적으로 작가가 초점을 맞춘 부분은 범죄자들의 심리와 범죄의 과정에서 이루어졌던 범죄 동기 및 치밀한 계획 등등이었다. 독자로 하여금 '범인이 누구일까'라는 궁금증을 자아내면서 긴박감을 주지는 않았다.

이 책이 그리 잘 씌여진 책은 못되지 않나, 라는 주관적인 판단을 하게 된 것은 마지막 결말 부분이었다. 모든 글을 결말을 맺는 것이 참으로 어렵다. 내가 사소한 감상문 하나를 쓴다고 하더라도 마지막을 마무리하는데 많은 고민을 한다. 보통 모든 글을 처음과 마지막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어렸을때 선생님들이 글짓기 심사를 할때 처음과 마지막을 보고 일단 거른다는 소문도 있었고, 실제로 그러기도 했었다.

범인이 밝혀지는 과정이 기대에 비해 다소 허무한 면이 없지 않았다. 어떤 식으로든 작품을 마무리짓기 위한 방편이 작가에게 필요하기는 했겠지만, 무엇 때문에 그리 서둘러 끝마쳐야 했는지, 아니면 정녕 다른 방법은 없었던 것인지 의아하다.

오랜만에 장편의 소설 하나를 읽었다는 뿌듯함은 그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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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1. 19. 17:55

유쾌한 하녀 마리사, 천명관 도서2007. 11. 19. 17: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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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만큼이나 유쾌한 책이었다. 내용 자체가 그렇게 유쾌하거나 코믹스러운 것은 아니었지만, 내가 생각하는 삶, 그리고 생각하는 방식.. 여하튼 그런 것들이 잘 몇몇의 단편소설 속에 응축되었다는 느낌이 들었다. 이런 느낌은 어떤 식으로 표현을 해야할지 막연하기만 하지만, 코드가 잘 맞는다고 하면 될까. 여러가지 면이 내포되어 있을 것이다. 글 속에 내재되어 있는 삶을 바라보는 관점, 스토리를 풀어가는 방식... 그런 부분들이 독자인 나의 공감 속에서 독서가 이루어졌다는 점에서 나에게는 즐겁고도 반가운 독서였다. 이 책 역시 완독을 하고 또다른 독자에게로 건네졌다. 즐거운 일이다.

여러 단편으로 이루어진 단편집인데,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이야기가 있었고, 50대 여성방송작가의 이야기를 다룬 비행기라는 이야기, 철없는 남편의 캐나다 기행을 그린 '프랭크와 나', 노년의 갱스터의 회고를 그린 '더 멋진 인생을 위해 - 마티에게', 토머스 칼라일의 원고가 불쏘시개로 사용되어 버린 이야기 '프랑스 혁명사 - 제인웰시의 간절한 부탁', 숟가락 구부리기에 대한 이야기 '숟가락아, 구부러져라', 골프공을 찾아나서는 아이들의 이야기 '13홀', 성묘길을 통해 느끼는 막연한 삶을 그린 '세일링', 직장을 잃은 한 남자의 '자동차없는 인생', 그 밖에 내용이 잘 기억나지 않는 농장의 일요일 등의 이야기가 있다.

그리고 여기서부턴--;

이런저런 이야기를 끄적였는데, 블로그가 다 날려먹었다. '확인'을 기분좋게 클릭했는데, '페이지를 표시할 수 없습니다'라는 문구가 뜰때의 그 황당함... 대략난감이다. 화가 나지만, 풀 데가 없다는거.

덕분에 책을 읽고 느낀 이런저런 독백은 생략이다. 같은 짓을 두번이나 할 수는 없기에. 그렇지 않아도 요즘 '네이버'에 대한 흉흉한 소문들이 나돌고 있는 와중에, 안 좋은 기억들이 자꾸 쌓여가는 것만 같다. 울컥하는 마음이 들지만, '유쾌한 하녀 마리사'에 등장하는 여느 인생들처럼 나 역시 '별 수 없는 인생'이기에.

천명관의 또다른 소설이자, 대표적인 장편소설인 '고래'를 읽어봐야겠다. '유쾌한 하녀 마리사'의 기분 좋은 느낌을 간직한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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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0. 7. 16:36

민족이라는 명제 도서2007. 10. 7. 16:36

'세상을 등지고 어느 산골에 가서 남 몰래 두 사람이 살 수도 있는 일 아닌가. 한 남자와 한 여자로서, 민족이라는 굴레 같은 것 벗어던져 버리고 계급이라는 그따위 남의 일 관여치 않고... 민족이란 도시 무엇인가. 이것에는 다분히 허식이 있다. 자애(自愛)하는 이기심도 분명히 있다. 침해하는 쪽이나 침해당하는 쪽이나. 내가 지금 무슨 소릴 하고 있는거지? 민족이란... 결국 필요해 의해 흩어지지 않고 모인 집단, 무리를 짓는 동물과 같이 생존을 위한 집단이 아닌가. 다만 좀 노골적으로 얘기하자면 인간은 본능을 사랑이라 하고 진실이라고도 한다. 이런 불안정한 인간집단을 수용한 집단은 조국이라는 말뚝을 박아놓고 한 핏줄이라는 끈으로 묶어놓고 일방통행을 한다.

조국! 핏줄! 그것은 절대적인 것인가? 항구불멸의 것으로 이탈하면 안되는 것인가? 생존을 위한 공동체, 그것은 과연 공동체였던가? 민족을, 국가를, 그리고 소수를 위해 대부분의 인간들은 그들 밑깔개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일본에 대하여 민족적인 분노를 느낀 것은 그것은 감정이다. 팔이 안으로 굽는다는 그것처럼. 거의 이성은 아니다. 그러나 저 여자의 경우 감정보다 이성이 더 강한 것 같다. 만일 동족끼리 불륜으로 사생아를 낳았더라면 저 여자는 어떻게 했을까? 아마 그는 수모를 감내하면서 아이를 길렀을 거야. 버리는 따위의 짓은 하지 않았을거야.

남자와 여자, 그리고 태어날 또 하나의 생명. 이들의 결합을 저해하는 것은 지금 민족이라는 명제다. 큰 것은 항상 작은 것을 말살하고 먹어치운다. 이 정당성, 논리는 끝이 없는 것일까? 끝이 없는 것이다. 끝이 없는...'

찬하는 담배를 붙여물었다.

 

박경리의 [토지] 中에서

비단 사랑과 민족의 문제가 아닌, '큰 것이 항상 작은 것을 말살하고 먹어치우는 문제'에 관한 정당성. 개인은 가족의 작은 부분이고, 가족은 집단의 작은 부분, 그리고 국가, 민족. 그 윤리마저 상대적일 수 밖에 없는... 이것을 나는 감히 '굴레'라고 규정짓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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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0. 4. 23:44

할머니의 연애시대, 벌리 도허티 도서2007. 10. 4.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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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으로 그저 읽되,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더라...

요즘 나의 독서가 딱 그렇다. 책 속의 루씨가 꿈꾸는 '평등한 사랑'에 대한 그녀의 연애철학(?)에 대해서는 이미 읽는 과정에서 감명받은 바 있어 그 부분을 발췌해서 적어놓은 바 있다. 하지만 대부분의 사랑이 불평등하기 때문에, 그녀의 바램은 그저 최대한 근접해지기를 노력할 뿐, 이상과의 완전한 합일은 불가능하지 않을까 싶다. 양자가 사랑을 함에 있어, 그 합은 결국 '1'이 되겠지만, 나는 그 불균형을 믿고 있다. 루씨의 사랑이 그 시작만을 놓고 이야기하는 것이라면, 그건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그런 경우, 시작에서부터 누군가가 상처를 받아야 하는 일은 적어도 없을 것이다.

청소년 도서라고 해야하나, 청소년 권장도서라고 해야하나.. 어찌되었든 그 대상이 어른보다는 청소년쪽에 더 무게를 두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음에도 이 책을 선택한 이유는 간단하다. 그 대상의 구분이라는 것이 영화에서의 그 구분처럼 다분히 그 표피적인 묘사와 사회 규범을 침범하는 정도를 놓고 가늠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이런저런 잡설과 불필요한 묘사를 버리고, 더 단순하며, 문제의 핵심을 보다 직접적으로 이야기해주는 편이 나에게는 훨씬 더 잘 어울린다 하겠다.

나는 어린 아이의 시각을 좋아한다. 은희경의 '새의 선물', 오쿠다 히데오의 '남쪽으로 튀어' 같은 소설에서처럼 때묻지 않은 시선과의 반가운 만남을 사랑한다. 그 책의 작가가 어른이라는 사실을 잊어버린 채로 책 속의 어린 화자와 만나는 것은 참 즐거운 일이다. 비단 어린 아이의 시각이 아닐지라도, 나의 패이보릿 중 하나인 양귀자의 '희망'처럼 세상을 바라보는 그 누군가의 치기어린 독백도 반갑다.  '할머니의 연애시대'는 말그대로 할머니들의 연애담을 그린 소설로, 작중 화자가 치기어린 시선으로 독백하는 형태는 아니지만, 그 못지 않은 순수함과 엉뚱함이 있다.

어찌보면 내 자신을 보호하고, 연민하는 게 앞서 다른 사람에게 많은 사랑을 주지 못한 나로서는, 책 속의 소녀들이 '사랑을 받는 일'에 왜 그렇게 많은 의미를 부여하는지, 진정 책 속의 그 마음들이 얼마나 현실적인지 깨닫기가 쉽지 않았다. 그들의 선택은 주로 '주는 쪽'보다는 '받는 쪽'이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아픈 마음에 주는 마음을 쉽게 포기하고, 대신 그 아픔에서 빠르게 도피하고자 다른 사랑을 받아들인다. 책 속에서는 그 조합이 할머니 할아버지가 되도록 해로했으니, 이건 해피엔딩이라고 해야할까, 아니면 여기에다가도 '허무'의 법칙을 들이밀어야 할까.


마이클의 사랑

어쩌면 사랑때문에 아픈 자신의 마음만큼 상처받을 루씨의 마음을 헤아리느라 루씨의 사랑을 외면하지 못했던 마이클. 어떤 이들은 상처를 받는 것보다 상처를 주는 쪽이 더 힘들다는 말을 종종 한다. 물론 그 말은 충분히 과장되었지만, 그만큼 힘들다는 말도 거짓은 아닌 듯 싶다. 사랑이 받아들여지지 않을까봐 사랑하지 않는 나약함처럼,  헤어지는게 두려워 사랑을 말아야겠다고도 생각했던 적이 있었던 것 같다.

결론 : 역시 사랑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해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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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