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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에 해당되는 글 176

  1. 2007.12.31 고래, 천명관
  2. 2007.12.30 천명관의 '고래' 중에서
  3. 2007.12.28 토지, 박경리
  4. 2007.11.27 도랑에는 흙탕물이 굽이치며~
  5. 2007.11.22 인형의 집, 입센
2007. 12. 31. 18:01

고래, 천명관 도서2007. 12. 31. 18: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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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미있는 소설을 읽었다. 별 생각없이 그저 흥미롭게 읽어나갔는데, 책 뒷편에 부록처럼 딸려있는 심사위원들의 심사평과 작가 인터뷰에 관한 글을 읽으니 머리가 아파온다. 그저 '재미'를 찾는 평범한 독자의 입장에서는 소화해내기도, 또 이해하기도 어려웠다. 그저, 책을 읽고 난 후기도 마지막까지 나의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던 에필로그를 옮기는 것으로 대신하고자 한다.


에필로그 하나

이후의 이야기는 우리가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다. 대극장의 개관과 개관 기념으로 열렸던 그날의 공연. 정작 공연보다도 극장을 보기 위해 몰려든 수많은 취재기자와 공연에 초대된 문화예술인, 정치가, 연예인 등 유명인사들의 짧은 인터뷰. 기적의 건축술이라는 둥 금세기 최고의 건축물이라는 둥 우리 건축학의 수준에 세계가 놀랐다는 둥 언론의 유난스런 호들갑과 모든 공을 이름없는 한 벽돌공에게 돌린 건축가의 겸손. 그녀가 죽은 지 이미 오래되었지만 이쯤 되면 뭔가 훈장이라도 하나 추서해야 되는게 아닌가 하는 관리들의 관습적인 반응, 훈장을 주긴 주되 산업훈장을 줄 것이냐, 아니면 문화훈장을 줄 것이냐를 두고 벌인 부처간의 논쟁. 뒤이어 쏟아진 벽돌을 주제로 한 수많은 학술회의와 연구논문. 앞서 언급한 '여왕을 찾아서'란 탐사대의 조직과 벌에 쏘여 급하게 병원으로 후송을 했지만 끝내 목숨을 잃은 한 탐사대원. 그의 어미니의 울부짖음. 이윽고 대극장을 지은 모든 원인을 제공한 남북회담. 그러나 호텔 직원이 방을 잘못 배치하는 바람에 극장이 보이는 반대편에 투숙하게 된 북쪽의 특사들, 그래서 실은 아무것도 못 보았다는 믿을 수 없는 후일담. 호텔 직원의 해고와 의전 담당자의 문책. 춘희와 벽돌에 관련된, 봇물처럼 쏟아져나온 서적과 드라마의 제작. 원래는 주인공의 몸무게가 백 킬로그램이 넘지만 스타를 캐스팅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사십팔 킬로그램으로 줄여야 했던 방송작가의 고민. 여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벽돌보다는 도자기가 더 예쁘지 않느냐고 해서 할 수 없이 춘희를 도자기를 굽는 주인공으로 바꿔야 했던 대대적인 윤색작업. 다시 이름이 촌스럽게 춘희가 뭐냐고 해서 마지못해 주인공의 이름을 애니로 바꿔야 했던 대대적인 수정작업. 남자 주인공을 맡은 배우가, 직업이 씨팔, 가오 상하게 트럭 운전사가 뭐냐고 해서 어쩔 수 없이 다시 제벌 2세 사업가로 바꾼 대대적인 밤샘작업. 그렇게 해서 결정된 사십팔 킬로그램의 가난한 도예과 여대생과 제벌 2세의 신분의 벽을 뛰어넘는 슬픈 로맨스. 시청률과 대중성의 법칙. 이미 예정된 드라마의 대히트와 대중들의 무의미한 눈물.....

'유쾌한 하녀 마리사'처럼 정말 아무생각없이 재미있게 읽은 소설이다. 비유와 묘사와 같은 표현력이 때론 너무 기가막혀 미처 따라가지 못하는 스스로가 안타까울 지경이었다. 소설은 소설만의 색깔이 있는 것 같다. 도무지 영화로도, 만화로도 각색될 수 없는 소설 그것만의 희열이랄까.

작가의 수상소감평도 동시에 싣고자 했으나, 책이 수중에 없는 관계로 없던 일로. 책은 '철가면'에게로 넘어갓다. 그 책이 그곳에서 다 읽힐 수 있을지 다소 걱정이 되는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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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2. 30. 00:54

천명관의 '고래' 중에서 도서2007. 12. 30. 00:54

곧 미사일론에 대한 반박이 뒤따랐다. 전쟁을 겪어보지도 않은 노파가 어떻게 미사일을 아느냐는 거였다. 귀신이기 때문에 모르는 게 없다는 해명에 대해 귀신 씨나락 까먹는 소리 하지 말라는 반박이 나왔으며, 뒤이어 어따 대고 선배 앞에서 그따위 개소리를 하느냐는 성명이 발표되자, 너 대학 어디 나왔냐는 질문이 나왔고, 이 씹새야 어딜 나온 게 무슨 상관이냐는 반론이 제기되자, 저 새끼, 싸가지 없는 건 학교 다닐때부터 알아봤다는 인물평과, 저 새끼는 학계에서 완전히 매장시켜버려야 된다는 매장론이 뒤따랐으며, 선배 무시하다 뒈지게 맞고 피똥 싼 놈 많다는 협박과, 누군 씹할 고스톱 쳐서 학위 딴지 아냐는 고스톱 학위론, 그럼 씹쌕꺄, 미사일이 아니면 도대체 뭐냐, 뭐긴 뭐야, 색꺄, 니 애비 좆이라니까, 라는 식으로 반박이 줄줄이 이어지며 논쟁은 점점 진흙탕 싸움으로 변질되어 갔다. 이후에도 불기둥 논쟁, 남쪽 논쟁, 검불 논쟁 등 논쟁의 범위가 점차 확대되어 공수논쟁은 그해가 다 가도록 끝도 없이 지루하게 이어졌다.


- 천명관의 '고래' 중에서 -


원혼을 달래려는 굿을 하다가 무당이 내뱉은 공수를 두고 두 학파가 벌이는 논쟁의 마지막을 묘사하고 있는 장면이다. 두 학파의 주장도 주장이지만, 해답이 없는 일견 소모적인 논쟁에 항상 뒤따르는 '개판'의 모습을 참으로 인상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토지를 다 읽기를 기다렸다가 부푼 기대를 안고 집어든 책이다. 이미 한달 전쯤 구매를 했고, 회사에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었다. 이미 '유쾌한 하녀 마리사'라는 책을 재미있게 읽었기 때문에, '고래'에서도 비슷한 즐거움을 찾을 수 있을 것이라 기대했다.

아직 책의 중반부를 읽고 있다. 읽다가 너무도 재미있는 부분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남겨둔다. 이런 걸 두고 무어라 해야할지. 현실에 대한 기가막힌 풍자와 해학이라고 해야할까. 참 글을 잘 쓰는 작가라는 생각이 든다. 특히나 '~의 법칙이었다'로 되풀이되는 화법은 알게모르게 중독성이 있다.

남은 이야기는 책을 다 읽고 난 후에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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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2. 28. 17:59

토지, 박경리 도서2007. 12. 28. 17: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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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어렸을때부터 책을 많이 읽어야겠다는 다짐은 항상 어떤 이유도 없이 '작심삼일'이 되는 경우가 많았다. 가장 큰 이유는 역시 '흥미'라고 생각한다. 책을 읽는다는 것은 '공부'하는 것과는 다른 일인데, 책임을 느끼다 보니 그것이 저절로 '어쩔 수 없이 해야 하는 일'로 둔갑해버린 것이다. 나에게 있어 그 정점에 있었던 책이 바로 '토지'이다.

독서라는 것은 가끔 주어진 자유시간을 투자해서 힘겹게 얻을 수 있는, 일면 '기회비용이 드는' 일이다. 그런 점에서 '토지'는 많은 기회비용을 들이고 얻은 값진 수확이기도 하다. 어떻게 보면, 흥미와 재미보다도 우리나라 대하소설의 최고봉에 있는 작품이라는 이유로 마냥 붙잡고 있었다.

토지를 다 읽어서 굉장히 뿌듯한 마음이지만, 더불어 스스로가 일면 대견스러운 면도 있지만, 고등학교때 보았던 태백산맥이나 아리랑에서 받은 감동과 희열은 없다는 것이 다소 안타까운 점이다. 시간이 많이 흐르기도 했지만, 짧은 시간 집중해서 책에 몰입하지 못했다는 점도 하나의 이유가 될 것이다. 한편으로 작가에게 전적으로 의지하며 책의 내용을 잘 흡수하는 성실한 독자가 아닌 책의 스토리와 구성이 마음에 들지 않을라 치면 바로 토라져버리는 변덕스러운 독자가 되었기 때문이기도 하다.

재미있었냐고 묻는다면, 흔쾌히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그냥 좋은 작품이었고, 읽고 나니 괜찮으며, 박경리라는 작가분이 참 대단하다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언정. 읽고 있을때는 지루할 때도 많았고, 특히나 스토리의 전개 면에서 작가의 의도를 십분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도 많았다. 어떤 경우에는 표현이 너무 어려워서 작중 화자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경우도 있었다. 그런 경우엔 십중팔구 '지루한 독서'로 이어졌고, 더디게 진도가 나가기 마련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스스로를 불성실하고, 위대한 작가의 문학적 소양을 충분히 이해해내지 못하는 무능력한 독자로 규정짓고, 훗날 역작 '토지'를 다시한번 독파하리라 마음먹고 있다. 물론 가까운 시일은 아니겠지만, 마음의 여유가 생기는 그날, 난 토지 전권을 구입하고, 소장하며, 다시 읽고 그리곤, '토지의 위대함'에 대해서 여기저기 침이 마르도록 칭찬하고 다닐 것이다. 기억도 잘 나지 않는 아리랑과 태백산맥이라는 소설의 감동이 그 당시의 몇배로 부풀어져 있는 것과 비슷하다면 비슷하달까.  

토지를 읽고 참 하고싶은 말이 많을줄 알았는데, 그냥 담담한 마음이다. 무엇보다 홀가분하고 마음에 먹었던 다른 책들을 읽을 수 있다는 것이 무엇보다 반갑다. 다른 하고 싶은 일이 참 많지만, 책읽기를 소홀히 하지 말아야겠다. 더불어 분야와 장르도 좀 확대해 나가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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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1. 27. 23:40

도랑에는 흙탕물이 굽이치며~ 도서2007. 11. 27. 23:40

두 사람은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장대비가 내리꽂히더니 그새 물이 불어나서 도랑에는 흙탕물이 굽이치며 콸콸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들판은 선명하고 쾌적한 푸른빛으로 전개되어 연신 부슬비에 젖고 있었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박경리의 [토지 5부] 중에서

올해 안에 토지를 모두 읽겠다는 나의 약속은 착실히 다행히도 이행되고 있다. 마지막 달에 충분히 한눈을 팔아도 넉넉한 시간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문득 책을 읽다 보면 별 다를 것이 없는 구절에 퍼뜩 하고 흐리멍텅한 정신이 맑아질 때가 있다. 위의 구절도 나에게는 그런 경우이다. 사실 토지를 읽다보면, 작가의 이런저런 묘사가 머리에서 잘 그려지지 않을때가 많다. 작가의 표현이 머리속에서 잘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인지, 책을 읽을때 여유가 사라지는 것인지.

그런데 마치 동화를 보는 것처럼, 영상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속에서 그려졌다.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장대비가 내리고, 그래서 도랑의 흙탕물이 굽이치는 모습... 그것은 아마도 기억속 아득한 내 어린시절의 한 장면이다. 내가 살던 곳도, 아버지를 따라 나서 노닐던 곳들도, 큰 아버지와 친척 형 누나들이 살던 곳도 모두 책 속의 그 도랑의 흙탕물이 굽이치던 곳들이었다. 작가가 비유한 '쾌적한 푸른빛'의 그 세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너무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읽은 구절을 마음 속에 꼭꼭 담아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해두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집에 와서 다시 그 구절을 읽다보니 뒤따라오는 작품 속 '한복'의 대사가 어른거려 같이 실었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나는 숨이 턱턱 막히던 그 가을의 밤들로부터 먼 길을 떠나왔다. 그저 남들과는 다른 슬픔 하나로 이 세상 모든 아픔을 품은 사람처럼 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산다는 게 숨이 막히진 않아, 그저 살다보면 숨막히는 날들이 찾아올 뿐이지. 그저 숨을 꾹 참고 있으면, 그런 날들은 어느새 떠나버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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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7. 11. 22. 17:58

인형의 집, 입센 도서2007. 11. 22. 17: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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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느때의 예비군훈련날 아침처럼 나는 일어나자마자 동생방과 내 방을 넘나들며 조그마한 포켓 서적을 찾고 있었다. 예비군 훈련때의 오랜 대기 시간과 휴식 시간을 감안하면, 그 무료함을 달래줄 무언가가 필요하기 때문이었다. 특히나 올해 정규 예비군훈련 3일동안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남다른 감회에 젖었던 것을 돌이켜보면, 훈련교장에서의 독서는 나름대로의 가치가 있었다. 그 시간을 불필요하게 허비하지 않는다는 뿌듯함과 함께.

이번에 선택한 책은 입센의 '인형의 집'이었다. 하루밖에 되지 않는 훈련이었기 때문에, 될 수 있으면 빨리 읽을 수 있는 책이 필요했고, 그런 점에서 희곡 형식을 띄고 있는 '인형의 집'이 제격이었다. 이미 과거에 읽은 경험이 있지만, 이미 그 디렉토리는 내 머리속의 하드디스크에서 사라진지 오래이다. 책과 영화, 무엇이든 어떤 시기에 작품을 읽느냐에 따라 그것은 거의 다른 작품이나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단편도 아닌 장편도 아닌 중편 정도의 읽기에 적당한 분량의 희곡 작품이다.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을때처럼, 고전 작품에게서 느껴지는 분명한 주제의식, 인간내면의 갈등의 분명한 대립 등이 느껴졌다. 현대소설이 가지는 모호함이나 불분명한 주제 의식과는 뚜렷한 차이를 가지고 있다. 물론 그것은 나만의 주관적인 생각이고, 작품들마다 그러한 구분에 반하는 경우도 많이 있을 것이다.

예전 같으면 '인형의 집'의 제목이 어떤 연유에서 지어졌는지 한번쯤은 생각해 보았을텐데, 요즘엔 그런 책의 제목 쯤은 생각해보지도 않는 스스로에 대해서 놀랐다. 더불어 책을 읽고 나서 그 내용과 주제를 일목요연하게 다른 사람에게 전달해내지 못한다는 것을 확인했을때도 스스로에게 실망스러웠다. 과거 같으면 책을 많이 읽지 못할지언정 독서 후의 사색이나 감상 등 나름 나만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듯도 한데. 단순해져 가고 있고, '바보상자'가 되어가는 스스로가 일면 반갑지만, 그럼으로써 잃어가는 것들도 있는 모양이다.

네이버의 백과사전을 읽고 나서야 책이 독자에게 이야기하고 싶은 내용과 내 머리 속에서 모호하게 맴돌던 생각들이 잘 정리가 되었다. 백과사전에 잘 정리가 되어서 나와 있다고 보는 편이 옳았다. 독서 후 '진정한 행복과 사랑이란 무엇인가' 쯤으로 책의 내용을 축약해내었던 나였다. 요즘 간간히 언론을 통해서 들리는 '황혼의 이혼'처럼 '행복'이라고 믿고 사는 일상과 삶 속에서 어느 순간, 어느 계기를 통해서 갑자기 믿어왔던 '행복'과 '사랑'에 회의를 갖게 되는 이야기처럼. 그러한 급작스러운 각성(?)은 정녕 당사자의 삶에 약이 될지, 독이 될지... 왠지 '눈가리고 아웅'일수도 있지만, 그러한 회의보다는 '믿고 싶은 행복'이 꾸준히 지속되기를 바라고 싶은 마음이다.

더불어, 이 책이 당시의 여성 해방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작품이라는 것은 몰랐다. 당시만 해도 한 가정에 국한되어 아내와 어머니의 역할이 사회적으로 요구되었던 여성들에게 그러한 사회적 굴레를 거부하고, 가정을 뛰쳐나가 개인의 진정한 행복을 추구하는 여성상은 꽤나 충격적인 소재였던 모양이다. 일견 공감이 간다. 페미니즘을 특별히 지지하는 건 아니지만, 작품 속에서 보여주었던 남편의 의식구조나 선입견 등을 감안하면, 노라의 대응과 반응은 당연하면서도 한편으로 통쾌하기도 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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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