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력

3

« 2025/3 »

  • 1
  • 2
  • 3
  • 4
  • 5
  • 6
  • 7
  • 8
  • 9
  • 10
  • 11
  • 12
  • 13
  • 14
  • 15
  • 16
  • 17
  • 18
  • 19
  • 20
  • 21
  • 22
  • 23
  • 24
  • 25
  • 26
  • 27
  • 28
  • 29
  • 30
  • 31

사용자 삽입 이미지
1편 조광조 편에 유림 2편 공자편. 지금 3권을 읽고 있지만, 아직 공자의 이야기가 채 끝나지는 않았다. 친구 녀석의 말처럼 조광조의 시대보다도 역사적 사료가 부족해 작가가 이야기를 전개하고 자료를 찾는데 더 어려움이 많았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친구와 논쟁의 씨앗을 제공한 문제의 유림 2편이었다. 공자의 외교력을 뒷받침하는 일례를 재구성해서 보여준다는 작가의 의도가 내게는 너무도 허무맹랑한 스토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처럼 들려져 문제를 제기했다.

우리가 책을 읽으면서 얻는 것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 그런 하나하나에 득실을 따진다면, 너무 계산적이라는 비판이 따를 수도 있겠지만, 양서라고 한다면 어떤 점에서는 독자의 구독목적에 부합한다거나 이런저런 이유로 독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지론이다.

그런 점에서 유림2편을 읽으면서 내가 얻을 수 있었던 것은 무엇일까.

1. 유학의 시초이자 동양철학의 위대한 성인으로 일컬어지는 공자의 생애와 사상
2. 여러 고사성어의 유래, 그리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역사 지식
3. 가벼운 구성과 쉽게 읽혀나가는 문체를 통한 독서의 재미

3가지 정도를 들 수 있겠다. 작가가 이야기하는 유학의 이념을 통해 현대 사회의 문제를 재조명하는 것과 같은 거창한 취지에 문자 그대로 동의하는 바는 아니다. 물론 그 취지를 이해는 한다. 다만 '내 사랑하는 조선 민족들에게 불행을 극복하기 위해서 이 글을 바치려' 한다는 작가 최인호의 집필 이유는 다소 요란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공자가 워낙 고대의 인물이고, 그의 학문인 유학이라는 것이 인간의 '정신세계'를 지배하기엔 다소 한계가 있을 수 밖에 없다는 점에서, 작가의 저 바램이 만일 본심이라고 한다면, 그의 욕심은 당시의 공자가 받은 비판을 똑같이 되받을 수밖에 없다. 과도한 형식과 명분 자체만으로 사람들의 의식을 바꾸고, 요즘 사회 전반에 다양하게 펼쳐져 있는 문제들을 해결 할 수 없다. 공자는 2500년전에도 그 당시 사회로부터 '비현실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즉, 불행의 극복이라는 것이 사회를 구성하는 개개인의 높은 '도덕성'을 요구하는 일이라면, '도덕성'의 사회를 만드는데 있어 효과적이고 구체적인 대안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사회는 그러한 '도덕성' 측면에서 역행하고 있다. 큰일을 하기 위해서는 똑똑해야 한다는 사실은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하면 똑똑해지는지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해답이 없다. 태어날때부터 그랬다고 해도 무방할지도 모르겠다. 그런 이야기처럼 불행의 극복을 위해 필요한 것은 유학에서 이야기는 '군자의 길'이나 그 길에 이르는 것에 대한 구체적인 해답은 없다. 그러한 도덕성을 갖추는 인간의 성정이 타고난 것이라면 또 할 말이 없는 것이다.

이문열 삼국지를 읽을 때 그런 느낌이었을까. 공자편에서는 작가의 주관적인 해석이 많이 뒤따랐다. 사서에 나와있는 공자의 말 한마디를 가지고, 공자가 그런 표현을 통해서 어떤 이야기를 하고 싶었을 것이다... 라는 식으로. 게 중에는 다분히 억지스러운 부분도 있었고, 어떤 부분에서는 자연스럽게 이해가 되기도 했다. 더불어 공자의 일화와 사상은 자주 예수와 부처와 비교가 되곤 한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예수의 일대기와 부처의 일대기에 대한 관심이 생긴다. 다음에 읽어보아야 할 책들이다.

이제, 퇴계 이황에게로 가보자!

:
Posted by retriever
2008. 1. 6. 18:05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알랭드 보통 도서2008. 1. 6. 18:05

사용자 삽입 이미지

어구란에 두편에 걸쳐 책에 나오는 명문들을 옮겨 놨지만, 만일 본대로 느낀대로 다 옮겨 놨다면 10페이지라도 부족했을 것이다. 사랑 이야기치고는 다소 어려운 문체와 철학이야기, 다분히 주관적인 관점에서의 번역의 미숙(?) 때문에 크게 책 내용에 공감을 하지 못한채 시작을 했지만, 시작은 미미했으나 그 끝은 성대했다. 책의 절반을 읽고서야 책을 읽는 나의 태도가, 이건 책의 내용을 공감하려고 하는 의지를 갖지 못한 채 하루빨리 책을 덮고 다른 책을 읽고 싶어하는 마음이 앞서 있는 태도가 틀렸다고 판단되어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차분히 정독을 했다. 비로소 정독을 한 후에야 책이 가진 진정한 가치를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역자의 말처럼 사랑이라는 보편적인 정서를 주제로 색다른 관점으로 재해석하며, 때로는 아주 심오한 철학의 내용을 들이밀고, 어떨때는 모두가 공감할 수 있을만한 심리학 이론 정도를 끌어다 들이며 독자의 흥미를 유발해내는 재치있는 문체를 통해, 책의 가치를 높였다. 특히나 이 책을 쓴 작가가 25세때 처음 출판한 책이라고 하니, 그보다 나이를 훌쩍 더먹은 독자의 입장에서, 놀라지 않을 수 없다.

반면, 문득 책의 내용도 그렇고, 극 중의 화자도 그렇지만, 남성의 관점에 치우친 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물론 내가 여성의 관점은 잘 모르기 때문에, 얼마나 극중 화자의 심리가 여성에게도 적용이 되는지, 또 한편으로 더 나아가면 어느 정도의 남성에게 보편적으로 공감을 받을 수 있는지도 희박하기는 마찬가지다. 하지만 처음 사랑에 빠지게 되는 동기, 즉 '무지에서 오는 가벼운 떨림'은 성별에 따라, 사람마다, 나이에 따라, 상황에 따라 여러가지 변수가 많이 있는 부분이 아닌가 싶었다. 시간이 갈수록 사랑을 대하는 남녀의 태도가 사뭇 다른다는 것을 느끼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은 다분히 느낌 그 차제일 뿐이며, 그것이 보편성에 어필할 수 있다는 주관적인 판단에 따른 것이다.

책을 읽은 느낌을 제멋대로 끄적이는 것보다, 책에 있는 좋은 이야기들을 '어구'란에 좀더 가져다놓는 것이 더 유익한 일이 되지 않을까 싶다. 더불어, 알랭드 보통이라는 작가의 문체와 철학적인 접근 방법 등은 상당히 관심을 불러일으키는지라, 그의 다른 책, 이를테면 '여행의 기술'과 같은 책들을 읽어보고 싶다.

:
Posted by retriever

라이트모티브 : 악극에서 되풀이되어 나타나는 중심 악상

"너 또 길 잃은 고아 같은 표정을 짓고 있네"

전에는 아무도 내 표정을 그렇게 부른 적이 없었지만, 클로이가 말하는 순간 갑자기 그 말이 그때까지 내가 느끼던 혼란스러운 슬픔에 딱 들어맞는 표현이 되면서, 내 우울도 조금은 덜어지는 듯 했다. 나는 그 말 때문에, 내가 스스로 정리할 수 없었던 느낌을 그녀가 알고 있다는 것 때문에, 그녀가 기꺼이 내 세계로 들어와 나 대신 그것을 객관화해주었기 때문에, 그녀에게 강렬한 [그리고 어쩌면 균형이 잡히지 않은] 사랑을 느꼈다. 고아에게 고아라고 일깨워 줌으로써, 집으로 돌려보내주는 것에 대한 고마움이었다.

스탕달 : 혼자서는 절대 성격이 형성되지 않는다.

자아는 아메바에 비유할 수 있다. 아메바의 외벽은 탄력이 있어서 환경에 적응한다. 그렇다고 아메바에게 크기가 없다는 말은 아니다. 단지 자기 규정적인 형태가 없을 뿐이다........ 누가 나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면, 나는 계속 농담을 할 가능성이 높다.

:
Posted by retriever

사용자 삽입 이미지
정상명이 강추에 강추, 강추를 거듭해서 6권을 통째로 구입한 책. 역사에 대한 지식이 원채 얇은데다가 또 채우는데로 어디인지 모르게 자꾸만 사라져가 빈약하기에 읽고 싶은 책이었다. 특히나 정상명이 '조광조'에 대해서는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과 감탄을 거듭했기에 유림 1권에 대한 기대는 무척이나 컸다. 결과적으로 '항상 큰 기대는 큰 실망을 낳는 법'이지만, 결코 실망하진 않았다. 토지 완독 이후 고래와 유림으로 이어지는 나의 독서행로에는 거침이 없다. 그만큼 고래의 천명관 작가님과 유림의 최인호 작가님이 뛰어난, 그리고 감칠맛 나는 이야기꾼이기 때문이리라. 고래는 허황된 스토리 답게 '허구적인 소설' 나름대로, 또 유림 1편 조광조편은 역사적 사실에 기반한 역사소설로서, 독특한 매력을 갖추고 있었다. 다만 책에서 말하는 것 이상으로 '이성'을 잃고 날뛰는(?) 정상명을 진정시키기 위해서 책을 읽고 다분히 객관적으로 그의 열기를 좀 진정시켜 주었을뿐ㅎ

유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사상으로 꼽는 '왕도정치'를 현실정치에 적용하려고 애썼던 조선시대 불세출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조광조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유림 1편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기묘사화의 희생량으로서 자신의 37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또한 짧은 4년의 정치생명을 그만둘때까지 조광조는 그야말로 주어진 짧은 시간에 그 누구보다 굵은 삶을 살았다.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빠르게 자신의 권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에 맞서 자신의 정치 이념을 마음껏 펼쳐나갔다. 거의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고, 세력의 기반을 완전히 다질 무렵, 그만 반대파인 훈구파의 모략과 중종의 변심이 맞물려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들이 '일장춘몽'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상명이 '조광조'의 그 높은 뜻을 훌륭히 기리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 역시 그 누구보다 현실정치인으로서 그의 실책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정상명과의 긴 통화에서도 느닷없이 '그릇론'이 튀어나왔지만, 이념과 사상은 '영웅'이 되기 위한 자질에 불과할 뿐이다. 무릇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현실정치력도 필요하고, 인화력도 더없이 중요하고, 이런저런 부수적인 문제들을 잘 조율해내는 능력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이퇴계와 이율곡이 훗날 지적한 것처럼, 성급하고 너무 급진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준 셈이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은 인화력인데, 강력한 카리스마든 아니면 겸손의 자세든 결과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묶고, 통일시키고,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은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물론 조광조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권세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초심의 겸손한 마음을 잊고 혹시나 자만하고, 거만해져 주위를 돌아보는데 소홀해지지 않았나 싶어서다. 책 중간중간 그런 뉘앙스의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갓바치가 조광조에게 마지막에 흰신발과 검은신발, 즉 짝짝신발을 선물하면서 적어준 구절 중

'천년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이 부분의 경우 작가는 검은 신과 흰 신을 진보와 보수에 빗대면서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검은 신이든 흰 신이든 상관없다. 몸에 잘 맞아 편안한 신발이면 좋은 신발인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도 일견 정치 사상이자 이념일텐데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좋은 것이면 다 좋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그 예를 들며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들었다. 즉 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야말로 좋은 고양이인 것이다. 실용주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조광조의 '왕도정치 시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그를 '훌륭한 정치가'로 칭하며 마무리를 짓고 있다. 요즘에도 선분배 후성장이니, 선성장 후분배니 또는 성장위주니 복지위주니 등등 하면서 말그대로 여러갈래의 정치이념과 철학이 있다. 물론 '왕도정치'의 이념은 그러한 세부적인 노선 및 전략보다 높은 수준의 이념이겠지만, 무조건 쥐를 잘 잡아야 좋은 고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방법론'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진보와 보수를 너무 구분하지 말고, 잘 융합해서 잘 살자는 의미겠지만, 막연한 이야기일 뿐이고.

더불어, 검은 신과 흰 신을 이념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다르게 규정지어 볼 수도 있다. 무릇 흰 것과 검은 것이라고 한다면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깨끗함과 더러움으로 인식이 된다. 천년 세월이라 하면 굉장히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도 더러운 신은 더럽게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정치가 결코 깨끗해지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조광조가 가진 높은 뜻도 결국은 검은 색이 하얗게 될 수 없듯, 현실정치의 벽에 부딛힐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귀결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

:
Posted by retriever
2008. 1. 1. 17:26

유림 1편 - 왕도에 이르는 길 中에서 도서2008. 1. 1. 17:26

ㅇ 간디의 '일곱 가지 사회적인 죄' in [젊은 인도]

국가가 멸망할 때 나타나는 일곱가지 징조

원칙없는 정치, 노동없는 부, 양심없는 쾌락, 인격없는 교육, 도덕없는 경제, 인간성없는 과학, 희생없는 신앙.

ㅇ 그것은 일찍 조광조가 대사헌으로 있을 때, 동년 진사중 아내와 화합치 못한 사람이 있어 그가 아내를 버리려고 하면서 사람을 보내어 조광조에게 칠거지악에 의지하여 그 의견을 물었던 적이 있었다. 칠거지악이란 유교에서 이르던 아내를 버릴 수 있는 7가지 경우, 즉 '시부모에게 불손한 경우', '자식을 낳지 못하는 경우', '음탕한 경우', '질투하는 경우', '나쁜 병이 있는 경우', '말 많은 경우', '도둑질한 경우'를 가리킴인데, 조광조는 뛰어난 유학자이면서도 아내를 버리려 하는 동료에게 꾸짖어 말하였던 것이다.

"부부는 인륜이 비롯되는 곳이며, 만복의 근원이라 관계가 지극히 중하다. 부인의 본성이 어둡고 자각이 없어 허물이 있다 하더라도 남편된 자가 마땅히 바르게 다스려나가 기어이 감화케 해서 함께 가도를 이룩하는 것이 후덕한 일이다. 만일 거느리는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급히 버리려 한다면 천박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하물며 이 일은 가정 안의 일이라 외인이 감히 의논할 일이 못되는 것이니 자기가 잘 생각해서 처리함이 옳을 것이다."

ㅇ 유가에서 가장 이상적인 성천자(聖天子)로 추앙받는 문왕이 남긴 그 유명한 세가지 유언은 다음과 같다.

첫째, 좋은 일을 보면 게을리 하지 말고 즉시 가서 행해야 한다.
둘째, 기회가 오면 머뭇거리지 말고 재빨리 잡아야 한다.
셋째, 나쁜 일을 보면 급히 피해야 한다.

ㅇ 공자가 말하는 군자와 소인의 차이 : 군자는 의로움에 밝고 소인은 이로움에 밝다.

ㅇ 채근담의 명언
권세에 가까이 하지 않는 사람은 깨끗하다.
권세에 가까이 할지라도 물들지 않은 사람은 더욱 깨끗하다.
권모와 술수를 모르는 사람을 높다 하나 알아도 이를 쓰지 않는 사람을 더 높다 할 것이다.

ㅇ 프랑스의 철학자 루소 : 도시는 인류의 쓰레기 하치장이다.
ㅇ 관중 : 나를 낳아준 사람은 부모이지만, 나를 알아준 사람은 포숙아이다.
ㅇ 보들레르 : 이승은 짧다. 무덤은 기다린다. 무덤은 배고프다.

 

:
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