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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19. 14:08

도가니, 공지영 도서2009. 8. 19. 14:08

그 명성은 익히 들어 왔으나, 공지영 작가님의 글은 읽어본 적이 없다. 다소 독특한 인생 역정 덕분에 괜히 꺼려지는 선입견을 갖기도 했다. 그 인생 역정이 내가 이해못할 수준은 아니나, 내가 지향하는 바는 분명 아니기에 그녀의 저서에 어떤 생각이 녹아 있을지 다소 걱정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경험해보지도 않은 사실을 두고 점점 스스로 안에서 확신을 더해가는 객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작가는 실제 뉴스의 한 기사이기도 했던 씁쓸한 우리네 이야기를 다루었지만, 이 작품을 읽는 것으로 왠지 작가의 삶을 이해할 것도 같았다.

글을 쓰기 위해서 피해자들을 만나고, 관련자들을 만나면서 가졌던 여러 심정과 고충을 작가는 소설의 말미에 담았다. 불쌍하고 어려운 환경에 처한 사람들을 향한 인간의 동정은 보편적인 감정이라고 확신한다. 그것을 외면하지 않고 부조리한 현실을 소설로 재구성해서 세상에 펼쳐준 작가에게 감사하다. 때로는 분개하고, 때로는 체념하며, 종종 작품 속 주인공들과 같이 고민하면서 읽었다. 답을 몰라서 갈팡질팡하는 것보다 답을 알면서도 실천하지 못하는 고통이 더하다. 우리는 언제나 현실과 이상의 사이에서 고민하고, 집단과 개인 사이에서 번민하며, 도전과 안주 사이에서 심란해한다. 작가는 지극한 해피엔딩의 식상한 마무리를 피하는 반면, 너무도 당연하게만 배워왔던 보편적 가치들이 현실의 장벽과 나약한 심성 앞에서 갈길을 잃고 허둥대는 모습을 꾸밈없이 보여주었다. 

부조리한 현실과 신의 버림을 받은 것만 같은 암울한 이야기를 놓고, '희망'을 논하는 비평가들의 속내는 무엇일까. 아마도 과도한 욕심을 부리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우리들의 현실에서 따뜻한 마음이 여기저기 전이되고 있음을 보여주었다. 비참한 현실과 야속한 세태를 굳이 부정하지 않고 인정하면서도. 

블로그를 돌아다니다 '세계관의 상실'이라는 말이 눈에 들어왔다. 과거와 달리 현대인들은 정보의 홍수와 현실의 치열함 속에서 보편적 가치에 대한 자신만의 주관을 상실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발달된 의식과 철두철미한 다양한 이론, 단단히 무장한 자본주의의 무차별 공격은 우리들 개개인이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가를 판단하려고 들때, 어김없이 찾아와 그 감각을 마비시키고 만다. 안타깝게도 자신만의 세계관을 갖고, 그 강인한 신념과 의지를 불태우는 사람은 '극단적'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배척받고 만다. 우리가 옳다고 생각하는 가치엔 당연히 올-인 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 객관적인 시각은 당연히 중용을 의미하고, 그 중용은 당연히 사람들이 가지는 다양한 생각의 중간점을 의미한다고 여겨지는 시대이다. 인류의 보편적 가치에 당연히 O라고 이야기해야만 하는 이 시대에 X도 인정해야 한다고 외치는 부류들이 있다. 그들의 힘이 결국 '시대 정신'을 반영하기도 한다. 

최근에 대화를 나누는 중에, 나는 지금 나의 시기를 '제2의 사춘기'라고 규정하기도 했다. '삶'에 대한 가장 근원적인 물음에서부터 나는 다시 해답을 찾아야만 할 것 같다. 왜 사는지, 무엇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하는지, 역사가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치는 우리의 삶에 어느 정도 반영해야만 하는건지... 모든 것들이 복잡하게 머리 속에서 맴돌다가 이내 결론을 내리지 못한다. 나 자신을 사랑하는 것과 다른 사람을 배려하는 것이 서로 얼마나 상대적인 개념인지, 딜레마에 빠졌을 때 우리가 가장 수호해야 할 중요한 가치는 무엇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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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8. 17. 08:51

불안, 알랭 드 보통 도서2009. 8. 17. 08:51

사랑의 심리학과 철학을 절묘하게 조합한 알랭 드 보통의 두편의 책을 읽은 바가 있다. 나는 왜 너를 사랑하는가, 그리고 우리는 사랑일까. 앞서 두권의 책에 공감하는 바가 적지 않아 또다시 알랭 드 보통의 책을 선택하게 되었다. 이번엔 사랑이 아니었다. 사회가 발전해감에 따라 오히려 가중되는 현대인들의 '불안'한 심리를 사회적, 심리적 관점에서 관찰했다. 전체적으로 공감가는 내용들도 많이 있었지만, 사랑을 주제로 담은 책들보다는 색다른 면이 별로 없어 다소 지루함도 느껴졌다. 사랑이라는 감정은 다분히 '개인적'인 면이 적지 않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는 보통 '왜?'라는 질문을 던지고 그에 대한 해답을 철학과 심리학에서 찾는다. 단지 '사랑'에 관한 이야기라면 그 질문에 대해 독특하지만 일면 일리있는 관점의 해답을 제시하면, 나머지 선택의 몫은 독자 및 행위자에게 있다. 자고로, 인류의 역사를 털어봐도 '왜?'라는 질문만큼 쉬운 것도 없다. 그 원인의 분석은 각양각색이고, 또 수학처럼 명확한 정답을 소유한 것도 아니기에 누구나가 그 의견을 개진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사랑'은 그에 아주 적격인 먹이감이다. 

하지만 아무리 심리학적인 문제에 대해 접근했다고 하더라도 사회적인 이슈를 언급하는 것이라면 원인의 분석에서 더 나아가 해결책에 대한 고민도 병행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시대에 따라, 또 문화에 따라 사람들이 '불안'한 심리를 갖게 되는 이유를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 것은 좋으나 그것이 자신의 일은 아니라는 듯이 멀리 떨어져서 조망하는 것이 아니라 좀더 치열하게 해부하고 또 치료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아쉬움이 있었다. 그것은 마치 이 세상에 옳고 그르다는 분별은 모두 틀린 것이며, 그것은 시대적, 문화적 환경에 따라 변하는 것이다, 라고 주장하는 것처럼 들린다. 우리들의 미래를 품 안에서 내어 놓고 그저 럭비공처럼 어디로 튀어가는지 지켜볼 뿐이다. 예를 들면, '평등'의 개념에 대한 가치 판단을 제쳐주고, 단지 '인간은 평등'해야 한다는 사조의 등장으로 인간의 불안은 가중된 것이라고 결론지을 뿐이다. '평등'의 당위성에 대한 판단을 유보하고 있기 때문에 질문은 언제나 '어떻게'가 아닌 '왜'에 그칠 뿐이다.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불안'해 하는 사람들은 에리히 프롬이 제시하는 '자유로부터 도피'하는 사람들을 연상시킨다. 톱니바퀴의 톱니가 되어 살아가는 현대인들은 '자유'를 두려워한다. 그것은 곧 알랭 드 보통의 책에서 말하는 '지위'의 상실을 의미한다. '지위'가 상실되면 '대접'받지 못한다는 두려움 때문에 '불안'에 시달리게 되는 것이다. 그게 너무도 당연한 듯이 교육받고, 또 길들여진다. 우리가 좀 더 '우리만의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사회가 재단하는 '지위'에서 자유로워지고, 마음의 소리에 귀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더 불행해지고 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흔히 과거에는 생각지 못했던 일들을 고민해야 하고, 자유와 평등이라는 개념 때문에 현대인들이 '혼란'에 빠지고 있다고는 하나 그것은 바람직한 방향이다. 어쩌면 '국부론'의 저자 아담 스미스의 말처럼 개인이 모두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만 산다고 해도 사회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서 균형을 잡을 수 있다. 더불어 '보이지 않는 손'만으로 해결되지 못하는 부분들은, 여러 가지 법과 제도를 통해서 안전 장치를 마련하고, 도덕과 규범을 통해서 더욱 심혈을 기울여야 한다. '더 많은 사람들이 행복해지는 그날까지'라는 말은 모호할 뿐이다. 오랜 역사를 통해서 어느 시대에 가장 다수의 사람들이 행복했다고 단정지을 순 없기 때문이다. 다만 분명한 것은 오랜 시간 동안 인간은 보다 더 자유로워지고, 보다 선택의 폭이 넓어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끊임없이 그 선택을 거듭하되, 법과 제도를 통해서 지속적으로 '공동체의 질서'를 위해 '욕구'를 조율해 나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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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8. 12. 09:10

원미동 사람들, 양귀자 도서2009. 8. 12. 09:10

누군가 내게 가장 재미있었던 소설을 떠올리라고 하면 아직까지도 나는 양귀자 선생님의 '희망'을 그 으뜸 중에 하나로 손꼽을 것이다. '아리랑'이나 '태백산맥'을 낳은 조정래 선생님에게서 느끼는 그 방대함, 그 역량과 문체에 대한 경외감과는 다른, 읽는 동안 입가에 웃음을 머금고 종종 폭소하며 즐겁게 읽었던 책 중에 하나가 바로 '희망'이다. 가벼우면서도 진지하고, 엉뚱하면서도 반듯한 소설로 '희망'은 내 기억 속에 남아 있다. 그 뒤 양귀자 선생님의 '모순'이라는 책도 선물을 받아 읽어보긴 했지만, 왠지 '희망'이라는 소설만으로도 그 분의 꽤 많은 작품을 읽었다는 착각이 든다. 서점에서 기웃거리다가 '원미동 사람들'을 발견하고 반가웠던 이유도 그런 '희망'의 기억과 무관하지 않다. 오랜만에 그 경쾌한 문체와 간결한 스토리 전개에서 오는 소설읽기의 '즐거움'을 만끽하고 싶었다.

'희망'이라는 소설은 다소 '해학'스러운 면이 없지 않았으나, 그 안에 녹아 있는 삶에 대한 진지한 시각에 깊이 매료되었다. 어느 작품이든 전반부와 후반부와 그런 대비는 큰 효과를 가져오는 법인데, 영화 '애정의 조건' 역시 전반부의 밝음과 후반부의 어두움이 극명하게 대비되면서, 시청자가 후반부의 어두움에 깊게 매료되는 효과가 있었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실소를 흘리며, 때론 밝고 경쾌한 걸음을 걷듯이 책장을 넘기다 생각지도 못한 암초에 당황하며 이내 그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해 눈물까지 흘리는 것이다. 그럴 수는 없는 것이다. 밝고 꾸밈없는 얼굴에 아무도 침을 뱉을 권리는 없다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반면 '원미동 사람들'에서 작가는 그 밝음을 작품의 후면에 숨겨놓고 빈틈이 있을때 간간히 보여주는 것에만 만족한다. 줄곧 작가가 꾸며놓은 '원미동'이라는 특정 지역에 존재하다 보면, 마치 곧 비가 쏟아질 것만 같은 안개낀 거리를 걷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밝은 태양이 사라진 그 공간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양한 인간 군상을 각각의 독립된 단편 형식으로 묶어낸 소설이다. 역시 그 안에 다소의 '해학'이 들어있지만, 그 강도가 약하다. 다소 우스꽝스럽고 비현실적이라고 해도 독자는 미동도 하지 않는다. '원미동'의 안개낀 거리 때문에 독자들은 줄곧 불안한 마음을 감추기 않기 때문이다. 뒤뚱거리는 걸음은 즐거운 마음에 술에 취해 흥얼거리는게 아닌, 괴로운 심사의 갈팡질팡임을 아는 까닭이다. 

책의 끝머리에 실린 비평가는 소설이 그저 현실을 표현하는 것에만 초점이 맞추어져 있어 그 원인이나 근본적인 모순을 지적하는데는 소홀했다고 이야기한다. '지하생활자'의 편에서 공장의 사장과 노동자가 서로 입장은 다르지만 모두 힘겨운 삶을 살고 있다는 결론으로, 무리한 '화해'를 시도하고 있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작가의 평소의 지론은 약간 뜻을 달리하는 것 같다. 작가는 오히려 여러가지 문제들에 대해서 직설적인 화법을 구사하지 못하는 소설이라는 장르의 답답함을 술회한 적이 있다고 한다. 작가에게 있어 소설은 현실을 바탕으로 한 허구이긴 하지만, 그 현실을 뒤바꿀 강력한 매개체로 보지는 않는다는 이야기다.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책에 있는 '원미동의 거리'가 과거가 단지 과거의 시대를 복원한, 그럼으로써 독자가 향수에 젖게끔 만든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지만 지금도 곳곳에 그런 거리가 많이 있다. 더구나 기술문명의 발전에 따른 생활 수준의 향상은 상대적 박탈감의 크기를 키웠다. 종종 우리가 과거보다 얼마나 잘 살게 되었냐는 말은 얼마나 공허한가. 절대적인 기록보다는 상대적인 순위가 중요함을 아는 까닭이다. 알랭드 보통의 말처럼 현대인들을 불안하게끔 만드는 주범은 천민자본주의에서 오는 '상대적 박탈감'이다. 마치 TV에서 하는 '인간 극장'을 볼때처럼 책을 읽으면서도 여러가지 상념에 사로잡혔다. 그러면서도 '원미동 거리'의 사람들의 이야기에 귀기울일 수 밖에 없는 것은 그 안에 들어있는 어떤 희망을 보고 싶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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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29. 19:00

버블 경제학, 오바타 세키 도서2009. 7. 29. 19:00

'가난한 아빠, 부자 아빠'라는 책이 있는 것으로 안다. 책을 읽어본 적은 없고, MP3 파일로 한두번 들어본 적은 있었다. 착실하고 성실하게 살아가지만 결코 부자가 되지 못하는 아빠의 교육법과 공부는 못하고 제멋대로인듯 보이지만 부자가 된 아빠가 아들을 가르치는 법. 경제적인 관점에서 누가 부자가 될까. 학교에서 배운대로 '저축'이나 하며 착실하게 살아서는 결코 부자가 될 수 없다고 이야기한다. 여러가지 면에서 요즘의 삶들은 '교과서'를 거부하고 있다. 어쩌면 교과서란 우리의 공동체가 잘 굴러갈 수 있기 위해 개인들이 지켜야 할 덕목과 규범을 일목요연하게 전달하는 지침서에 불과할지도 모른다. 삶의 질과 공동체보단 또 개인의 가치가 중요해진 요즘 시대에 '교과서'처럼 사는 사람은 이용이나 당하고 피해만 입는 구성원으로 전락할지 모른다는 것을 경고하는 것이기도 하다. 

대학에서는 저마다 '경제학 개론'을 비롯한 경제입문서적들을 읽고 또 강의로부터 배운다. 사회에 들어서면 '재테크의 정도'라는 이름으로 수많은 서적들이 우리들을 유혹한다. 그 많은 책들에는 '정석'이라는 말도 많다. 좋은 기업을 찾고, 인내심을 갖으면 투자에 성공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주식 투자에서 차트를 믿지 말라는 말은 오래되었다. 많은 사람들이 챠트를 신봉하다가 실패의 쓴 맛을 보았을 것이다. 믿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을 이용하는 사람이 반드시 있기 마련이니까.

버블 경제학은 그런 인간의 속성을 지적하고 있다. 자본이 있는 곳은 늘상 '수요'과 '공급' 뿐이다. 수요와 공급은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기도 하고, 제거하기도 한다. 아무리 유망하고 거대한 기업이라도 수요가 없다면 존립할 수 없다. 저자는 버블이 금융을 먹여살린다고 주장한다. 시장의 확대를 통해서만 돈은 돈을 먹을 수 있다. 시간이 흐르면서 물가가 지속적으로 오르고, 화폐의 가치가 떨어지는 것은 모두 그런 맥락에서 이해할 수 있다. 거대한 자산가치를 잘게 잘게 쪼개어서 증권화하여 새로운 수요를 창출해나감으로써 '존재하지도 않는' 유령 가치를 지속적으로 키워나간다는 것이다. 그럴듯한 이야기이고, 사실이 그렇다. 감당하지 못할 정도로 혹은 비정상적으로 커진다거나, 또는 갑작스러운 외부의 충격(못, 바늘) 등으로 인해 풍선은 터지게 된다. 풍선이 계속 커지는 것은 기정사실이다. 과연 풍선이 터질 것인가, 터진다면 그 시기는 언제가 될 것인가.
 
어렸을때부터 우리는 정답을 맞추어야 한다고 강요받지만, 실상 모든 일에 정답이란 없다. 천박한 자본주의의 깃발 아래에서의 진리는 오로지 '인간은 이기적인 동물이다'라는 것 뿐이다. '버블'은 곧 필요에 의해서 만들어진 자본가들의 '자산 증식'의 한 방편일 뿐이다. 부지런히 일해서 성실하게 사는 것만으로 우리는 부풀어가는 풍선처럼 날아갈 수가 없다. 풍선 위에 올라타던가, 아니면 풍선이 터지기를 기다리는 수 밖에 없다. 어제의 유행이 오늘은 구시대의 유물이 되듯이 인간 스스로가 정해놓은 여러 기준에 따라서 가치의 변화가 심하다. 마음의 흐름, 돈의 흐름, 길의 흐름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서글픈 현실은 그러한 속성을 조목조목 알고 있다고 해서, 분명한 현실을 제시하는 여러 책들을 섭렵한다고 해서 뚜렷한 길은 없다는 것이다. 어느 때고 우리는 맑게 개인 고속도로를 달릴 일은 없을 것이다. 언제나 뿌연 국도를 헤매면서 찰나에 선택을 기다리는 것이다. 사고나는 것이 두려워서 추월하는 것도 조심스럽기 마련이지만, 찰나의 순간에 더 빨리 뛰쳐나가는 대담함도 있어야 하는 법이다. 그럴 일이 과연 일어날지 스스로도 의문스럽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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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7. 28. 09:10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도서2009. 7. 28. 09:10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를 모르겠으나, 꽤나 제목을 많이 접했다. 늘상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던 작품이었을 수도 있고, 혹자는 뮤지컬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책을 접해본 입장에서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지 않나 싶다. 스토리나 구성 자체만으로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기보다 어떤 식으로든 재해석 내지는 각색되어 다른 형태로 가공되었기에 유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뉴욕의 한 풍경을 그리면서, 주인공 개츠비의 저택을 그리는 것보다는 아기자기한 뮤지컬 무대를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을 것 같다.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보다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할테고. 

같은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책의 재미와 공연의 재미는 엄연히 다른 법이다. 아무래도 시각적이고 역동적인 공연이 책에 비해서 전달의 폭이나 공감의 정도 면에서 큰 장점을 지닌다. 무료한 책도 한번 공연을 거친 후에 다시 읽으면 재미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개츠비는 아마도 그런 류의 소실이지 싶다. 소설만으로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서 주는 이끌림이 왠지 책의 내용에서 충족을 못 시켜주는 면이 있었다.

개츠비의 옆집으로 우연히 이사오게 된 '나'라는 주인공이 일면 신비감이 있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일면 동정심을 갖게 되는 내용을 그렸다. 언제나 지나치게 화려한 것은 공허한 법이다. 개츠비의 집과 들려오는 소문, 그리고 일상은 일면 위대해 보이지만, 그런 내용을 뒤집어버리는 결말은 개츠비라는 인물의 '위대함'이라기보다 현상의 '위대함'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신비감' 또는 '놀라움'이다. 마치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엉뚱한 일을 하는 친구에게 '너 참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삶이 가치가 없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는, 스스로가 존재할 가치가 있었던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길을 함께 가느냐 하는 것이다. 결혼식때든, 장례식때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복해주고, 슬퍼해주는 것만이 비로소 '잘 살았다'는 말을 듣는 길일까. 더욱이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내 삶의 영역 밖'에 있는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사회의 부품이 되는 것만이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가치는 스스로만이 결정할 수 있다. 

시각에 따라서 개츠비는 엉뚱한 면이 있을 뿐더러 현실 감각도 떨어진다. 아마도 소설에서 보여주는 개츠비의 단편적인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를 향한 확신, 믿음 그리고 열정. 그런 것들이 묘하게 개츠비의 주위를 두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현실적인 모습, 그러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이중성과 개츠비의 소박한 꿈과 이상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마지막을 몇명을 함께 해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삶이 스스로 만족스러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일면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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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