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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7. 20. 08:56

깨진 유리창 법칙, 마이클 레빈 도서2009. 7. 20. 08:56

세상에 이런저런 법칙도 많고, 이론도 많지만 알고 보면 그말이 그말이다. 그러한 법칙을 만듬으로써 새로운 '경영 기법'으로 삼는다거나 시대상의 하나의 '트렌드'로 삼기도 한다. 왠지 先後가 뒤바뀐 느낌이 없는 것은 아니나 새로운 노래가 매일 생겨나듯이 법칙이나 이론 역시 하루가 멀다 하고 태어나고 있다. 이 바닥이 다 그런거 아니겠습니까, 라고 퉁~치면 된다.
 
요즘 자꾸 부정적이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습관이 생긴건지도 모르겠지만, 왠지 이 이론으로 한권짜리 책을 만든다는 것은 종이가 다소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이 굉장히 많이 팔리고 인기가 있었다고 한다면, 책의 내용이 신선해서가 아니라 번역자의 약력이 화려해서가 아닐까 싶다. 결국 어느정도 그 분야의 저명인사가 번역했다고 한다면 그 책을 추천하는 것 이상이 될테니까. '깨진 유리창 법칙'의 이론을 간단히, 그야말로 간단히 소개하고 여러 기업들의 사례를 통해서 설명했다. '이론의 기본'에 원칙적으로 동의를 하고 공감을 한다면, 사례를 통한 검증은 사례의 나열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보다 분석적이고 논리적인 데이터가 제공되어야 하지 않을까 싶다.

깨진 유리창 이론이란, 간단히 말해 아무리 맛있는 음식점이라고 할지라도 유리창에 금이 가 있으면 고객은 외면한다는 것이다. 주인은 그다지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는 문제라고 할지라도, 고객의 입장에서 보았을때는 '유리창에 무신경한 주인은 왠지 음식의 청결에도 무신경할 것'이라는 결론을 내리게 된다는 것이다. 작은 실수나 뜻하지 않은 곳에서의 사소한 결함이 사업 전체의 실패로 연결될 수 있음을 경고하는 말이다. 반대로 이야기하면, 사소한 부분까지의 세심한 배려가 큰 성공의 발판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최근에 깨진 유리창 법칙이라는 말을 새로 듣기 전까지, 다른 이야기로 받아들였었다. 어떤 책에서 읽었는데, 지나가던 사람들의 실수나 또는 장난으로 신발가게(?)의 유리창이 깨졌다. 신발가게 입장에선 새로 유리창을 하는데 비용이 들지만, 유리가게 입장에선 새로운 수익이 생긴다. 유리가게 주인은 수익이 생겼으므로, 소비여력이 생기고 다른 물품을 소비하게 된다. 그렇게 돌고 돌다 보면 결국 누군가는 신발을 사게 될 것이므로, 신발가게 주인 입장에서도 결과적으로 나쁠 게 없다. 오히려 유리창이 새것으로 교체되었으므로 고객에게 좋은 이미지로 다가갈 수 있게 된 셈이다. '통화유동'이라는 측면에서 생산과 소비가 활성화되는 긍정적인 결과를 불러오는 것이다. 단순히 적용하기엔 헛점이 많고, 변수가 있지만 전체적인 맥락에서 '그럴 수도 있겠구나'하고 공감하는 면도 있었다. 개인적으로는 '깨진 유리창 법칙'으로 이것을 적용하는 것이 더 멋들어지지 않았을까 싶다.

세상엔 많은 성공한 기업과 실패한 기업들이 있다. 정책도 마찬가지이다. 책을 읽으면서 느꼈던 것이지만, 어느 책이든 하나같이 결과를 놓고 왈가왈부하는 경우가 많다. 사실 이리저리 분석해고 평가해서 기업의 미래를 예측하는 것은 부담스럽기도 하고, 불확실성이 너무 커서 위험하기도 하기 때문에 그저 결과분석이나 하는 것이 훨씬 안정적이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기업의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요소가 굉장히 다양함에도 불구하고 그 요인을 분석할때는 '아전인수'격인 경우가 많다. 대조군과 실험군이라는 과학적인 절차 같은 것은 안중에도 없다. 그저 A를 했기 때문에 성공한 기업과 하지 못해서 실패한 기업이 있을 뿐이다. A를 했어도 실패한 기업이 있을테고, 다른 부분에 집중을 해서 성공한 기업이 분명 존재할텐데 말이다. 결과에 대한 요인 분석이 논리적으로 풀리지 않을 경우, 믿을건 통계밖에 없다. 기업의 성패는 결곡 '고객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인데, 그 마음이라는 것이 수학 공식이 아닌 경우가 많기에. 

일례로 책에서는 '깨진 유리창 법칙'의 대표적인 효과로, 줄리아니 뉴욕 시장과 브래턴 경찰청장의 범죄 감소 대책과 성과를 예로 들었다. 경범죄에 대한 처벌을 강화해서, 강력범죄의 예방 효과를 가져왔다는 점이다. 40%의 범죄 감소라는 수치만으로는 어떤 식으로 통계를 잡았는지, 실제로 강력범죄의 범죄 감소율이 어느정도였는지 가늠하기는 어렵지만, 일정부분 효과가 있었을 것으로 생각한다. 자본과 인력의 투입은 어떤 식으로든 성과를 가져오게 되어 있다. 다만 효율성 문제에서 市가 어떤 식으로 자원을 활용하고 배분하는지에 대한 검토가 뒤따라야 하겠지만. 잡설이 길었는데, 하고 싶은 이야기는 이렇다. 얼마전 읽었던 '괴짜경제학'에서도 90년대 뉴욕시의 범죄 감소에 대한 원인을 분석하면서 이 책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는 색다른 이론을 소개했었다. 시대적으로 90년대에 뉴욕시의 중범죄는 감소할 수 밖에 없는 상황이었다고 이야기하면서, 브래턴 경찰청장이 후에 똑같은 방법으로 다른 곳에 적용을 했을때 실패한 사례를 들었다. 오히려 이런저런 데이터들을 찾아내서 보여주니까 상식적으로 더 엉뚱함에도 불구하고 신빙성이 있었다. 더불어 이런 상반된 의견을 접할때마다 보다 많은 식견과 균형잡힌 시각이 필요하다는 것을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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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7. 16. 13:12

빨강머링 앤, 루시모드 몽고메리 도서2009. 7. 16. 13:12

끊임없이 재잘거리며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빨강머리를 가진 소녀. 그 재잘거림이 사랑스러웠던 기억이 난다. 예비군 훈련 때 읽을 요량으로 작은 포켓북을 샀다. 애니메이션으로 어렸을 때 본 기억이 있지만, 내용은 가물가물하고 그 성우분의 목소리만이 잊혀지지 않고 기억속에 항상 살아있다. 애니메이션 역시 실제 소설을 별다른 각색 없이 그대로 재현했다고 한다. 책은 크게 세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고, 성장과정을 크게 어린 시절과 학창 시절, 그리고 성인이 된 앤으로 그리고 있다. 최근에 더 어린 시절의 앤을 그린 소설과 애니메이션이 나온 것으로 알고 있다. 애니메이션 잠깐 맛을 봤는데, 영 어색한게 적응이 되지 않아 그만두었다. 다른 작가의 작품이라는 점도 왠지 분위기가 다른 느낌을 준다.
 

기억에 많이 남으면서 공감할 수 잇는 파트는 바로 초록색 지붕집에 살 때의 앤이다. 빨강머리 앤을 읽으면서 공감하는 것은 바로 '순수에의 동경'이기 때문이다. 현실 때문에 솔직하지 못하고, 다른 사람들의 눈치를 살피느라 엉뚱한 상상을 감히 꺼내보지 못하는 우리들은 앤의 솔직함과 천진난만함에 대리만족을 느끼는 것일지도 모른다. 천진난만 소녀에서 앤은 지정과 미모, 리더쉽을 겸비한 숙녀로 성장해 나간다.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는 같이 살고 있긴 하지만 남매관계로, 아이가 없이 혼자사는 사람들이다. 앤은 불우하게도 부모님을 사고로 잃고 졸지에 고아가 되어버렸다. 외로운 사람들이 만나서 불완전하지만 하나의 가족을 형성하게 된다. 같이 지내면서 정이 들게 되고, 서로에 대한 사랑을 마음 가득 품고 살게 된다. 사람들은 아이를 낳아 키우고 싶어한다. 잘 키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도 할테고, 아이에게 온갖 애정을 쏟기도 한다. 아이에게 삶의 초점을 맞추는 셈이다. 

아이를 낳아서 키울 능력이 없는데도 무조건 아이를 낳는 사람들도 많다. 국가에서도 영아 충생률이 낮아져서 고민이 많고, 여러모로 출산을 장려하고 있다. 하지만 아이를 마음놓고 키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해주진 않는다. 적절한 보육시설이나 교육비 절감과 같은 대책이 없는 채로 빈부의 격차만 심해지고 있다. 충분한 배움의 기회나 역량을 펼칠 수 있는 환경이 제공되지 못한다면 자신의 노력 또는 능력과는 별개로 그저 '사회의 구성원'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힘겹고 어려운 삶 속에서 순간순간 느끼는 '가족애'와 '성취감'이 삶의 진수라고 이야기한다. 

매튜 아저씨와 마릴라 아주머니는 집안일을 거들 남자 아이를 원했다. 일방적으로 아이에게 무언가를 해준다는 의미보다 현실적으로, 감정적으로 결속할 수 있는 아이를 찾았다. 아이없이 살아온 삶이지만, 두 사람은 앤에게 여러 뒷바라지를 잘했고, 실제로 세 사람은 가족과도 같았다. 사람들은 강아지와도 정이 들면, 가족처럼 생각한다. 또한 낳아준 어머니, 길러준 어머니, 이렇게 구별을 많이 한다. 나중에 낳아준 부모를 알게 되고, 혼란에 빠지고 결국엔 감정적으로 기울게 되고, 뭐 그런 스토리랄까. 보통 핏줄은 속일 수 없다는 말로 드라마와 방송 매체에서 혈연의 결속력을 강조할 필요까 싶다. 우리 사회가 좀더 아름다워지기 위해선, 가족 중심주의, 혈연주의와 같은 해묵은 감정에서 벗어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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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7. 10. 17:08

죽은 시인의 사회, N.H. 클라인바움 도서2009. 7. 10. 17:08

인상깊게 본 영화였다. 학창 시절에 대한 그리움이 있었고, 색다른 것에 대한 감동이 있었고, 진한 여운이 남았었다. 책은 영화에서 보여주지 못하는 것들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죽은 시인의 사회'의 경우, 책에 앞서 영화가 먼저 만들어졌기에 영화의 장면을 그대로 옮겨심은 듯한 느낌이 들었지만, 그럼에도 영화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물론 비쥬얼로 감정을 전달하는 일 역시 힘든 일이겠지만, 글로 표현하는 것은 보다 구체적이면서도 난해하다. '슬프다'는 단어 하나에 들어있는 감정이 수십, 수백개는 될테니까. 

카르페 디엠. Seize the day, 현재를 즐겨라, 독특하게 살아라,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아라.

색다른 교육 철학을 가지고 있는 키팅 선생님의 가르침이다. 오로지 입시와 학과 공부만이 중요시되는 명문 고등학교에서 '인생을 즐기라'고 '스스로 선택하라'고 주문하는 키팅 선생님이다. 아이들은 획일화된 교육에서 일탈의 기쁨을 맛보고, 자유로움과 도전정신을 깨닫게 된다. 키팅 선생님의 말씀은 하나하나 옳으며 과도하게 아이들을 구속하는 부모들이 있다면 보고 배울점이 많다고 생각한다. 우리나라의 현실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기에 시사하는 바도 크다. 영화를 볼때도 그랬고, 책을 읽을때도 마찬가지로 어느정도의 통쾌함마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을 영화와 책 속에서 세상밖으로 끄집어내는 것에 회의가 든다. 아이를 키우는 입장은 아니지만 학창시절의 과정들을 모두 거쳐 사회 생활을 시작한지 얼마되지 않은 나의 입장이나, 또는 이미 부모가 되어 아이들을 키우는 입장이 되었을때 과연 '현실'과 '이상'의 기로에서 올곶은 선택을 할 수 있을지 의문스럽다. 더불어 무엇이 아이들에게 더 옳은 길인지 오히려 혼란스럽기도 하다.
 
키팅 선생님이건 아이들의 부모님이건 모두 아이들을 위한다는 마음에서는 뜻을 같이 한다. 문제는 아이들에게 부모의 뜻을 어떻게 이해시키며, 부모가 올바르게 생각하는 방향을 아이의 그것과 함께하는 것이다. 교육제도가 불만스럽다고 하여, '제도의 일탈'이나 '현실의 거부'는 쉽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다. 책 속에서처럼 '善惡'의 대비가 분명하다면야 문제가 없겠지만 말이다. 

주인공 닐이 아버지에게 '연극'을 하고 싶다고 이야기할때, 아버지는 못하게끔 못을 박았지만, 나중에 할 수 있는 일이라며 '시기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나는 자유로운 가풍 아래 '답답함'을 느끼지 못하고 자랐지만, 그것은 부모님의 뜻에 공감하며 생각하는 방향을 함께 했기 때문이었다. 다그치시지는 않았지만, 교육자의 길을 걸으셨던 아버지 역시 어떤 일이든 '해야 할 시기'와 '미루어야 할 시기'를 잘 판단해야 한다고 말씀하셨다. 

학교가 존재하는 것이 곧 '인성 교육' 때문이라고 말한다. 학문은 혼자서도 할 수 있지만, 인성은 사람들 사이에서 키워지는 법이니까. 곧 가치관이 충분히 정립되지 않은 시기에서부터 아이들의 '사회화 과정'을 돕는 곳이 학교라는 이야기다. 그 '사회화'라는 과정은 아이들이 학교를 졸업해서 평생동안 부대껴야 할 전쟁터와 같은 사회에서 어떤 무기를 들고 싸워야할지를 결정해주기도 한다. 전쟁엔 룰이 있지만, 총을 들고 싸우는 병사와 칼을 들고 싸우는 병사가 만났을땐 서로 '다른 방식'으로 싸울 수 밖에 없다. 학교라는 곳이 태생적으로 가질 수 밖에 없이 '자유의 제한'이다. 통제되지 않은 자유가 곧 '방종'이기에. 한번 생각해봐야 할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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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7. 7. 17:27

꼬마 철학자, 알퐁스 도데 도서2009. 7. 7. 17:27

반가운 이름 알퐁스 도데. 서점에서 배회하던 중, 아련한 추억속의 설레였던 소설 '별'을 떠오르게 하는 알퐁스 도데라는 이름이 먼저 반가웠고, '꼬마 철학자'라는 제목이 마음에 들었다. 철학을 생각하는 꼬마라고 한다면 우선 '천재'라는 단어를 떠올릴지 모르나, 엄연히 '꼬마'와 '철학'은 서로 매치가 되지 않는다. 왠지 '철학'이라는 학문은 천재성만으로 해결되지 않을 것만 같다. 세월의 흐름과 경험, 오랜시간의 사색을 통해서 얻어지는 가치이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책을 펼쳐들기 전에 나는 다소 '엉뚱한 상상의 나래'를 펼치는 제멋대로인 꼬마 녀석을 상상했더랬다. 마치 어른인 척 갖은 폼을 재나, 결국 천진난만한 어린아이에 불과한. 

실제의 내용은 '엉뚱함'과는 다소 거리가 있게 진지함이 묻어 있었다. 시와 철학을 좋아하는 작고 왜소한 체구의 '나'를 중심으로, 성장하면서 벌어진 일들, 감내해야할 고통, 자신에게 긍정적 또는 부정적으로 영향을 미친 사람들을 이야기하고 있다. 왜소한 체구만큼이나 여리고 나약한 감성의 소유자로, '현실'이라는 가혹한 무대 위에서 번번히 좌절을 맛본다. 비웃음과 조롱, 배신을 감내하지 못한다. 다니엘은 되돌아갈 둥지도 없이 결국 막다른 골목에 다다른다.

책의 내용 중에 왠지 모르게 마음에 드는 부분을 발췌했는데, 그것이 곧 다니엘의 여린 마음과 힘겨운 생활을 단적으로 드러내주고 있다. 

사람의 마음은 이렇게 약한 면을 가지고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나무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고, 돌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고, 공장도 좋아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 세상으로 돌아갔던 로빈슨 크루우소도 훗날 자기가 살던 무인도를 찾아보기 위해 수천리가 넘는 바닷길을 항해하지 않았던가. 

사랑하는 사람들과 멀리 떨어져 낯선 마을의 누추한 여관 침대에 홀로 걸터앉은 나는, 위대한 꼬마 철학자라는 자부심도 내팽개친 채 미어지는 가슴을 억누르지 못하고 어린애처럼 엉엉 소리내어 울고 말았다. 삶이 무섭게 느껴졌던 것이다. 삶 앞에서 나 자신이 무기력하고 허약하게 느껴져서 하염없이 울고 또 울었다. 그렇게 한없이 눈물을 쏟고 있는데, 별안간 가족들의 얼굴이 내 눈앞을 줄지어 지나갔다. 버려진 집과 어머니는 이리, 아버지는 저리, 뿔뿔이 흩어진 가족들이 떠오르는 것이다. 이제 내겐 가족도 집도 없다.    

다니엘의 형 자크. 어렸을때부터 항상 울음이 그치지 않아서 아버지에게 구박을 받고 자랐다. 항상 울고만 있었다는 것은 '똑똑'한 느낌을 주지는 못하지만, 다니엘만큼이나 순수하고도 동정심이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직 '꼬마'에 불과한 다니엘에게 인간적인 사랑을 베푸는 인물은 3명인데, 형 자크와 제르만느 신부님 그리고 피에로트씨이다. 그 중 자크형은 다니엘에게는 절대적인 존재로 변함없는 헌신과 사랑, 가족애를 보여준다. 자크는 다니엘이 실의에 빠져 있을때도, 용기를 잃고 망설일때도 옆에서 늘 희망을 심어주고, 자신의 아픔을 보이지 않고 밝은 모습을 연출해내는 '아버지'의 역할을 해낸다. 한 가족의 생계를 위해서 묵묵히 자신의 짐을 떠맡는 우리 시대의 아버지들의 '희생'을 볼 수 있다. 

제르만느 신부와 피에로트씨 역시 다른 이의 '아픔'을 함께 나눌 수 있는 동정심을 가진 사람들이다. 그들은 다니엘이 어려움에 처했을때 대가없이 손을 내민 사람들이다.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 다니엘 에세트. 소심하고 답답하고, 때론 어리석으며 순수한 꼬마 철학자다. 그 특징중 하나는 늘상 회한에 사로잡힌다는 것인데, 스스로 자신의 삶을 개척하려는 '의지'가 번번히 벽에 부딛히다보니 항상 자신을 보살펴주는 사람들의 '울타리' 안에서 벗어나질 못한다. 결국 형의 '거룩한 희생'을 댓가로 다니엘은 새 삶을 얻었다. 더이상 과거를 부여잡고 회한을 늘어놓지도 않을 수 있고, 집안을 일으켜세워야 한다는 강박과 늘상 찾아오는 '외로움'을 마주할 일도 없게 되었다. 소중한 경험과 희생이 과연 그를 다른 사람으로 변모시킬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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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두 명의 스티븐이 쓴 이 책은 경제학 서적이라기보다는 심리학 서적에 가깝게 느껴진다. 두 범위를 합하여 보면 간과하기 쉬운 심리적인 영향들이 어떻게 경제활동으로 드러나게 되는가, 정도랄까.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나 동의하지 않는 부분들이 종종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흥미롭게 읽었다.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 다들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문제들을 색다른 시각으로 접근했다는 점에서.

낙태는 범죄를 감소시킨다

가장 흥미로웠던 언급은 '낙태와 범죄율'에 관한 주장이다. 90년대 미국의 범죄율 감소는 70년대부터 시작된 낙태수술 허용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어떤 이들은 이미 유전자를 통해서 어느정도 범죄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사람을 분별해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회적 파장을 염려해 다소 드러내지 쉽지 않은 주장인 걸 감안하면 향후 한두번쯤은 그러한 이야기로 사회가 떠들썩해질 가능성도 없진 않다.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그것과는 다르다. 낙태를 허용함으로써 부모에게 일종의 '거부권'을 부여하게 되면, 부모가 원하지 않는 아이의 출생을 줄임으로써 상대적으로 열악한 환경(이를테면 경제적 환경일 수도 있겠고, 부모의 관심 결여일 수도 있겠고) 에서 아이가 자라서 범죄에까지 이를 가능성이 적어진다는 논리이다. 낙태를 선택하는 이유는 대부분 '아이를 키울 능력'을 갖추지 못했을 경우 발생하게 되고, 어쩔 수 없이 태어난 태아의 경우 충분한 경제적, 심리적 서포트를 받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낙태는 여전히 찬반 논쟁이 첨예할 정도로 민감한 주제이기 때문에 당시 이러한 주장도 큰 파장을 불러 일으켰다고 한다. 하지만 실제로 어린 학생들의 가정 환경을 중요하게 생각하고, 범죄자나 또는 성격이상자 등의 심리연구를 할때 하나같이 유년기 또는 성장기의 환경에 큰 비중을 두는 것을 감안하면 일리있는 주장이라고 여겨진다. 물론 그것은 낙태의 찬반에 대한 입장 표명이 아니라 단순히 어떤 현상을 분석한 것에 불과하다. 범죄율 감소를 위해 낙태를 허용하는 것과 태아를 하나의 생명으로 인정해 존중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로, 가치관의 차이에 따라 서로 다른 입장이 될 수가 있는 셈이다.

모두가 '인센티브'에 반응한다

교사와 스모선수의 부정행위, 그리고 부동산 중계업자의 성향 등은 모두 저자가 제시하는 '인센티브'와 직결되는 사례이다. '인센티브'란 어떤 행위를 유발하는 동기, 정도로 해석하면 될까. 보통 회사나 스포츠 경기에서 인센티브가 있듯이 '성과에 대한 사례'가 일반적이다. 주장 자체는 일반적이지만, 여러 통계를 사용해 실제적으로 그 연관성을 분석해냈다. 학생들의 시험 답안지를 비교해 교사의 부정행위를 들추어냈고, 다양한 상황에서의 승률을 분석해 스모 선수들의 담합을 의심했다. 부동산 중계업자에 관한 이야기는 보다 더 확실한 이야기로 '남의 집'을 팔때보다 '내 집'을 팔때 보다 더 신중해지는 결론을 도출했다. 

다소 공감하지 못했던 부분은 스모 선수들의 부정 행위에 대해 단정적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다는 점이다. 야구를 좋아하는 나로써는 여러 상황에 따라 경기 결과가 다양하게 드러난다는 사실 자체를 인정하고 있다. 일단 의심하기를 시작하면 야구나 축구 역시 '승부조작'이 빈번하게 일어난다고 단정지을 수도 있다. 실제 그러한 사건들이 여럿 일어났고, 경기를 보다 보면 도저히 불가능한 일들도 버젓이 벌어지기 때문이다. 'Noting is Impossible', '공은 둥글다'로 대변되는 스포츠의 의외성에 대해 어느정도까지 인정해야 할지 그 경계가 모호해지게 된다. 스모 선수들의 담합 이론에 공감을 하게 된다면, 스모를 즐길 수 있을까. 무엇보다 응원하는 팬들을 우롱하는 행위로밖에 볼 수 없다.
 
탈락 위기에 처해 있는 팀이나 선수가 평소 실력 이상의 능력을 발휘한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저자의 이야기처럼 그것은 강력한 '인센티브'다. 야구나 축구에서 FA를 앞둔 선수가 'Crazy Mode'로 돌입하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박찬호 선수는 FA 장기계약을 위해 부상까지 참아가면서 플레이를 했다. 그만큼 '인센티브'가 강력하고 절박하기 때문이다. 저자의 논리는 이렇다.

탈락 위기에 처한 선수들은 보통 기대 승률보다 20~30% 정도 승률이 높아진다. 그건 이해가 되는 부분이나 다시 그 선수와 재대전을 했을때는 기대승률이 나와야 하는데 오히려 기대승률에 비해 10% 정도 낮게 나온다. 그것은 곧 한번씩 승패를 주고 받기로 선수간의 담합이 있었다는 것이다. 

스모 선수들이 모종의 담합을 했다는 의심은 충분히 가능하겠지만, 단정지을 수 있는 데이터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면밀한 분석이 필요해 보인다.

정보의 비대칭성

정보의 비대칭성은 '인센티브'와 맞물려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우리는 얼마나 의사를 믿을 수 있을까. 책의 뒷표지에 '우리가 알고 있는 세상은 가짜다'라는 말처럼 우리는 우리가 믿고 있는 '신뢰'를 다소 거둬들여야 할지도 모르겠다.

심리학의 몇몇 책에서 의사들에 관한 '인센티브' 이야기가 나온다. '의사'는 직업으로서 한 예일 뿐 사회 전반적으로 그렇다는 이야기다. 요즘 즐겨보는 드라마 '결혼못하는 남자'에서 지진희는 극중 의사로 등장하는 엄정화에게 묻는다. '아픈 사람들이 많아야 돈을 버는 의사들은 왜 건강 비결을 환자들에게 누설하는 걸까요'라고. 엄정화의 대답은 그 모든 것을 설명해준다.

"이미 보편적으로 공개된 정보니까요."

똑같은 병을 앓고 있는 어린이들이 1차 대상 의사들에게 진료를 받았을때 50:50으로 수술필요, 불필요가 갈렸고, 그 중 수술이 불필요하다고 진단받은 50%를 다른 2차 대상 의사집단에 진료를 의뢰하면 다시 그 중 일부는 수술이 필요하다는 진료 결과가 나오고, 그것은 3,4차로 계속 진행이 되어도 마찬가지라는 시험 결과가 있었다. 전문적인 지식을 갖춘 집단일수록 '인센티브'와 결합을 하게 되면,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는 것이다. 마냥 삐딱하게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스스로를 괴롭히는 일이겠지만, 결과가 시사해주는 바는 크다. 

최고의 양육법은 솔선수범 

자녀 양육에 관한 여러 통계도 흥미로운 결과를 낳았다. 상식과 고정관념에 어긋나는 결과도 있었고, 생각했던 바대로 결과가 나온 부분도 있었다. 결론은 '자녀에게 무엇인가를 해주려고 하지 말고, 스스로 모범을 보여라?' 책에서 제시한, 자녀의 성적에 영향을 미치는 8가지 요인을 언급하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부모의 교육 수준이 높다.
부모의 사회경제적 지위가 높다.
엄마가 첫아이를 출산한 나이가 30세 이상이었다.
아이의 출생당시 몸무게가 적었다.(저체중이었다.)
아이의 부모가 집에서 영어를 쓴다.
입양된 아이다.
부모가 PTA 활동을 한다.
집에 책이 많다.

좋은 이름은 성공을 보장한다?

결론은 그렇지 않다는 것. 이름 역시 유행처럼 번지고, 시대의 흐름에 따라 흥망성쇄를 거듭한다는 것이다. 언젠가 우리나라의 신문에서도 인기있는 이름에 대한 조사를 했었는데 30-40년에 인기있었다던 '철수'나 '영희'와 같은 이름이 인기가 사라지고, 중성적인 이름이 인기가 높아졌다는 결과가 나왔었던 것 같다. 그러고보면 '작명' 때문에 고민을 거듭하는 우리네 부모들은 불필요한 일에 에너지를 낭비하는 셈이다. 

우리나라의 경우를 한정했을때 개인적으로 궁금한게 하나 있다면 '특이한 이름이 주는 효과'다. 이름이 독특해서 기억하기 쉽다면, 그것이 개인의 성공에 도움을 주는지 궁금하다. 평이한 이름 덕분에 때론 독특한 이름을 가져보고 싶다고 느끼기 때문이다. 물론 그것 역시 장단점이 있을테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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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