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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6. 17. 10:36

공의 경계, 나스 기노코 도서2009. 6. 17. 10:36


내용을 떠나 작화가 뛰어난 애니메이션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문득 애니메이션에 대한 검색을 하던 중에 원작이 소설이라는 것을 알았고, 소설을 읽어야만 비로소 애니메이션의 내용이 이해가 될 것이라는 어떤 분의 조언에 따라 서둘러 책을 샀다. '초속 5센티미터'만은 못하지만, 섬세한 배경묘사와 빛의 활용 때문에 비슷한 면이 있었고, 인물의 생김생김은 차이가 있지만, 마치 신카이 마코도 감독의 초기작품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상과 하로 나누어진 두꺼운 두 권의 책이 배달되었을때 설레임이 있었다. 다소 새로운 장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무언가 반가운 만남이 기다리고 있을 것 같은 기대가 있었다.
 
사람마다 좋아하는 장르의 경계가 명확하다고 생각하진 않지만, 내가 좋아하는 류의 내용은 아니었다. 책 속에서 이야기하는 이상자(異常者)의 등장은 우리가 사는 현실세계에서 일정한 거리감을 두어야 하는 일이기에 책에 몰입하는데 방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납득의 문제를 떠나 이해 자체가 어려운 대화들이 많았고, 세상이 아주 복잡하고 이해하기 힘든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일상의 관점에서 다소 허황된 이야기들을 쉬이 즐기지 못하고, '믿거나 or 무시하거나'로 일관하는 나로서는 일면 무의미하게 느껴지는 '사고의 일탈'보다는 주인공 미키야와 시키의 애정과 일상에 마음이 닿았다. 번역을 담당했던 역자분 역시 작품끝 소감에서 미키야와 시키의 '잔잔한 러브스토리'를 보는 마음이었다고 하니 내가 전혀 엉뚱했던 것은 아닌 모양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매력은 작중 주인공인 고쿠토 미키야와 오유기 시키에 있다.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그 네들의 이야기와 정상과 이상을 반복하는 숨막히는 현실 속에서 두 사람은 많이 다르면서도 뜻이 통한다.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메꾸어 주기라도 하듯이 두 사람은 불안한 외줄타기를 계속하지만 결국 '진심은 승리한다'는 평범한 진리를 독자에게 확인시켜 준다. 미키야가 보여준 시키에 대한 '변함없는 신뢰'와 生을 대하는 알듯 모를듯한 태도, 냉정하리만큼 차분하지만 따뜻한 감성은 이 시기의 나에게 시사하는 바가 컸다. 

오유기 시키. 사실 다소 솔직하게 말해서 작가가 그토록 '아름답다'는 말을 반복해서 되풀이하지 않았더라면 좀 덜했을지도 모른다. 다분히 정상적인 육체와 환경으로 이상자가 되어야만 하는 안타까움을 독자들이 충분히 공감하도록 유도한 것일 수도 있고, 여느 작가와 마찬가지로 스스로 창조해낸 캐릭터가 독자로부터 충분히 사랑받기를 바랬을 수도 있다. 시키는 살인을 좋아하고, 신체를 제외하면 정상적인 인간이라고 보기 힘들지만, 미키야의 사랑을 받고 또 독자로부터 사랑받는다. 냉정하고 차갑고 잔혹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간순간 보여주는 시키의 인간적인 면에 독자들은 열광하는 것 같다. 그것은 오히려 정상적인 사람이 인간다운 것보다 극적인 상황을 연출해주기 때문에. 

나름 정독한다고 했는데도, '공의 경계'라는 제목의 의미를 해석할 자신이 없다. 더불어 책을 읽은 덕분에 애니메이션을 따로 보고 싶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쩌면 책에서 보여주는 심리 묘사가 빈약해질 게 분명한 애니메이션 종종 보여주는 그 잔혹한 장면과 시종일관 흐르는 괴기스러운 분위기 때문에 다소 거부감이 들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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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6. 16. 11:38

죄와 벌, 도스토예프스키 도서2009. 6. 16. 11:38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고 배웠다. 국가에서 정해놓은 법의 테두리 안에서든지, 아니면 법의 영역을 넘어서는 전지전능한 절대자 또는 하늘이라고 대표되는 무형의 운명으로부터든지 사람들로 하여금 죄를 짓지 않고 살도록 옭아맨다. 인간의 행동이라는 것은 분석하면 분석할수록 더욱더 미궁에 빠지는 경우가 많다. 그만큼 다양하게 드러나는 개인의 심리와 행동은 예외 현상을 설명할 길이 요원해 과학적인 객관화가 쉽지 않다. 기껏해야 그 분포나 통계 정도인데, 사람들이 같이 살아가고 있다보니 다른 사람의 심리나 행동의 유형화가 도움이 되기도 한다. 물론 그것이 절대적이라는 이야기는 아니다.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은 기본적으로 경제적인 이유가 바탕에 깔려 있지만, 죄를 짓고 자신이 강자임을 확인하려고 한 주인공이 실제로 죄를 저지르고 그에 따르는 죄책감을 비롯, 다양한 감정에 휩쓸리는 과정을 그렸다. 법의 테두리 안에서 죄를 규정짓고 그에 따라 처벌하는 시스템에 반기를 든 것일 수도 있다. 이를테면 사회에 무익하다고 여겨지는 사람, 나보다 더한 죄를 짓고 사는 사람 등을 제거하는 것은 죄가 아니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셈이다. 소크라테스는 ‘악법도 법’이라고 했지만, 말이 그렇지 실제 악법의 폐해는 이만저만 큰 게 아니기 때문이다.

보편적으로 우리는 살인을 비롯한 죄를 저지르면 죄책감을 느끼는 것으로 알고 있다. 때로는 심한 죄책감에 정신 착란이나 이상이 생기기도 한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나도 뻔뻔하게, 일말의 죄책감도 없이 행하여지는 범죄들이 늘어나고 있다. 살인을 저질러놓고도 죄를 뉘우치거나 반성하기는 커냥, 다음 세상에 태어나면 걸리지 않겠다고 한다거나 더 많은 사람을 죽이지 못해서 억울하다는 등 이미 사회적으로 규정한 ‘죄’라는 테두리를 넘어서 버린게 아닌가 싶을 정도다. 그러한 요즘의 시대상을 반영해보면 ‘죄와 벌’의 라스콜리니코프는 오히려 너무도 인간적이지 않은가 싶을 정도로 죄책감도 힘겨운 줄다리기를 한다. 물론 그것이 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양심에 비춘 괴로움인지, 단지 죄의 행각이 밝혀져 벌을 받는 것이 두려운 것인지 명확하지는 않다. 소설의 제목에서 말하는 ‘벌’의 의미는 사회적인 처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닐 것이다.

라스콜리니코프가 불우한 환경에 처해 있는 소냐를 동정하고, 더 나아가 사랑을 하는 것은 다분히 그의 처한 환경에서 비롯하는 것이다. 심리적으로 불안정한 상태일 뿐만 아니라 결정적으로 자신의 결함을 누구보다도 스스로 잘 인지하고 있기 때문에 완벽에 대한 거부가 나타나고 똑같이 결함을 가진 대상에 대한 동질성, 동시에 그런 결함을 스스로 채워주려고 노력함으로써 자신의 결함을 조금이나마 보상하고픈 심리가 아닌가 싶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바람직은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희생을 먹고 사는 동정이나 사랑이기 때문이다. 극한의 상황에서 누군가를 돕는 일이 자신의 삶이나 존재를 가치있다고 느끼게 해줄지 모르지만, 그 감정은 시한부일 가능성이 높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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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5. 17. 20:37

행복한 이기주의자, 웨인 다이어 도서2009. 5. 17. 20:37

보통 이런 류의 책들은 제목만으로 모든 내용이 설명된다. 극단적으로 이야기하자면, 굳이 읽지 않아도 대충 그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예상했던 내용과 실제로 씌여진 내용과 얼마나 차이가 있을까, 정도의 호기심을 가지고 책을 본다고 하면 너무 과장일까. 책 내용을 한마디로 축약하면, '천상천하 유아독존'.
 
남보다 자기 자신을 더 사랑하고, 하기 싫은 일을 굳이 하지 말라는 등 기본적으로 공감하는 내용들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풀어나갔지만, 다분히 원론적인 내용들이 많았고, 현실적인 예를 든다고 해도 다소 극단적이거나 비현실적인 경우가 많았다. 비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 이유 자체가 우리가 너무도 '행복한 이기주의'를 실천하지 못하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그것만을 탓하기엔 삶이 그렇게 호락호락하지만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삶에 필요한 재화나 자산, 관계 등을 사회로부터 얻는다.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공동체를 존중하지 않고서 행복해지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생각한다.
 
저자는 그런 사회의 시선일랑 아랑곳하지 말고 극단적으로 이기주의 노선을 택하는 것이 곧 자신의 행복이라고 이야기하는데, 한계가 있다. 더불어 어느 사회의 구성원이냐에 따라서 달라지기도 한다. 분명 저자가 살고 있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여기 한국보다는 보다 더 개인의 자유와 개성을 존중하는 성향이 강한 문화이다. 진정 행복해지는 길은 그저 마음대로 내딛는 발걸음에 있는 게 아니라 사람들과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고, 그 가치에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할 줄 알아야 한다. 그래서 상황상황에 따라 행복해지는 길이 다른만큼, 스스로 행복해질 수 있는 사람을 만나고, 또 행복해지는 길을 찾는 노력을 해야 한다.
 
행복한 이기주의자를 나의 관점에서 재정의 하자면, 자신을 사랑하고, 또 그럼으로써 다른 사람을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다. 공동의 가치를 공유하는 사람들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일상에 존재함으로써 여유를 갖는 사람이다. 독선적인 대신 융통성이 있어야 하고, 조급함 대신 여유로움이 있어야 한다. 공자가 말한 '종심소욕불유구'라는 말처럼 마음 내키는 대로 행해도 거스름이 없는 경지가 바로 '행복한 이기주의'의 경지인 셈이다.
 
반면 우리의 문화는 너무도 '희생'과 '인내'를 강요해 온 경향이 적지 않았던 것 같다. '행복한 이기주의자'라는 책이 다소 극단적인 사례를 열거했음에도 불구하고, 그 기본적인 생각에 공감하는 이유는 보다 더 '자신을 위해 사는'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요즘 들어 다양한 계층에서 일대 '일탈의 바람'이 불고 있다. 즉 지금까지는 참고 인내하면서 살아왔지만 이제 '스스로의 인생'을 찾겠다는 목소리인 셈이다. 자신의 인생은 무엇보다도 스스로를 위한 것이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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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5. 11. 09:09

정말 난 너를 사랑하는 걸까, 김혜남 도서2009. 5. 11. 09:09

연애 문제라면 자다가도 번쩍 눈을 뜰 정도로 연애학(?)에 심취해있는 친구 녀석의 집에서 빌려온 책이다. 보통 '연애'라고 하면 그 유쾌하면서도 달콤한 속성 때문에 진지하게 고민해서는 안될 문제로 간주되거나, 한가한 사람들이나 공부(?)하는 것으로 취급되는데, '연애'를 하는 동안 느끼는 인간의 감정이 굉장히 변화 무쌍하고, 심리학의 한 부분인 것을 감안하면 그냥 지나치기 힘든 매력이 있다. 이런 책을 읽는 것 자체가 스스로 연애에 있어서 '경험 미숙'임을 자처하거나, 보편적으로 '사랑'이라는 단어가 주는 순수성을 훼손시킬 수 있다는 염려에서, (이런 부류의) 책과는 거리를 두어 왔다. 굉장히 효과가 있다가 떠들어대는 사람들이 많지만, 전쟁을 치르는 듯한 '작전'과 '전술'이 난무하는 '연애'는 너무 팍팍해 보였기 때문이다.

단지 '사랑이야기'를 소재로 한 것이 아니더라도, 다른 여러 부류의 책들이 널려 있었는데도, 그리고 '사랑' 책들과 거리를 두며 살아왔던 기존의 입장에서 선회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알랭 드 보통의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와 '우리는 사랑일까'를 접했던 덕분이다. 예전에 읽었던 '금성에서 온 여자, 화성에서 온 남자'와는 또다른 느낌의 신선한 접근으로 재미있게 보았었던 책이다. 그저 '연애'를 잘하기 위해서가 아닌, 남녀의 이런저런 행동들에 대한 철학적인 접근이 신선했다.
 
'심리학'이 인간 행동의 다양한 패턴을 통계를 통해 분석하기 때문에, 즉 스스로의 행동 양식을 다른 사람들의 보편적인 그것과 비교해볼 수 있는 장점 때문인지 흥미로운 반면, '정신분석학'은 다양성을 존중하는 차원이 아닌 '병을 고치는 방도'로만 활용되는 느낌이 있어 딱딱하다. 행위를 분석하는데 있어서도 '그런 심리가 있을 수도 있다'고 가정하기보다는 '그런 심리가 옳은지 그른지'를 판단하고, 그릇되었다면 그 원인은 어디에 있는지를 파악한다. 작가가 정신분석학 의사라는 점에서 철학을 전공한 알랭 드 보통의 책과는 확연한 차이가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그래서인지 사랑은 '병을 진단'하듯이 서술되어 있다. 책에 따르면 사실 사랑을 하는 우리들 대부분이 '사랑병'에 걸린 사람들처럼 느껴진다. 저자의 말에 의하면 사랑은 어느정도는 '멀리있기'가 중요한데, 어렸을때 사랑받지 못하는 사람들은 애정결핍으로 사랑을 갈구하게 되고, 어렸을 때 보호를 많이 받은 사람은 다른 사람을 이해하는 노력보다는 '받기만 하는 사랑'에 집착하게 된다는 것이다. 사랑도 적당히 해야 하고, 질투도 적당히 해야 한다는 것이다.

방송작가 노희경이 쓴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라는 시가 생각났다. 책을 쓴 저자의 생각에 공감하는 바도 많지만, 결혼 생활을 오래 지속하기 위해 스스로 마음을 잘 컨트롤한다는 개념에서의 사랑을 이야기했을 뿐이다. 누군가를 절실히 보고 싶고, 미친듯이 사랑하고픈 젊은 열정들에게 사랑은 자신을 지키지 못할 정도로 마음을 열고 온 힘을 다하고, 결국 그 사랑을 지키지 못해 상처를 받곤 하지만, 그럼에도 또다른 사랑을 찾아 나섬이다. 다람쥐 쳇바퀴 돌듯 같은 과정을 되풀이하면서도 빠져 나오지 못하는 것이 바로 '사랑의 굴레'이며, 우리들의 삶이란 이야기다. 다만 어떤 사랑을 방식을 선택하는가는 개인의 자유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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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5. 3. 23:55

아내가 결혼했다, 박현욱 도서2009. 5. 3. 23:55

10년전에만 나왔으면 '미친 소설'로 폄하되었을 신선한 작품. 우리 사회에서 정해놓은 도덕과 윤리의 틀을 넘어서는 소설과 영화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만큼 우리 사회가 변하고 있고, 사람들의 다양한 감정을 존중하고, 자유로운 개성을 인정해가는 방향으로 달라지고 있는 셈이다. 첫 시도는 항상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시대적인 이슈가 되기도 하지만 반복되어 무뎌지다 보면 자연스럽게 보편적인 생각의 하나로 자리잡게 된다. 

그냥 이런 사람도 있을 수 있구나, 정도로 가볍게 읽어볼만 하지만 너무 깊이 생각하면 머리만 아프고 딱히 해답이 있을 것 같지도 않다. 보통 감정적인 문제들에 대해 '직접 경험해보지 않으면 모른다'라는 말이 정답인 것 같다. 평소 나름의 주관들이 있을 수 있지만, 감정 문제에 있어서의 주관이란 변함이 없는 절대적 가치는 아닐 수밖에 없다. 자신의 감정을 받아들이지 않고, 이성의 무게에만 짖눌려 사는 것 역시 굳이 행복을 피해가려는 사람같은 안타까움이 있다. 

큰 윤곽에서 세명의 등장인물이 있다. 주인아, 노덕훈, 한재경. 주인아는 노덕훈의 아내이고, 한재경의 아내이기도 하다. 일처이부. 하지만 법적으로 인정되지 않는 관계이므로, 결혼식만 하고 일상적인 생활에만 한정이 된다. 결혼 중에 다른 사람을 만나는 것까지 허용하던 덕훈으로서는 사실 결혼이라고 해봐야 못참을 것도 없는 셈이다. 이혼이 더 가슴아픈 일일지도 모른다. 인아는 스스로 결정을 짓지 않고, 그 선택권을 덕훈에게 넘긴다. 더불어 결코 덕훈이 싫어져서 그러는 것이 아니라고 강변하면서. 감정적 우위에 있는 사람이 결단을 내리지 못한다면, 감정적 약자는 더 결정짓기가 어렵다. 분명 인아 입장에서 덕훈이 싫어진 게 아닌 것은 사실이지만, 과거 덕훈으로만 충분했던 시간에서 이제 덕훈에게도 부족한 점이 생겼고, 덕훈이 채우지 못하는 빈자리를 다른 사람이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셈이다. 그런 과정을 따라가다 보면, 덕훈과 재경 이후 제 3의 인물이 등장하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럼에도 인아의 독특한 점 하나는 단지 감정적 유희나 육체적 유희를 넘어서서 완벽한 결혼생활로서의 의무까지도 수반한다는 것이다. 두명의 남편의 가족들까지 모두 챙기고, 살림살이까지 한다는 것은 육체적으로 굉장히 피곤한 일일 것이 분명하지만 포기하지 않는다. 물론 책의 내용만으로 보았을때 인아가 정신적으로는 그런 생활을 어느정도는 즐기고 만족하는 것처럼 나온다. 보편적인 관점에서 다소 독특한 마인드를 가진 인아인만큼 그런 생각을 가질 수도 있을 것 같다. 

문제는 덕훈이다. 인아와 재경은 본인들이 생각하는 방식대로, 삶의 가치관에 어느정도 부합하는 길을 가고 있는 셈이다. 그 둘은 하고 싶어서 하는 반면, 덕훈은 하기 싫어도 한다. 사랑한다는 이유 하나 만으로. 어떻게 보면 '감정의 노예'가 되어버렸기 때문에, 가슴아픈 일의 연속이지만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인아를 만났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어느정도의 '행복'을 저당잡히며 산다고나 할까. 별 수 없는 일이지만, 불행해 보이는 것만은 어쩔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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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