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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1. 21. 08:56

파페포포 투게더, 심승현 도서2009. 1. 21. 08:56

깔끔한 만화 그림체를 좋아하는 사람으로서, 회사 선배 책꽃이에 자리를 잡고 있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에 눈길이 가는 것은 당연했다. 무엇보다 그린체와 캐릭터는 마음에 들었다. 만화가 심승현씨가 그린 '파페포포 투게더'는 상당부분 '추억'이라는 인간의 아련한 감정을 대상으로 만들어진 책이다. 책의 내용은 대체적으로 너무도 당연해서, 무덤덤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더불어 공감되면 면도 있었다. 이를테면 토크쇼에서 흔히들 하는 '이런 사람 꼭 있다.'라는 문제로 순위를 매기거나 잊혀진 80년대의 과자 순위라던가... 그런 화두를 던진뒤에 답을 찾아갈때 관객이나 시청자에게서 '맞아! 맞아!'라고 하는 공감대를 이끌어내듯이 자연스럽게. 책을 읽으면서 적으면 세네번 많게는 대여섯번 그런 공감을 했던 것 같다. 


먼저 생각나는 것이 자기에게 장난치는 남자아이에게 쌀쌀맞은 태도를 취했더니 그 아이가 다시는 자신에게 장난을 치지 않더라... 그리고 시간이 흘러 다른 중학교에 가게 되었는데 우연히 버스에서 그 아이로 추정되는 녀석을 발견하게 되어 실제로 아는 체를 하려고 했더니, 모른 척 지나가 버렸다는 그런 내용. 뭐 남자아이 입장에서는 심하게 삐진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상당히 재미있는 케이스라고 볼 수 밖에. 

다른 하나는 좋아하는 여자아이에게서 생일 파티에 초대를 받게 되어 선물을 들고 갔는데 현관에서 들어가려고 하던 중에 돌아서서 오고 말았다는 내용. 혼자만 초대받았을 줄 알았는데, 여러 사람들이 이미 즐겁게 떠들면서 놀고 있어서 섭섭하지 않았을까 하는 나의 거창한 기대와는 달리, 이유는 간단했다. 신발을 벗으려다 보니 양말에 구멍이 나 있었다는 것이다. 고로, 뒤돌아올 수 밖에 없었다는 눈물없이 들을 수 없는 이야기. 작가 입장에서는 양말의 구멍 같은 것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고 했으나, 만일 지금이라도 같은 상황이라면 절대로 들어가지 못할 것이다. 나는 그런 초대를 받은 기억(?)이 없으니 패스. 


아이들은 언제나 뛰어 다니고, 어른들은 언제나 찬찬히 걷는다.

아이들은 빨리 어른이 되기 위해 더디게 가는 시간을 뛰어가고, 어른들은 시간의 빠름을 탓하며 찬찬히 걷는다.

어른이 된다는 건... 시간을 잃어버리는 슬픔을 의미하지만 잃어버린 시간만큼 기억이라는 게 남으니 다행이다.

잃어버린 시간의 기억을 우리는 추억이라 부른다. 

어른이 되어, 그래도 찬찬히 걸을 수 있는건 잃어버린 시간들이 아깝지 않아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파페포포 투게더]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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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1. 7. 18:55

인생은 경제학입니다, 공병호 도서2009. 1. 7. 18:55

쓰레기. 다른 좋은 표현도 있겠지만 가장 여과없이 표현하자면 그렇다. 예전에 TV에서 좋은 인상으로 보여졌던 공병호라는 경제학자가 이런 책을 쓴 줄은 꿈에도 몰랐다. 생각도 나와 많이 다르지만, 책에 대해서 악담을 퍼부은 이유는 기대했던 바와는 전혀 다른 내용을 담고 있었기 때문이다.

제목을 보나 또 책의 표지에 나온 말들을 종합해보자. 경제학적 사고로 '자유'와 '부'를 선택하라, 유한한 자원을 효율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세상의 경제학이라면, 무한한 욕망을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것이 인생의 경제학이다... 아직 경제를 잘 모르고 또 살아가야 할 날이 많은 사람으로서 무언가 소중한 교훈을 얻는 것까진 안바라도 경제에 대한 기본적인 소개 정도는 해줄줄 알았다. 물론 처음부분 책을 읽을때는 그런대로 실물경제나 통화흐름에 대한 이해를 얻을 수 있었고, 책도 쉽게 씌여져 있어서 쏙쏙 들어왔다. 하지만 책이 후반부로 가면서 원론적이고 이론적인 문제에서 떠나 특정 경제주체를 대변하고, 편중된 시각을 여지없이 보여주면서 자신의 경제적 이념 또는 가치관을 전달하는데 여념이 없었다. 어떤 식으로 정책이 이루어져야 하며, 사람들은 부자들을 미워해서는 안된다고 이야기하는 등 다소 자기 주장에 가까운 내용들을 담고 있었다. 얼마전 읽었던 헨리 헤즐럿의 '경제학 1교시'를 읽을때와 비슷한 기분이 들었다. 

요즘 정치, 사회 여러 면에서 이념 논쟁이 한창이다. 이념이라는 것이 개인에게 적용이 되면 가치관 정도로 해야할까. 이념의 범위는 요즘 사회 전반을 넘나든다. 그래서인지 옳고 그름이라는 것을 정하고 판단하기가 쉽지만은 않은 일이다. 결국 어떤 가치관을 가지고 사느냐, 어떤 소신을 마음에 담느냐의 문제가 아닐까. 경제 역시 여러가지 방법들이 있고, 다 옳은 듯이 보이지만, 자신의 가치관과 소신에 비추어 판단해야 하는 것만 같다. 

먼저 결혼. 결혼은 두번에 걸쳐 이야기가 나오는데, 맞벌이에 대한 것과 그리고 결혼의 경제적인 효과, 그리고 출산에 대한 것이다. 공공연하게 많은 분들이 결혼은 빨리 할수록 좋다고 이야기한다. 특히 경제적인 관점과 2세의 건강 때문에. 일찍 돈을 모을 수 있고, 미래를 빨리 설계할 수 있으며, 젊은 시절에 아이를 키워 노년의 부담이 없는 장점을 이야기한다. 경제 문제에 있어서는 절대적으로 자유주의를 신봉하는 저자는 결혼 문제에 있어서만큼은 이혼이라는 것이 경제적으로 큰 손실인만큼 섣부른 이혼은 좋지 않다고 이야기한다. 참고 살아보라는 이야기인듯. 

맞벌이는 출산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가계를 꾸려나가기 위한 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맞벌이가 다소 필수적으로 되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즉 생계형 맞벌이가 많이 존재하고 있고, 현실적으로 많은 사람들은 아이들의 교육 때문에 더 많은 가계 비용을 지출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공교육의 강화나 출산 장려와 같은 정책이 필요하다고 이야기한다. 저자의 주장은 요약해보면 이렇다. 사교육 심리를 인정하고, 또 영어교육을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조선일보의 이야기에 동조하는 이유도 다 요약과 같은 맥락에서 보면 될 것 같다.

사교육이나 교육 문제는 인간의 욕망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이는데서부터 출발한다. 욕망은 만족되어야 한다. 욕망을 만족시키려면 선택의 자유, 경쟁할 수 있는 자유를 허용해야 한다. 

그냥 하나만 이야기하고 싶다. 여러 사람들이 사는 공동체에서 모든 사람들의 욕망이 모두 만족되는 사회가 가능할 것인지, 욕망으로 뒤덮인 사회가 건강한지 묻고 싶다. 더불어 자꾸 자유를 강조하는데, 부의 세습을 인정하고 사회의 약자에 대해서는 가혹할 정도의 정책을 주장하는 입장인 것을 보면, 그 자유는 '기회의 평등'까지도 묵살하는 '약육강식'의 밀림사회를 묘사한 것과 비슷하다.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려운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이타심을 키우라고 교육을 하면서 어른들은 정작 나 하나 살고 다른 사람들을 죽이려는 마인드이다. 

책의 마음에 들지 않는 내용이나 의아한 부분을 하나하나 언급하기 위해서 그 페이지마다 포스트잇을 끼워놓았는데, 답답한 생각만 든다. '부자를 환영해야 하는 이유' 라는 주제로 언급한 부분을 보면 총칼로 사람을 위협해 재산을 빼앗지 않는 한 비난받아야 할 하등의 이유가 없다는 것이고, 부를 추구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승리자이기 때문에 월계관을 씌워주는게 맞다고 이야기한다. 우리나라에서 잘못된 부의 형성 과정이 많았기 때문데 다소 편견이 있다는 걸 강조한다손 치더라도, 손에 총과 칼만 없으면 어떤 짓이든 용인되어야 한다는 사고방식은 이해하기 어렵다.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고 역설하지만, 때론 자본의 횡포란 총과 칼보다 무서운 것이다. 그것을 잘 아는 사람이 물리적인 총을 언급해야만 하는 것인지.

물론 공감하는 부분도 몇몇 있다. 외모지상주의와 투자수익률에 대해서 쓴 부분. 외모지상주의를 거부할 필요가 없이 트렌드로 인정하고 그 안에서 적응력을 기르라는 말에는 일부분 동의한다. 리스크가 클수록 수익률이 높고, 향후의 변화를 감안하면 단순히 공직보다는 자신의 커리어를 쌓아나가는게 좋을 수도 있는 말, 건달들이 빵집의 유리창을 깨고 도망친 사례를 들어 유리집의 이익보다는 빵집의 손해에 초점을 맞추어 설명한 것 등은 나름 공감이 되었다. 

저자의 기본적인 마인드는 자유 시장경제이고, 더불어 시장만능주의이다. 최소한의 정부 역할은 인정하지만 정부의 시장 개입은 선이 아니고 악이라고 단정한다. 오로지 경쟁을 통해서만 사회는 보다 경쟁력이 강해진다. 그 과정에서 도태된 자에 대한 배려는 없다. 도태되면 도태되는대로 혹독한 재활을 통해서 일어나는 것은 본인의 몫인 것이다. 얼마전 조순 서울대명예교수는 '시장 만능주의는 실패했다고'고 주장했다. 그 명백한 증거가 지금의 경제위기이고, 그것이 시장만능을 주장한 미국에서 시발한 위기라고 강조했다. 시장은 스스로 통제 기능을 상실하고 말았고, 겉잡을 수 없는 연쇄파급으로 전세계를 경제위기로 몰아넣었다. 이것은 불과 1년전의 이야기로 이 책은 그 1년 전에 씌여졌다. 2009년인 지금의 경제에 대해 직접적으로 주장하는 것은 없지만 장미빛 전망을 그대로 인용하면서 간접적으로 동조하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상황이 정반대다. 

지금의 상황에 대해서는 어떤 식으로 변명을 할지 자못 궁금하지만, 또 다른 이유를 거론할 것이다. 지금도 시장에 모두 맡겨야 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은 것을 보면, 지금의 경제위기도 원인을 달리 파악할 것이 분명하다. 

경제, 어디에서 보느냐의 문제이다. 옳고 그름을 떠나 거부감이 우선 앞서는 책이었다. 돈을 버는 것이 다른 사람을 도와서 얻은 과일이라는 생각을 한다면, 세금을 통해서 좀 나누어주는 것은 무어 그리 억울할까 싶다. 
 
서로 다른 마인드를 갖고 있는 문국현과 공병호의 토론 뉴스를 링크한다.

http://news.naver.com/vod/vod.nhn?mode=LSS2D&office_id=130&article_id=0000023848&section_id=115&section_id2=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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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1. 5. 21:14

사랑후에 오는 것들, 공지영 도서2009. 1. 5. 21:14

양귀자, 은희경과 함께 한국의 여성 작가 트로이카를 형성하고 있는 공지영님의 작품이다. 적어도 내가 아는 선에서는 그렇게 세분이다. 양귀자는 희망(잘가라 밤이여), 은희경은 새의 선물이라는 작품으로 나에게만큼은 잘 각인되어 있는 반면, 공지영님의 이름은 널리 들어서 알고 있지만, 딱히 특정 작품을 접해봤는지 기억이 분명치 않다. 그런 상황에서 접하게 된 공지영님의 '사랑 후에 오는 것들'. 물론 희망이나 새의 선물의 포스는 감히 따라가지 못했지만, 그렇지만 또래 나이의 주인공 덕분에 무난하게 책에 몰입하면서 흥미롭게 잘 읽었다. 아마도 2-3년 전이나 3-4년 후에 이 책을 처음 접했다면 지금과는 또 느낌이 달랐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책을 읽은 후에 공지영 작가님에 대한 간단한 프로필을 살펴보았다. 3번의 결혼과 3번의 이혼이 가장 먼저 눈에 띄었다. 사랑에 관한 소설을 처음 쓴 것이라고 하는데, 작가님이 생각하고, 또 이상적으로 바라보는 사랑은 아마도 소설속 여주인공 '최홍'의 사랑인 것 같다. 실제로 작가는 그런 사랑, 변하지 않고, 퇴색되지 않는 사랑을 꿈꾸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그러한 바램을 소설 속에서 실현시키기 위해 작가는 소설속 여주인공이 집요하게 느껴질만큼 과거에 집착하도록 만들어 준다. 사랑이라는 아름다운 이름으로. 이유야 어찌되었든 3번의 결혼이라는 삶의 자취와 자녀를 비롯한 가족을 바라보는 태도에서 다소 작가님이 자유분방하신 분이 아닌가 성급하게 추측을 해본다. 절대 소설속 여주인공이 되시진 못하리라.

최홍이라는 29살 먹은 여주인공이 작중 화자가 되어 이야기를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15년간 최홍의 주위를 맴돌며 그녀의 마음을 얻고자 노력하는 모범생이자 조건남 민준, 홍이네 가족 중에서 가장 비중있는 아버지, 홍의 지고지순한 사랑의 대상인 일본인 준고, 심리학을 전공하면서 기가막힌 남녀의 연애심리학을 읊지만 정작 자신은 챙기지 못한 코믹한 캐릭터 최홍의 친구 지희 정도가 이야기를 이끌어나는 주체들이라 할 수 있겠다. 준고와 홍이의 만남은 그냥 그 자신들에게는 일생일대의 운명이자 절대적 인연일지 모르지만, 오다가다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가장 흔한 연인의 부류 중 하나다. 다만 준고가 일본인이라는 것에서 극적인 요소를 좀 더한다면 더할까. 책을 읽은 다른 누군가의 말처럼 작중 화자인 최홍은 다소 오바스러운 면이 없지 않다. 차분하게 주말에 클래식을 감상할 줄도 알고, 자기 자신을 다스리는 뜀박질도 할 줄 아는 배운만큼 배운, 나이도 먹을만큼 먹은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무식한 사랑을 고집할 수 있는지, 이해가 된다ㅋ 하지만 스스로의 사랑을 묘사하는 부분에는 과장된 면이 많고, 의도된 멋스러움도 없지 않다. 어찌보면 가장 단순한 감정일텐데.

과거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했을 법한데, 지금 나는 모두가 다 이해가 된다. 관계라는 것이 결코 옳고 그름으로 규정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사랑이라는 감정에 의무를 지우는 것만큼 위험한 일도 없다는 것을 알게 되었으니까. 민준의 가슴을 아프게 만드는 최홍은 그래서 떳떳하다. 민준에게 미안하지만, 자신의 희생을 담보로 할만큼 그가 소중하지 않다. 민준 역시 억울해하거나 자책할 필요는 없다. 스스로의 선택이었으니까. 파리의 연인에서의 이동건과 김정은의 관계처럼 서로 '희망고문'으로 얽혀 있는 경우 홍의 행동과 말투를 탓하기 이전에 그 선택에 대한 감수는 민준의 몫이라는 것을 독자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지희의 이야기처럼 그런 사랑은 그저 이기적일 뿐이다. 상대방의 감정을 배려하지 않은 일방적 걸음이라면 그 결과에 대한 책임 역시 본인이 져야 한다. 미안하다고 해서, 많이 받았다고 해서 사랑할 수는 없는 일이니까.

역시 가장 반가운 것은 지희라는 인물의 등장이고, 비록 본인은 그럴듯한 이론가에 불과했지만, 그 이론에 대해서는 일면 공감하는 면이 있다. 어떻게 생각하면 너무 계산적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교감은 서로의 심리 안에서 이루어진다. 보편적 심리라는 것이 존재할 것이고, 또 그것에 어느정도 수긍해야만 한다. 그 판단과 행동은 당사자의 몫이지만. 지희가 지난 사랑에 목을 매는 최홍에게 들려준 주옥(?)같은 말들을 몇마디 옮겨 보기로 한다.

여자들은 말이야. 너무 매사를 사랑에 연결시키는 경향이 있어. 사랑에 집착하는 순간, 거기에 모든 걸 거는 순간, 남자는 떠나가는거야. 남자의 본성은 사냥꾼이거든. 잡아 놓은 짐승보다는 아슬아슬하게 도망다니는 언덕 위의 날렌 사슴을 쫓아가고 싶어하거든. 우리 여자들이 할 일은 그들의 그런 본성을 인정하고 쿨해지는거야. 그래야 남자들의 사냥 본능을 만족시킬 수 있거든.

난 우리 여자들이 사랑 때문에 울고불고하는 거, 이제 그만해야 된다고 생각해. 솔직히 민준이가 네 곁을 그렇게 맴도는 것도 결국은 네가 그애에게 쿨하게 대하기 때문이야. 네가 민준씨 나 사랑해, 하고 해롱해롱거리면 아마 사랑의 유효기간은 벌써 끝나버렸을 거라고 나는 단언할 수 있어.

사랑이 깨어지는 방식은 이래. 남자와 여자가 첫눈에 반한다. 대개는 남자가 먼저지. 그러다가 여자가 그 마음을 받아들인다. 사랑이 익숙해질수록 여자는 사랑을 조금씩 더 많이 주기 시작한다. 그러면 남자는 슬슬 여자가 지겨워지고 새로운 사람에 흥미를 느낀다. 여자는 더 집착하고 그럴수록 남자는 더 떠나고 싶어하고, 그럴수록 여자는 더 집착한다. 그리고 끝. 속편은 이거야. 여자는 친구를 붙들고 남자들은 다 똑같아. 나는 다시는 사랑하지 않겠어, 라고 다짐하지. 마지막은 긴 눈물과 중무장한 분노. 그리고 냉소지. 하지만 어느 날인가 또다시 여자를 흥미있게 생각하는 남자의 구애를 받게 되고 이렇게 끝도 없이 다시 시작되는 거야.

물론 모든 일은 케이스 바이 케이스이다. 그런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다. 대체적으로 그런 경향이 있더라, 정도로 받아들이면 되겠다. 그냥 사랑을 주제로 한 한편의 베스트극장을 본 것 같은 기분이 든다. 사랑에 울고불고 하는 것은 바보같은 짓이라고 입에 거품을 물던 지희가 사귄 사람도 아닌, 사귀어보지도 않은 사람에게 고백하고 차여서 울고 불고 하는 장면에서는 뿜을 수밖에 없었다. 책에서 최고였던 장면이었다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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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8. 11. 28. 13:11

인간문제, 강경애 도서2008. 11. 28. 13:11

고등학교로 다시 돌아간 기분. 한국 근현대 단편소설의 단골 소재를 오랜만에 접했다. 국문학의 역사에서 '일제시대'는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대체적으로 그 시기의 작품들은 문학사적으로 봤을때도 높은 평가를 받고 있는 것 같다. 수능시험을 볼때도 으레 일제시대의 작품들은 특별한 의미를 지닌다. 핍박과 억압 속에서 자신의 의도를 우회적이면서도 상징적으로 표현하려는 시도가 많았기 때문에, 문제를 풀어야 하는 학생들의 입장에서 화가 날만도 하다. 물론 나 역시 그 당시에 그런 억울함이 없었던 것도 아니다. 문장에 가리워진 숨겨진 의도를 파악하라니... 애초에 작가는 의도조차 하지 않았던 많은 숨겨진 의미들이 탄생되는 건 아닌지 의심스러워지기까지 했다. 사회화의 과정에서 사회의 빈공간에 딱딱 박아넣을 적합한 하나의 모형을 양산하는 교육은 아닌지, 개인의 개성과 창의는 말살하면서 가장 보편적으로 여겨지는 생각만을 하도록 내몰리는 건 아닌지.. 무조건 짝다리에, 가방은 언제나 한쪽 어깨로만 메야만 가장 고등학생답다고 여기는 거친 영혼에게 그러한 반항심은 당연한 것이 아니었을까... 라고 스스로 면죄부를 부여하고자 한다ㅋ

여튼 책과는 전혀 상관없는 내용으로 횡설수설했다. 일제시대이면서 동시에 지주와 소작농이라고 하는, 지배구조 및 계층화가 분명한 사회 속에서 무력한 개인의 희생과 사회 개혁의 목소리를 동시에 암시하는 소설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사람들은, 혹은 자라나는 청소년들은 어떤 느낌이 들까. 가혹하게 착취하는 지주의 인격에 대해 분노할까, 아니면 불행한 생을 타고난 소설 속 선비의 인생에 동정을 느끼게 될까, 지식인의 실천적인 행동에 박수를 보내고 싶을까... 분명한 것은 밉고, 불쌍하고, 대견한 인물이라는 것은 작품 속에서 하나의 구성 개체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작가가 이야기하고자 하는 전체를 읽으려면 역시 그 소설이 씌여진 시기와 배경, 그리고 작가의 철학과 삶을 이해하지 않으면 불가능하다. 물론 일제시대에 씌여진 비슷한 구조의 많은 소설들은 굳이 작가의 삶까지 파고들지 않아도 능히 그 의도롤 파악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강경애의 '인간문제' 역시 같은 범주에서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고로 구체적인 내용은 생략ㅋ

요즘 김연아가 국민 여동생으로 각광받고 있다. 개인적으로 박찬호를 비롯해서 국가를 대표한다고 일컬어지는 스포츠 스타에 대해서는 큰 관심이 없다. 물론 잘하면 좋지만, 그 이상으로 열광하지 않는다고나 할까. 얼마전 김연아의 라이벌이기도 한 아사다 마오의 팬들이 만든 카페의 한 댓글로 인해 논란이 일었었다. 논란이라기보다는 기삿거리에 혈안이 되어 있던 기자가 애써 먹이감을 찾아낸 결과로 보여지긴 하지만. 그 내용인 즉, 시상식에서 키미가요를 듣고 싶었는데 아쉽다, 그래도 프리는 1위 했으니까 다행이다, 라는 댓글이었다. 말이야 어찌되었던 댓글의 의도는 간단하다. '종합 1위를 했으면 좋았을텐데...'. 여튼 나는 그렇게 받아들였다. 

부끄럽게도 나 역시 키미가요에 대해서 자세히 알지 못했다. 그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 학교에서 배운 적이 있었을지 모르나, 그렇게 큰 비중이 있었던 것 같지는 않다. 물론 무지가 잘못된 행동을 덮어준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만일 일정한 나이가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모르고 있었다면, 그 사람을 가르치지 못한 사회와 교육의 책임이 더 클 것이요, 만일 알면서도 별생각없이 쓴 글이라면 그 사람의 경솔을 탓할 수 있을 것이요, 만일 역사적 사실까지 인지하고도 본인의 마음이 그렇게밖에 되지 않는다고 한다면, 그저 안타까울 수밖에. 어느정도 수위로 욕을 들이부울 수 있는지, 혹은 비난과 비판에 대한 정당성 부분에 대해서는 확신이 없다. 아사다 마오를 응원하는 것쯤은 개인의 자유의지 영역에서 얼마든지 가능한 일이고, 키미가요를 듣고 싶다는 마음 역시 어떠한 근거로 비난을 할 수 있을지 난감한 부분이 있다. 다만 국민들은 국가를 사랑해야 할 의무가 있고, 충성해야 할 책임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또는 그런 전제가 있다고 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지겠지만 말이다. 

키미가요가 일본의 국가로서 자격이 있느냐의 부분에 대해서 일본 내에서도 의견이 엇갈린다고 한다. '애국심'이라는 것도 참 양날의 검이라는 생각이 든다. 자신에게 관대하고, 다른 이에게는 가혹한 진정한 사스퍼거는 '애국심'이라는 감정에 숨어 있는 개인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어찌보면, 일본의 집안일 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우리 모두의 일 같기도 하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일본이 자신들의 지난 과오를 인정한다면, 지난 역사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고, 그 과정의 희생자로부터 거부감이 있는 노래를 국가로 서슴없이 인정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곧 과거의 과오가 아닌 과거의 영광으로 역사를 받아들인다는 의미가 되며, 지난시절 국가간의 그릇된 관계에 대해서 어떤 사과의 메세지가 없다고 한다면, 결코 관계의 회복이란 있을 수가 없다. 과거나 역사에 집착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하는 것은 아무 이유없이 한대를 얻어맞고, 좋다고 '헤헤~'거리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그럴 경우 가해자는 또다시 한대를 더 때리는 것에 대한 거부감이 없을 것이다. 국가도 개인과 마찬가지로 최소한의 자존심은 지켜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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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8. 10. 14. 12:48

홀로사는 즐거움, 법정 스님 도서2008. 10. 14. 12:48

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현 존재다.

 

그때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어 내가 그 곳에 그렇게 존재한다.

오늘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내 실존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나를 형성하고 내 업을 이룬다.

이와 같이 순간순간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만들어간다.
 
행복을 이야기할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일을 생각한다. 이것이 행복의 기초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웃과의 관계.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해진다.

적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정을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인간성을 이루고 감성을 키우는가. 사람이 타고난 본성을, 그리고 사람다운 특성을 인간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물을 가까이하면 은연중에 그 사물을 닮아간다. 꽃을 가까이하면 꽃 같은 인생이 된다. 이것이 신비로운 우주의 조화다. 누구나 바라는 그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러난다. 오늘 내가 겪은 불행이나 불운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남을 원망한느 그 마음 자체가 곧 불행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서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들어간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 생각과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다. 사람은 순간순간 그가 지닌 생각대로 되어간다. 이것이 업(카르마)의 흐름이요, 그 법칙이다.

그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우주가 그에게 준 선물이며 그 자신의 보물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 일에 눈멀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자유로워진 사람.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너무 많아 넘치기 떄문일 것이다.

내가 나 자산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 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람됨이다.

무릇 인간관계란 신의와 예절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좀더 빠르게 대신 '안전하게, 더 안전하게, 좀더 안전하게'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사람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자리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이와 같은 자연의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은 새로운 나다. 개울물이 항상 그곳에서 그렇게 흐르고 있어 여느 때와 같은 물이면서도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듯이 우리들 자신의 '있음'도 그와 같다.

흐르는 물처럼 늘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왔고, 살만큼 살다가 떠날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렵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을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이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혼로 있을때 우리와 더 가까이 있다. 홀로 있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 존재와 대화하는 일이 인디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배이다. 자주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 지내본 사람이라면, 홀로 있음 속에는 나날이 커져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맞닿은 즐거움이다.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전체적인 자기일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나온다.

어려서부터 일류만을 지향하면서 비정한 경쟁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인간적인 폭이나 여백이 생길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 선민 의식에 도취되어 이기적인 벽에 갇히기 쉽다.

인고의 의지가 선연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마음에 걸린 것이 있어 본 마음인 따뜻함을 잃으면 불행해진다.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사람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좋은 친구를 통해 삶의 질서와 규범을 배우고 익히면서 인격적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림자 노동'이란 말이 있는데 집안에서 식구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보살피고 거들며 헌신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디서나 참고 견뎌야 할 일들이 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그것은 그날 내 삶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보람달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충만하여 마치 달을 향해 우주비행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12월은 말수가 적어진 침묵의 달

함석지붕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젖은 들짐승처럼 기가 죽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샜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빗줄기 하나하나가 무슨 사연을 지닌 채 소곤소곤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밤을 스치고 지나가는 저 빗소리로 인해 숲은 조금씩 여위어가고, 하늘은 구름을 떨치고 하루하루 높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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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