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보고 무엇을 듣고 무엇을 먹으며, 어떻게 말하고, 무슨 생각을 하며, 또 어떤 행동을 하느냐가 그 사람의 현 존재다.
그때 그곳에 내가 할 일이 있어 내가 그 곳에 그렇게 존재한다.
오늘 나는 이와 같이 보고, 듣고, 먹고, 말하고, 생각하고, 행동했다. 이것이 바로 현재의 내 실존이다. 그리고 이런 일들이 나를 형성하고 내 업을 이룬다.
이와 같이 순간순간 당신 자신이 당신을 만들어간다.
행복을 이야기할때 우리는 먼저 자기 자신과 가족의 일을 생각한다. 이것이 행복의 기초 단위이기 때문이다.
하루하루 사는 일에 재미를 느끼는 사람은 행복하다.
이웃과의 관계.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해진다.
적거나 작은 것을 가지고도 고마워하고 만족할 줄 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이다. 현대인들의 불행은 모자람에서가 아니라 오히려 넘침에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음이 가난한 사람은 아무것도 더 바라지 않고, 아무것도 더 알려고 하지 않으며, 아무것도 더 가지려고 하지 않는다. 욕망으로부터의 자유, 지식으로부터의 자유, 소유로부터의 자유를 말하고 있다.
우리가 불행한 것은 가진 것이 적어서가 아니라 따뜻한 가슴을 잃어가기 때문이다. 정을 나누어야 한다.
우리는 지금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사실에 고마워할 줄 알아야 한다. 이 세상에 영원한 존재는 그 누구에게도, 그 어디에도 없다.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그러니 행복과 불행은 밖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내 스스로 만들고 찾는 것이다.
행복은 이웃과 함께 누려야 하고 불행은 딛고 일어서야 한다. 우리는 마땅히 행복해야 한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인간다운 삶인지를 물으려고 하지 않는다.
그러면 무엇이 인간성을 이루고 감성을 키우는가. 사람이 타고난 본성을, 그리고 사람다운 특성을 인간성이라고 부른다.
어떤 사물을 가까이하면 은연중에 그 사물을 닮아간다. 꽃을 가까이하면 꽃 같은 인생이 된다. 이것이 신비로운 우주의 조화다. 누구나 바라는 그 행복은 어디서 오는가. 행복은 밖에서 오지 않는다. 행복은 우리들 마음속에서 우러난다. 오늘 내가 겪은 불행이나 불운을 누구 때문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남을 원망한느 그 마음 자체가 곧 불행이다. 행복은 누가 만들어서 갖다주는 것이 아니라 내 자신이 만들어간다.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세상은 우리 생각과 행위가 만들어낸 결과다. 사람은 순간순간 그가 지닌 생각대로 되어간다. 이것이 업(카르마)의 흐름이요, 그 법칙이다.
그 사람만이 지니고 있는 특성이 있다. 그것은 우주가 그에게 준 선물이며 그 자신의 보물이다.
자기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자신들의 분수에 맞도록 열어 보인다.
언제 어디서나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라. 그러면 그가 서 있는 자리마다 향기로운 꽃이 피어나리라, 자신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못하면 불행해진다.
일을 열심히 하면서도 그 일에 빠져들지 않는 사람. 일에 눈멀지 않고 그 일을 통해서 자유로워진 사람.
아마도 당신들은 당신들이 갖고 있는 좋은 옷과 가구와 재산이 너무 많기 때문에 거기에 시간과 기운을 빼앗겨 기도하고 명상하면서 차분히 자신을 되돌아볼 시간이 없을 것이다. 당신들이 불행한 것은 가진 재산이 당신들에게 주는 것보다도 빼앗는 것이 더 많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현대인들이 불행한 것은 너무 많아 넘치기 떄문일 것이다.
내가 나 자산의 영혼과 얼마나 일치되어 있는가에 의해 내 인간 가치가 매겨진다. 따라서 내가 하고 싶은 일에 열정적인 힘을 부여하는 것은 나 자신의 사람됨이다.
무릇 인간관계란 신의와 예절로써 이루어진다.
우리가 세상을 살아가는 일도 이와 같다. 순간순간 한 걸음 한 걸음 내딛으면서 산다. 문제는 어디를 향해 내딛느냐에 있다. 당신은 지금 어느 곳을 보고 한 걸음, 한 걸음 내딛고 있는가.
약한 것이 강한 것을 이긴다.
부드러움이 단단함을 이긴다는 것, 이것이 세상 사는 지혜의 전부이니라.
생명을 위한 것이라면 좀더 빠르게 대신 '안전하게, 더 안전하게, 좀더 안전하게'가 되어야 한다.
무엇을 위해 그렇게 해야 하는지, 사람이 참으로 해야 할 일이 무엇인지를 묻게 한다.
우리가 가야 할 곳은 그 어디도 아닌 우리들 자신의 자리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되찾으려면 이와 같은 자연의 순리를 겸허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오늘의 나는 어제의 내가 아니다. 지금 이 자리에 이렇게 있는 것은 새로운 나다. 개울물이 항상 그곳에서 그렇게 흐르고 있어 여느 때와 같은 물이면서도 순간마다 새로운 물이듯이 우리들 자신의 '있음'도 그와 같다.
흐르는 물처럼 늘 새롭게 살 수 있어야 한다.
걷는 것은 자신을 세계로 열어놓는 것이다. 발로, 다리로, 몸으로 걸으면서 인간은 자신의 실존에 대해 행복한 감정을 되찾는다. 걷는다는 것은 곧 자신의 몸으로 사는 것이다.
사람은 본질적으로 홀로일 수 밖에 없는 존재다. 이 세상에 올 때도 홀로왔고, 살만큼 살다가 떠날때도 홀로 간다. 가까운 사람끼리 함께 어울려 살면서도 생각은 저마다 다르다. 사람의 얼굴이 각기 다르듯 삶의 바탕을 이루고 있는 업이 서로 다르기 때문이다.
홀로 사는 사람들은 진흙에 더렵히지 않는 연꽃처럼 살려고 한다. 홀로 있을때 전체인 자기의 있음이고, 누구와 함께 있을때 그는 부분적인 자기이다.
'홀로'라는 낱말 자체는 물들지 않고, 순진무구하고 자유롭고 전체적이고 부서지지 않는 것을 뜻한다. 인간은 본래 전체적이기 때문이다.
진리는 혼로 있을때 우리와 더 가까이 있다. 홀로 있음 속에서 보이지 않는 절대 존재와 대화하는 일이 인디언들에게는 가장 중요한 예배이다. 자주 자연 속에 들어가 혼자 지내본 사람이라면, 홀로 있음 속에는 나날이 커져가는 기쁨이 있다는 것을 알 것이다. 그것은 삶의 본질과 맞닿은 즐거움이다.
고독할 수는 있어도 고립되어서는 안된다. 고독에는 관계가 따르지만, 고립에는 관계가 따르지 않는다.
삶에는 즐거움이 따라야 한다. 즐거움이 없으면 그곳에는 삶이 정착되지 않는다. 긍정적인 인생관을 지니고 스스로 만들어가야 한다. 전체적인 자기일때 순간순간 생기와 탄력과 삶의 건강함이 배어나온다.
어려서부터 일류만을 지향하면서 비정한 경쟁속에서 자라왔기 때문에 인간적인 폭이나 여백이 생길 여유가 없었다. 따라서 자칫 선민 의식에 도취되어 이기적인 벽에 갇히기 쉽다.
인고의 의지가 선연한 꽃으로 피어난 것이다.
멀리 밖으로 찾아 나설 것 없이 자신의 일상생활에서 그것을 느끼면서 누릴 줄 알아야 한다.
마음에 걸린 것이 있어 본 마음인 따뜻함을 잃으면 불행해진다.
입 안에 말이 적고, 마음에 일이 적고, 뱃속에 밥이 적어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나는 잊지 않으려 한다.
사람은 어디서 무슨 일을 하면서 살건 간에 좋은 친구를 통해 삶의 질서와 규범을 배우고 익히면서 인격적으로 교감할 수 있어야 한다.
'그림자 노동'이란 말이 있는데 집안에서 식구들이 아무런 대가도 바라지 않고 보살피고 거들며 헌신하는 일을 가리킨다.
우리가 몸담아 사는 이 세상이 천국이 아니라 참고 견디면서 살아야 하는 '사바세계'라는 사실을 안다면 어디서나 참고 견뎌야 할 일들이 있다.
내 주변에서 일어나는 일을 될 수 있는 한 그대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그것은 그날 내 삶의 과제이기 때문이다.
보람달을 안고 돌아오는 길이 너무 충만하여 마치 달을 향해 우주비행을 하고 있는 듯한 생각이 들었다.
12월은 말수가 적어진 침묵의 달
함석지붕에 쏟아지는 빗소리에 젖은 들짐승처럼 기가 죽어 꼬박 뜬눈으로 밤을 샜다.
사람이 무엇을 위해 살아야 하는지, 어떻게 사는 것이 자신의 삶을 제대로 사는 것인지 묻고 또 물어야 한다.
빗줄기 하나하나가 무슨 사연을 지닌 채 소곤소곤 내 안으로 스며드는 것 같다.
밤을 스치고 지나가는 저 빗소리로 인해 숲은 조금씩 여위어가고, 하늘은 구름을 떨치고 하루하루 높아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