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선택한 이유?
A : 에리히 프롬 알아?
B : 응, 들어봤지.
A : 에리히 프롬이 쓴 대표적인 저서 '자유에서의 도피 알아?'
B : 응, 들어봤어.
A : 읽어봤어?
B : 아니--;
물론 읽어봐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면, 책에 대한 호기심과 책을 읽을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충분하다. 우연하게도, 집 안에 책이 굴러다니고 있어서 접할 수 있었다. 위의 대화는 실제로 책을 읽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아니다. 시간의 순서로 배열을 하자면,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던 중, 집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독서를 하던 중 위의 대화가 떠올랐고, 실제로 책을 읽고 나서 친구와 똑같은 유형의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나는 대화에서 A를 맡았고, 안타깝게도 위의 대화는 친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떤 책이든, 책을 읽고자 하는 동기와 그러한 동기를 실현시켜줄만한 시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실제로 실천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간단한 진리를 재확인한 셈이다.
철학 서적은 유독 현학적인 단어와 문장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도구인 마냥,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더 난해하게 느껴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1차적인 이해를 넘어 2차적인, 때론 중의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까, 에만 골몰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한번더 생각할 만한 구실을 준다는 거창한 목적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쉽게 읽혀지고 쉽게 이해되는 것만큼 좋은 책은 없는 것 같다. 애초에 저자가 다분히 현학적인 문구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능히 짐작히 가능하지만, 더불어 번역도 수준 이하의 느낌이 들었다. 원서의 취지를 그대로 살려낸다는 의미에서 직독직해를 즐겨 썼는지 모르겠지만, 영문식의 문장을 이해해야 하는 독자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가지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분 저자의 논리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또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련 분야의 일천한 지식과 현학적 문구에 대한 몰이해로 상당부분 왜곡된 독서가 이루어졌고, 또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 포기'의 체념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앞뒤 분간이 안가는데다가 몇줄만 넘어가도 이게 도대체 상관관계가 있는 이야기인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자유에서의 도피.
주어진 자유가 클수록, 그에 따르는 책임이 크고 감당하기 힘이 들수록,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개인들은 적극적인 자유에로의 긍정보다는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길을 택하게 된다. 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받고, 학교에서 알려주는 지식을 습득하고, 종종 부여되는 숙제를 하면 된다. 학생 신분에 따르는 제약과 억압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무한 자유를 만끽하고, 물론 자유가 독립을 전제로 하진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부모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동시에 제약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인격적으로 독립한 후에 한단계 더 높은 자유를 얻은 셈이다. 하지만 자유를 얻긴 했으나,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한 경쟁의 무대에 내팽개쳐졌으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도태되기도 한다. 그때 느끼는 거대한 사회에서의 개인의 무력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크다. 결국 자유를 감당해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오히려 자유롭지 못해 예속되었던 과거의 향수에 젖게 된다.
이런 문제는 여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공기업 구조조정이 요즘 사회 전반적인 화두가 되고 있다. 개인적인 신상과도 관련이 있어서 스스로도 느끼는 바다. '자유'의 측면에서 대기업은 공기업에 비해 자유롭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더 따르게 되는데, 능력에 따라 차등이 이루어지고, 그 곳에서 스스로의 선택이 개입된다. 본인이 원하고 더 노력하면 더 높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구조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유'를 갈구하지 않는다. 일정한 보수와 적당한 일이라면 어느정도 자신의 자유를 저당잡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성격의 변형을 이루고, 자기 암시를 통해서, 스스로 '자유의 실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삶'이 진정 우리의 의지의 발현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한 '의지'는 언제 형성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속성인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다. 사회는 각 개인에게 일정한 틀을 제공하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도록 종용한다. 그것은 어린시절 교육을 통해서, 혹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의식 속에 뿌리깊게 박히고, 그것이 마치 태어날때부터 그랬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게끔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범위를 벗어나는 자유의지나 성격은 '정신분열', '신경증' 등의 결함으로 규정지어지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유별나다고 하는 것, 창의적이라고 하는 것 역시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다. 그러한 사회적 울타리에서 그나마 가장 벗어나서 '자유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직업이 예술가라고 프롬은 규정하고 있다.
독일 태생이고 또 나치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서 그런지, 저자는 나치즘과 히틀러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저자는 히틀러에 대해 권위주의적인 인간이며 동시에 사디스트라고 규정했다. 둘은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속성인데, 아랫사람들을 지배하고, 윗사람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는 매저키즘과 사디즘의 복합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중을 멸시하고 무시하면서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디즘의 전형적인 속성이며, 그것이 히틀러가 대중을 대하는 태도라고 역설한다.
사실 인간 의식 이전에 원초적인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분석이나 또는 체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내가 아닌 또다른 '자아'에 대한 정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걸까. 어떤 범위까지를 스스로 '자아'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걸까. 프롬의 말을 빌어 현대사회의 '톱니바퀴의 일부'로 전락해버린 개개인이 접근하기엔 너무도 버겁고도 먼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녕 우리는 체면에 걸린 상태로 살고 있으며, 미처 그것을 의식할 새도 없이 삶을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결국 진정한 '자유의 실현' 또는 '자유에로의 긍정'은 요원한 일일까. 나 역시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자 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사상, 이데올로기가 역사적 흐름을 타고 어떤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좀더 필요할 것 같다. 개인의 사회적 인격의 형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 흐름과무관하지 않으며, 역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인격이나 본성이라는 것도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받게 된다. 돌고 도는 톱니바퀴 속에서 역사는 항상 '현재형'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이 우리 시대가 찾은 해답이다. 불만의 욕구와 회의가 커지면 커질수록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게 되어 우리는 또다른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풀어해치는 것과 더불어, 우리는 '현재의 자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 되기에 이 책처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인 고찰을 해내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현재로부터 설계해나갈 수 있는 미래를 구상해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책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만큼 횡설수설하는 면이 있었다. 비록 100% 소화해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몇몇가지 분석과 고찰에 공감도 하며, 또 의구심을 갖으면서 뜻깊은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기회를 내기 쉽진 않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프롬이 관심을 가졌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좀더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