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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 2. 17. 18:44

단 하루만 더, 미치 앨봄 도서2009. 2. 17. 18:44



회사에서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을 빌려 단숨에 쭉 읽어나갔다. 마음이 따뜻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천국에서 만난 다섯 사람'과 비슷한 느낌이 들었고, 가족애를 한번 생각해보게 하는 소설이었다. 더불어 후회하지 않는 삶을 위한 소중한 가치에 대해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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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2. 15. 23:59

자유에서의 도피, 에리히 프롬 도서2009. 2. 15. 23:59

책을 선택한 이유?

A : 에리히 프롬 알아?
B : 응, 들어봤지.
A : 에리히 프롬이 쓴 대표적인 저서 '자유에서의 도피 알아?'
B : 응, 들어봤어.
A : 읽어봤어?
B : 아니--;

물론 읽어봐야 할 필연적인 이유가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이런 대화가 오고간다면, 책에 대한 호기심과 책을 읽을 동기를 부여하는 것은 충분하다. 우연하게도, 집 안에 책이 굴러다니고 있어서 접할 수 있었다. 위의 대화는 실제로 책을 읽기 전에 나누었던 대화가 아니다. 시간의 순서로 배열을 하자면, 마땅히 읽을 만한 책을 찾고 있던 중, 집에서 굴러다니고 있는 책을 우연히 발견하여, 독서를 하던 중 위의 대화가 떠올랐고, 실제로 책을 읽고 나서 친구와 똑같은 유형의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나는 대화에서 A를 맡았고, 안타깝게도 위의 대화는 친구에게 동기를 부여하는데는 실패하고 말았다. 어떤 책이든, 책을 읽고자 하는 동기와 그러한 동기를 실현시켜줄만한 시간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실제로 실천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간단한 진리를 재확인한 셈이다.  

철학 서적은 유독 현학적인 단어와 문장에 집착하는 경향이 있다. 진리에 이르는 유일한 도구인 마냥, 어떻게 하면 독자에게 더 난해하게 느껴지게 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1차적인 이해를 넘어 2차적인, 때론 중의적인 표현으로 독자를 혼란에 빠뜨릴 수 있을까, 에만 골몰하는 것 같다. 물론 그렇게 함으로써 독자에게 한번더 생각할 만한 구실을 준다는 거창한 목적이라도 있다면 모를까, 쉽게 읽혀지고 쉽게 이해되는 것만큼 좋은 책은 없는 것 같다. 애초에 저자가 다분히 현학적인 문구를 즐겨 사용했다는 것은 능히 짐작히 가능하지만, 더불어 번역도 수준 이하의 느낌이 들었다. 원서의 취지를 그대로 살려낸다는 의미에서 직독직해를 즐겨 썼는지 모르겠지만, 영문식의 문장을 이해해야 하는 독자로서는 여간 고역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책을 끝가지 완독할 수 있었던 것은 일부분 저자의 논리에 공감하는 부분도 있고, 또 흥미로운 부분도 있었기 때문이다. 물론 관련 분야의 일천한 지식과 현학적 문구에 대한 몰이해로 상당부분 왜곡된 독서가 이루어졌고, 또 어느 부분에 대해서는 '완전 포기'의 체념에까지 이르기도 했다. 도무지 무슨 이야기를 하는 것인지, 앞뒤 분간이 안가는데다가 몇줄만 넘어가도 이게 도대체 상관관계가 있는 이야기인 것인지 의구심이 들기도 했다. 

자유에서의 도피.

주어진 자유가 클수록, 그에 따르는 책임이 크고 감당하기 힘이 들수록, 고독과 불안에 시달리게 된다. 그래서 개인들은 적극적인 자유에로의 긍정보다는 자유에서의 도피라는 길을 택하게 된다. 학생 시절을 떠올리면, 부모님이 주신 용돈을 받고, 학교에서 알려주는 지식을 습득하고, 종종 부여되는 숙제를 하면 된다. 학생 신분에 따르는 제약과 억압이 많이 따르기 때문에, 스스로 자유를 갈망하게 된다. 그리하여 대학에서 무한 자유를 만끽하고, 물론 자유가 독립을 전제로 하진 않는다, 어떤 식으로든 부모님께 의지한다는 것은 동시에 제약이 따르는 일이기도 하다. 대학을 졸업하고, 취업해서 부모님으로부터 경제적, 인격적으로 독립한 후에 한단계 더 높은 자유를 얻은 셈이다. 하지만 자유를 얻긴 했으나, 예전처럼 호락호락하지 않다. 무한 경쟁의 무대에 내팽개쳐졌으며, 스스로 자신의 능력을 증명해내지 못하면 도태되기도 한다. 그때 느끼는 거대한 사회에서의 개인의 무력감이란 이루 말할 수 없을만큼 크다. 결국 자유를 감당해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오히려 자유롭지 못해 예속되었던 과거의 향수에 젖게 된다. 

이런 문제는 여러가지로 적용할 수 있다. 공기업 구조조정이 요즘 사회 전반적인 화두가 되고 있다. 개인적인 신상과도 관련이 있어서 스스로도 느끼는 바다. '자유'의 측면에서 대기업은 공기업에 비해 자유롭다. 자본주의의 속성을 더 따르게 되는데, 능력에 따라 차등이 이루어지고, 그 곳에서 스스로의 선택이 개입된다. 본인이 원하고 더 노력하면 더 높은 결실을 얻을 수 있는 구조이다. 그런 점에서 요즘의 많은 젊은이들은 '자유'를 갈구하지 않는다. 일정한 보수와 적당한 일이라면 어느정도 자신의 자유를 저당잡히는 것을 주저하지 않는다. 실제로 자신이 선택한 길이기 때문에 성격의 변형을 이루고, 자기 암시를 통해서, 스스로 '자유의 실현'을 이루었다고 생각하기도 한다. 

에리히 프롬은 더불어 우리가 생각하고 지향하는 '삶'이 진정 우리의 의지의 발현인가에 대한 의문점을 제기하고 있다. 그러한 '의지'는 언제 형성이 되는지에 대한 의문으로, 태어나기 전부터 인간에게 주어진 자연스러운 속성인가에 대해서도 의구심을 갖는다. 사회는 각 개인에게 일정한 틀을 제공하면서, 그 안에서 움직이도록 종용한다. 그것은 어린시절 교육을 통해서, 혹은 사회화 과정을 통해서 의식 속에 뿌리깊게 박히고, 그것이 마치 태어날때부터 그랬고, 그것이 너무도 당연하게끔 생각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그 범위를 벗어나는 자유의지나 성격은 '정신분열', '신경증' 등의 결함으로 규정지어지고, 정상적인 인간으로 대우를 받지 못하게 된다. 유별나다고 하는 것, 창의적이라고 하는 것 역시 사회가 허용하는 범위 안에서다. 그러한 사회적 울타리에서 그나마 가장 벗어나서 '자유의지'를 실천할 수 있는 직업이 예술가라고 프롬은 규정하고 있다. 
 
독일 태생이고 또 나치에 반대하여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서 그런지, 저자는 나치즘과 히틀러에 대한 관심도 지대했다. 저자는 히틀러에 대해 권위주의적인 인간이며 동시에 사디스트라고 규정했다. 둘은 어느정도 일맥상통하는 속성인데, 아랫사람들을 지배하고, 윗사람에게 복종하고자 하는 인간의 심리는 매저키즘과 사디즘의 복합적 성격을 나타낸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대중을 멸시하고 무시하면서 그들에게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것이 사디즘의 전형적인 속성이며, 그것이 히틀러가 대중을 대하는 태도라고 역설한다. 

사실 인간 의식 이전에 원초적인 문제에 접근한다는 것은 보통 난처한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프로이트의 무의식 분석이나 또는 체면에 걸린 사람들처럼 내가 아닌 또다른 '자아'에 대한 정의를 어떤 식으로 해석해야 하는걸까. 어떤 범위까지를 스스로 '자아'라고 규정지을 수 있는걸까. 프롬의 말을 빌어 현대사회의 '톱니바퀴의 일부'로 전락해버린 개개인이 접근하기엔 너무도 버겁고도 먼 대상이 되어버린 것은 아닐까. 정녕 우리는 체면에 걸린 상태로 살고 있으며, 미처 그것을 의식할 새도 없이 삶을 쉽게 포기해버리는 것일까. 지금과 같은 체제에서 결국 진정한 '자유의 실현' 또는 '자유에로의 긍정'은 요원한 일일까. 나 역시 그런 질문들에 대한 대답을 회피하고자 한다. 

에리히 프롬의 사상을 좀더 체계적으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와 사상, 이데올로기가 역사적 흐름을 타고 어떤식으로 변화되어 왔는지에 대한 고찰이 좀더 필요할 것 같다. 개인의 사회적 인격의 형성이라는 것도 알고 보면 그 흐름과무관하지 않으며, 역으로 말하자면 개인의 인격이나 본성이라는 것도 사회의 구조에 영향을 받게 된다. 돌고 도는 톱니바퀴 속에서 역사는 항상 '현재형'이다. 지금 우리는 '민주주의'와 '자본주의'를 선택한 사회 속에서 살고 있고, 그것이 우리 시대가 찾은 해답이다. 불만의 욕구와 회의가 커지면 커질수록 변화에 대한 목소리가 커지게 되어 우리는 또다른 해답을 찾게 될 것이다. 모든 것을 풀어해치는 것과 더불어, 우리는 '현재의 자아'에 집중해야 한다. '과거'는 현재와 미래를 바라보는 창이 되기에 이 책처럼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역사적인 고찰을 해내는 것은 대단히 뜻깊은 일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현재로부터 설계해나갈 수 있는 미래를 구상해내는 것, 그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과제이다. 

책에 대한 이해력이 떨어지는만큼 횡설수설하는 면이 있었다. 비록 100% 소화해내지는 못했다고 하더라도, 몇몇가지 분석과 고찰에 공감도 하며, 또 의구심을 갖으면서 뜻깊은 독서를 했다고 생각한다. 기회를 내기 쉽진 않겠지만, 기회가 된다면 프롬이 관심을 가졌던 프로이트와 마르크스의 사상을 좀더 살펴보는 것도 도움이 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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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2. 9. 13:08

배려(마음을 움직이는 힘), 한상복 도서2009. 2. 9. 13:08

음력기준 09년의 새해 첫해가 시작되는 날, 오랜만에 내려간 천안의 큰 형 댁 성은이 방에서 처음 만났던 책이다. 처음 몇장을 읽고 위차장이라는 주인공을 대했을때 무언가 알수 없는 관심이 끌렸다. 열심히 일했고, 또 빈틈없이 살아왔고, 회사에 공헌했다고 생각해서 승진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지만, 어라, 곧 구조조정 당할지도 모르는, 회사내에서 별볼일 없는 부서로 발령이 나버린 것이다. 순간 책의 제목이 '배려'라는 사실과는 무관하게, 일을 잘하는 것과 사람을 다루는 것은 엄연히 다른 사실이라는 생각이 떠올랐다. 단지 주어진 일만 잘하는 직원이 차장이라는 간부로 승진을 시킬때, 회사 입장에서는 '일 잘하는 직원'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생각했던대로, 위차장은 직원에서 간부로 다시 태어나는 과정에서 소중한 경험을 하고, 또 소중한 가치를 깨닫게 된다는 내용으로 요약된다.

배려. 훈훈한 책의 내용도 내용이거니와 길지 않은 스토리로 지루하지 않게 읽을 수 있었지만, 책을 덮고 처음 느꼈던 생각은 '배려'라는 것이 정말 어려울 것이라는 느낌이었다. 배려라는 것이 삶을 사는데 개인이 반드시 지녀야 할 덕목인지, 즉 사회적인 성공을 위해서도 필수불가결하게 갖추어야 할 요소인지, 아니면 인간다운 삶을 통한 개인의 만족, 감정의 정화 정도를 위한 삶의 에피타이저 정도의 가치를 지니게 되는지, 여전히 판단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남을 도우면서 살아봐야 아무 소용없다, 배려해봐야 자신만 손해다, 잘못하다간 뒤통수맞는다, 등등 사회는 결코 우리가 생각하는 아름다운 동산이 아니라는 이야기를 자주 듣게 된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 도무지 다른 사람을 배려했기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지 않고, 비정상적인 수단과 방법으로 떵떵거리면서 사는 사람들도 많다. 가까운 예로, 얌체 운전자들이 더 빨리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라는 생각은 어떤 관점에서 적용을 해도 비슷한 결론에 이르르고 만다. 안타깝기도 하며, 실망스럽기도 하면서 동시에 내 자신에게도 동참할 것을 끊임없이 속삭이는 현실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부르는, 또 다루고 있는 '배려'의 범위는 단지 출근버스 안에서 할머니께 자리를 양보해드리고, 약 10여분간 마음속에서 느끼는 뿌듯함과는 차원이 다르다. 타인을 위해서 스스로 치명적인 희생을 할 준비가 되어 있는가, 라는 자문에 답을 내릴 수 있을까.

역지사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려'에 대해서 생각해 보는 것이 전혀 무의미한 일은 아니다. 어느 정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개개인의 이기적인 속성과 사회가 공통적으로 느끼는 이타적인 행위들이 적절히 조화를 이루어야만 공동체가 원활하게 굴러갈 수 있을 것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는 것. 세 사람이 길을 가고 있으면, 그 중에 스승이 반드시 한명이 있다, 라는 말에서 느낄 수 있듯이 어떤 사람에게서든 좋은 점과 나쁜 점을 추려내어 배울점은 배우고 나쁜점은 '타산지석'을 삼을 수 있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바라보며'그럴 수도 있겠구나'라고 생각하게 된다면, 희생을 동반하는 적극적인 관점에서의 배려는 아닐지라도, 소극적 의미에서의 배려인 '공감'은 배려의 가장 기본적인 마음가짐일 것이다.
 
책 속의 위차장이 프로젝트 1팀으로 옮겨 인간적인 분위기에서 일을 하고, 또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과정에서 알 수 있었던 것은 포괄적으로 봤을때 '배려'일수도 있지만, '팀플레이'의 관점에서 볼 수도 있다. 얼마전 친구들과 2:2 위닝 축구 게임을 하는데 1:1로 승부를 했을때는 결코 부족한 전력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2:2로 하게 되면 번번히 참패한 일이 있었다. 오로지 내 플레이만 했기 때문이다. 상대방의 플레이 스타일을 파악한 뒤 서로의 장점을 조합해내려는 노력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1+1=2의 효과도 가져오지 못한 셈이다. 그것도 일종의 배려라면 배려랄 수도 있겠다. 

더불어 프로젝트 1팀 팀장인 공자왈의 모습에서 '리더쉽이 갖추어야 할 조건'도 다시 생각해보게 된다. 물론 현실은 이상적이진 않다. 책 속의 공자왈 팀장은 운이 좋게도 일이 뜻대로 풀렸고, 팀원들이 잘해주었지만, 마냥 느슨한 플레이로 게임에서 승리할 수는 없다. 직원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한 이끌어내기 위해선 공자왈 팀장과 같은 여유와 배짱이 필요하지만, '당근과 채찍'을 어떤 식으로 활용하는지에 대한 세부적인 고민은 필요할 수 있겠다.

사스퍼거. 자신에겐 한없이 관대하고 남들에겐 무자비한 사람. 달리 말하면 역지사지고 배려고 전혀 없는 무개념의 사람이다. 소설 속에서도 등장을 시키고 있는데, 급박한 상황에 이르게 되니 사스퍼거의 부당한 요구에도 별 수 없이 맞추게 된다. 전체 속에서의 예외. 그 점이 힘든 부분이다. 털어서 먼지 하나 안 나오는 사람 없다는 이야기가 결코 우스갯소리가 아닌 이유다. 

책에서 세가지 종류의 배려가 나온다. 자신을 위한 배려, 타인을 위한 배려 그리고 모두를 위한 배려이다. 그 중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것은 역시 자신을 위한 배려다. 그 상황을 즐기고, 또 스스로에게 어떤 안정적인 상황이 제공되지 않는다면, 사스퍼거의 부당한 요구에도 굴복할 수 밖에 없다. 따라서, 스스로가 일정한 범위내에서 마음가짐에 여유를 갖고, 안정을 찾아야 한다. 이상하지만 '일단 나부터 좀 살자'라는 결론?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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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2. 3. 09:33

우리는 사랑일까, 알랭드 보통 도서2009. 2. 3. 09:33

알랭드 보통의 또다른 소설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에 이어 정말 재미있게 읽었다. 어려운 문장이 많아서 중간중간 이해하기 귀찮은(?) 부분들이 있었지만, 전체적인 내용에 공감하기도 하고, 또 의아해하기도 하면서 흥미롭게 읽었다. '왜 나는 너를~'에 비해 철학적인 논거 및 이론과의 연관은 다소 억지스러운 면이 있거나 부자연스러운 느낌이 들었지만, 남녀간의 연애에서 있을 수 있는 관계를 잘 설정했다고 생각한다.
 
지난 소설도 마찬가지였지만 한 순간을 기준으로 사랑은 언제나 '불균형'적이라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작가의 관점에서 보았을때, 연애라는 것은 항상 다양한 변수 속에서 이루어지지만, '무게의 추'가 어느 쪽에 기울어져 있느냐에 따라서 서로의 행동 양식에 차이가 생길 수 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어느정도 성격이나 의지가 그러한 행동 양식에 영향을 끼치는 것은 사실이지만,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고 연애에서도 똑같이 입장에 따라 변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이라는 순수한 감정이 대상이어서 다소 안타까운 마음이 들지만, 관계에서도 언제나 강자와 약자가 존재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사실이다. 


전형적인 남녀관계의 묘사. 즉 엘리스라는 여성에게 먼저 에릭이라는 남성이 접근을 한다. 그동안 여러번의 연애 경험을 통해서 나름 이 시기의 이상적인 남성상을 형성해 놓았던 엘리스로서는 그 남성상에 나름 부합하는 매력적인 남성이 접근을 하자 쉽게 마음을 연다. 엘리스에게는 어떤 식으로 관계를 설정하느냐의 문제보다는 그 사람을 얼마나 좋아하고, 또 얼마나 그 상황을 만끽하느냐가 중요했다. 그만큼 감정에 충실했다는 이야기다. 반면 에릭은 어느정도 관계가 형성되자 상대방을 배려하기보다는 자신의 테두리 안으로 그녀를 끌어들이고자 했다. 좋은 표현으로 하면 그렇지만, 나쁘게 말한다면 제 멋대로 하는 것을 엘리스가 참아내고 받아주리라 생각한다. 어떤 식으로든 엘리스는 자신을쉽게 떠나지 못할 것이라는 믿음. 더 나아가 그런 식이라면 엘리스의 존재는 자신의 삶의 작은 부분에 불과하다거나, 설령 엘리스가 떠나더라도 큰 타격은 없을 것이라는 믿음이 바탕에 깔려 있을 것이다. 언제든지 떠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동반된다면, 그런 어정쩡하고 이기적인 태도 같은 건 애초부터 없을 것이다. 

제 멋대로인쪽은 에릭이고, 양보하는 쪽은 엘리스지만 그렇다고 누가 더 바람직하고, 누가 더 나쁘다고 쉽게 단정지을 수 없다. 관계는 언제나 상대적이다. 둘의 관계에서 엘리스가 더 양보한다고 해서 엘리스라는 인격을 가진 한 사람이 에릭이라는 사람보다 배려심이 크고, 더 좋은 성격을 가졌다는 결론을 이끌어내기 어렵다는 이야기다. 엘리스는 단지 에릭이라는 사람에 대해 집착까지는 아닐지라도, 환상을 품고 있고, 그래서 그를 떠난다는 것을 상상해보지 못했다. 에릭을 떠나기 싫은 마음이기에, 약자의 입장이기에 그의 요구를 들어줄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저자는 작가가 사랑에 대해 시니컬한 태도를 취하면서 동시에 피터와의 만남으로 인해 희망의 메세지를 전달했다고 해석했지만, 개인적으로 피터의 등장은 나름 중요한 의미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터는 에릭과 엘리스의 관계가 보다 빨리 끝날 수 있도록 해주는 촉매가 되었다. 달리 말하면, 엘리스가 에릭이라는 늪에 빠져 나름 객관적인 시각을 견지할 수 있도록 소지를 제공했다고 본다. 결국 그 관계의 부당성, 일방성을 피터와의 수평적인 관계와 비교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진 것이다. 

에릭이 제멋대로이고 일방적인 면이 있는 사람이고, 피터는 마음이 따뜻한 사람일 것이라는 게 엘리스가 내린 결론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피터와의 첫만남 역시, 에릭과의 그것과 크게 다르지 않음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에릭과의 처음 만남에서도 엘리스는 자신과 잘 통하는 사람을 만났다고 생각했고, 이것저것 신경을 써주는 에릭에게 감사하는 부분이 많았다. 피터를 본격적으로 만나게 되는 이후의 시간들은 독자의 상상에 맡겼지만, 행여 피터와의 만남도 결국 에릭과의 만남과 똑같은 동선을 그리게 된다면, 엘리스는 스스로를 돌아봐야만 한다. 사랑에 대한 지나친 의존성일 수도 있고, 배려와 자기 주장, 인내 사이에서의 '제자리 찾기'에 실패한 것일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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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09. 1. 28. 13:10

젊음의 탄생, 이어령 도서2009. 1. 28. 13:10

딱 보니 이제 갓 대학에 입학하는, 상아탑의 입구에 들어서고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 말씀, 저 말씀을 해주고 계신다. 이미 그 시절로부터 10여년이 흘러버린 지금의 내가 읽기에 적당한 책인지 다소 의구심이 들기도 하나, 좋은 정보와 흥미로운 이야기들이 몇몇 담겨 있는 것 같았다. 월드컵 응원 관련된 글에서부터 '떴다 떴다 비행기' 노래를 예로 들며 나라의 단합과 또 젊은이로서 가져야 할 꿈과 이상을 예찬했다. 뭐, 그렇다는 이야기다.

젊음은 나이가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생각이 만드는 것이란 말에는 공감하는 면이 있다. 10년 전 그 시절을 거들떠보지 않는 나에 비하면 항상 젊은이들의 꿈과 이상을 고민하시는 이어령 선생님께서 더 젊은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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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