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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 5. 31. 01:07

키노의 여행, 시구사와 케이이치 도서2010. 5. 31. 01:07

남의 아픔을 아는 나라 그리고 다수결의 나라. 평화로운 나라 등등 여러나라들을 키노와 아르메스라는 모토라도 오토바이가 함께 기행을 해나가는 옴니버스식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영웅삼국지'에서 여포와 적토마 사이에서의 우정처럼 인간과 인간 사이가 아닌 인간이 아닌 대상과의 교감은 늘 '순수'로의 따뜻한 여행을 떠나는 기분이다. 물론 키노와 에르메스는 그다지 애절하거나 절실한 감성적 교감을 나누지는 않는다. 친구처럼 부담없이 편한 존재다. 둘을 생각하고 있노라면 꼬마자동차 붕붕이 생각난다.

각각의 나라들은 그 나라만의 특징을 갖고 있고, 하나의 스토리마다 담고 있는 의미가 있다. 이를테면 '남의 아픔을 아는 나라'에서는 완전해지고자 하는 인간의 주제넘은 욕심을 비웃으면서 '커뮤니케이션의 중요성'을 이야기하고 있다. 의사소통은 감추고자 하는 인간의 내면 깊숙한 비밀을 캐어내는 게 아니라 대화속에서 상대를 인정하고 존중하는데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신선한 주제를 색다르게 접근한게 인상적이었다.

'다수결의 나라'에서는 민주주의의 가장 기본적인 원칙이라고 일컬어지는 다수결 원리의 위험성을 지적하고 있다. 흔히들 '마녀사냥'이라고 부르는 행위 역시 다수의 군중이나 집단이 '다수'라는 힘을 빌어 '소수' 내지는 개인을 핍박하고 위협할때 쓰는 용어다. '다수'라는 법칙이 항상 옳은 것만은 아니라고 경각심을 일깨워주고 있다. 여담이지만 포르토벨로의 마녀를 읽어서 떠오르는 것이겠지만 '마녀사냥'이라는 용어의 탄생 역시 역사적인 사건들이 토대가 되었음직 하다. 시대를 지배하는 주된 정서와 사상이 '소수'를 배척할때 그것이 얼마든지 '마녀사냥'이 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키노의 여행은 여러권의 책들로 구성되어 있고, 애니메이션으로도 나와 있지만 첫번째 에피소드들을 본 것으로 만족할까 한다. 나라마다 새로운 특징이야 있겠지만 비슷한 스토리들이 계속 반복되는 건 아닌지 염려가 되고, 자칫하면 지루해질 수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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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5. 28. 12:22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도서2010. 5. 28. 12:22

'어린왕자'를 읽는 것 같은 따스함과 신비함이 베어있다. '자아의 신화'라는 자신만의 지표를 찾아나서는 양치기 소년의 이야기다. 너무도 아름답고 감미로운 영혼의 이야기이건만 그것을 받아들일 마음의 준비가 충분히 되지 않아 책에 대한 감동을 충분히 느끼지 못했다. 안타깝다. 멀티프로세싱에 약한 탓이다. 선천적으로 주어진 메모리를 늘릴 수 없는 탓에 보다 개별 프로그램의 효율성을 높일 수밖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머리를 따라 살지 말고 가슴을 따르라고. 요즘 제2의 성공신화를 쓰고 있는 애플의 스티브 잡스 역시 가슴에게 물어보라고 한다. 무엇을 하고 살고 싶은지. 양치기소년 산티아고처럼 자신의 삶을 송두리째 뒤바꾸는 모험을 감행할 순 없을 수도 있지만 살면서 늘 자심의 마음과 교감하는 것, 열린 마음과 오감으로 사람과 세상을 느껴보고 싶다. 일상의 소소함에서 행복을 찾을 수 있다면 바로 그런 견고한 철학과 삶에 대한 애정이 토대가 되어야 한다.

요즘 시대는 너무 복잡한데다가 모두가 스피드를 강요하고 있다. 그래서 '가슴'이 가리키는 방향대로 살 기회를 갖지 못한다. 조용히 공기의 감촉을 느끼고, 작은 소리에 귀기울이며, 모든 생명의 숨결을 느낄 시간을 갖지 못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절망할 일은 아니다. 기술의 발전은 결코 인류에게 해로운 게 아니다. 기술문명의 노예가 되느냐 주체적인 인간이 되드냐는 우리의 선택이다. 기술문명의 혜택을 충분히 수용하되, '자아의 신화'를 찾아나서는 산티아고의 마음을 배워야 한다.

모든 것이 하나이고 이 세상 모든 것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주장이 때론 아주 신빙성있게 들린다. 그래서 겁이 날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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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5. 25. 20:51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도서2010. 5. 25. 20:51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오로지 이 문구 하나에 매료되었다. 청소년 소설인지도 몰랐고, 어떤 내용을 다루었는지도 몰랐다. 왠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장면이 상상되었을 뿐이다. 실제 죽음에 이르는 시기에 실제로 그런 '유체이탈'을 경험할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철학적이기도 하면서 사색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는 최초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무난한 재미가 있었다.

쉽게 씌여지진 않았겠지만 쉽게 읽혔다. 전체적으로 내용을 미화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문체에 뚝뚝 묻어나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시체놀이를 즐겨하던 아이가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기에 자칫 곡해하면 인과관계로 오인될 수 있지만 그 아이의 죽음이 불의의 사고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전혀 없는 셈이다. 그러고보니 위기철 작가의 소설에도 유서를 쓰고 관에 들어가서 30분을 머무는 장례 이벤트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있었다. 죽음을 가까이 접했던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말처럼 때론 '죽음 앞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생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재준이가 오토바이를 타기 전에 되뇌었던 '설마 죽기밖에 더하겠어'라는 말은 그저 호기있게 외치는 상투적인 외침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평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또래의 아이들보다 진지하게 접근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의 벽이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찌보면 굉장히 성숙한 생각인데, 재준이에게 죽음은 색깔을 달리하는 또다른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너무 두렵다면 감히 목숨을 내놓고 무언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소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그런 '노하우'가 왠지 열여섯살의 어린 아이에게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왠지 그런 인위적인 해방구나 탈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만 하는 '현실도피'의 느낌이 일기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열여섯 소년에게 그저 죽음은 두렵고 슬픈 대상으로 남아있는게 더 좋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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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5. 25. 12:30

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도서2010. 5. 25. 12:30

책은 종종 혹은 자주 뜻하지 않는 행복을 선사한다.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며시 입꼬리가 올라가는 따뜻함을 맛보기도 하고, 때론 정적을 파괴하는 파안대소, 어떨 때는 짐짓 심각한 고민을 함께하는 것과 같은 미간의 찡그림이 함께한다.

'연애편지의 기술'이라는 다소 유치한 제목의 소설이었지만, 가벼운 마음으로 읽기에 좋을 것 같아 기분전환겸 선택했다. 외딴 곳에서 연구를 하는 주인공이 평소 알고 지내던 지인들과 서신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형식으로 되어 있다. 극적인 스토리보다는 담담하게 일상에 대한 이야기들을 풀어 나갔고, 청춘, 사랑, 연애, 미래에 대한 고민 등이 적절히 섞여 있었다. 초반부를 읽으면서 약간 코드가 들어맞는 것 같지 않아 다소 지루한 면도 있었으나 멋진 피날레로 말미암아 오히려 초반부의 어리숙한 내용들이 말미를 위한 포석이 아니었는가 싶을 정도였다.

그 피날레라는게 바로 필살의 '연애편지 완성본'이었다. '연애편지 대행업체 사장'을 꿈꾸노라고 이야기하는 주인공의 터무니없는 바램조차 현실성있게 느껴진다면 지나친 과장일까. 장문의 편지였음에도 불구하고 지루하지 않게 적절한 곳에 단어들이 고르게 잘 배치된 느낌이었다. 아주 잘 조립된 레고조각처럼. 어언 10년전 고백을 위해 27장을 썼다는 친구의 이야기를 들었을때 기겁했던 기억이 나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그 녀석 역시 필력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아니면 한달간 고민에 고민을 더한 역작이던지.

연애편지라는 것이 어떤 대단한 사랑의 언어로 점철된 특별한 고해성사가 아니라 일상적인 언어로 솔직담백하게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라고 저자는 말한다. 물론 그 드러냄이라는 것도 저 멀리서 잠깐 모습을 드러냈다 다가갈라 치면 사라지는 무지개처럼 아늑하고 여운이 있는 드러냄이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오히려 직접적인 사랑 고백보다도 훨씬 어려운 일인 셈이다. 마음이 담겨 있어서 상대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야 하고, 위트가 담겨 있어서 상대의 입가에 미소가 피어오르게 해야 하고, 추억이 담겨 있어서 상대의 눈가에 아련한 빛이 서리게 해야 한다. 그런 관점에서 책의 말미에 완성된 연애편지는 굉장한 수작이다. 사랑이 단지 단어 몇개의 나열로 불쑥 생겨나는 것은 아니겠지만 작은 사랑이 담겨 있는 곳이라면 묘약처럼 그 크기를 부풀어오르게 하는 힘이 있을 것이다.

앞서 편지는 단지 필력이 아닌 마음가짐에도 있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다짐하고 싶다. 누군가에게 읽히고자 씌여진 글을 일기와는 다르다. 우선 상대방을 깊이 이해해야만 하고, 이기적이어서도 안된다. 오랜시간이 흘러도 여전히 어린아이같은 스스로가 참 부끄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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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
2010. 5. 18. 16:46

껌, 위기철 도서2010. 5. 18. 16:46

'아홉살 인생'과 '고슴도치'의 저자 위기철 작가가 내놓은 최근의 작품으로 '껌'을 비롯한 몇편의 단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작을 생각했을때 이번에도 기대가 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기대가 크면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도 쉽지 않은 법. 위트보다는 나름 진지한 고민을 다룬 단편들이었다. 껌을 통해 자신의 한계를 테스트하고 극복해가는 첫번째 단편의 내용은 그 행위의 독특함과는 달리 저변에 깔린 마음이 모든 사람의 공감대를 형성하고 있다. 누구나 목표를 두고 도전을 한다. 책 속의 내용처럼 그것을 누가 또는 얼마나 다수가 알아주느냐에 따라 올림픽 종목이 되거나 기네스북의 한페이지를 장식하거나 이도저도 아니면 '미친사람' 취급을 받게 된다. 사회의 엄격한 잣대에 어눌한 태도로 대처하다가는 비슷한 관점에서 '부적응자'로 내몰릴 수도 있다. 인류가 공동체를 형성한 이래로 부메랑처럼 그 공동체가 우리를 겨냥하고 있으니 참으로 아이러니컬하다.  

어찌하였든 그런 씁쓸한 감상을 탈탈 털어내게 되면, 소설 속에서 우리는 다양한 사람들의 면면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의 삶에 대한 '이해'의 폭을 넓히고, 더 나아가 스스로의 삶을 반추할 계기를 가짐으로써 '인성'의 격을 높이게 된다. 혼자 읽지만 같이 사는 것, 그것이 바로 소설의 본질이 아닐까. 아무쪼록 되도록 많은 사람들과 함께 살고 싶은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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