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4. 23:27
아부지, 전무송, 박철민 영화2010. 7. 4. 23:27
이번 주말 연휴의 두번째 영화. 배우 박철민의 코믹연기를 보고 있노라면 종종 손발이 오그라들지만, 어느덧 매료되어 빠져들기도 한다. 영화의 제목과 포스터의 분위기가 마음에 와 닿아 별 기대없이 보았는데, 선생님 역으로 나온 박철민과 학생들 역할을 맡은 아역 배우들의 '코믹 에피소드' 덕분에 영화에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한평생을 농사꾼으로 살아온 고지식한 아버지를 주인공으로 내세운 진부한 스토리지만, 정감가는 시골풍경과 구수한 사투리, 잔잔한 배경음악 등이 어우러져 영화로서의 면모를 갖추었다. 감독이 영화 속에 담고 싶은 '주제의식'은 충분히 전달력이 있지만, 그것에만 치중한 나머지 영화가 너무 진지하고 심각해진 면이 없지 않다. 기발하고 짜임새있는 스토리나 극적인 반전으로 영화의 재미를 극대화하지 못할 바에는 '웃음 포인트'를 적절히 가미함으로써 영화의 전체적인 분위기를 살리고, 관객들의 집중력을 지속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았을까. 박철민 혼자서 그 역할을 도맡아 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생각' 속에 갇히는 것을 경계해야 함은 마땅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름의 원칙과 믿음, 소신이 없다면 매번 번민하고 방황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고, 자칫 '삶의 동기 부여' 자체가 미약해져 의욕 자체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런 '삶의 가치관'은 개개인의 일생을 지탱하는 근간이기도 한 셈이다. 더구나 나이가 먹을수록 '지난 과거'와 '영광스러웠던 추억'을 '그릇된 시간'으로 스스로 매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자신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깊은 좌절감과 패배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생을 땅에 의지해 농사짓고 살아온 아버지로서는 한글을 깨우치는 일보다 밭을 갈아엎는 일이 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고, 그런 원칙과 믿음이 '과거의 시간'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비단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나 학교 안팎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면 '살아온 시간' 즉 나이에 비례해서 '믿음'이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세대차'라고 하는 문화의 격변과 더불어 때로 '시니어 세대'와 '주니어 세대'간의 트러블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 혹은 前 세대들의 굳건한 '생각의 틀'을 무너뜨리려는 後 세대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번번히 좌절되곤 한다. 영화속에선 '아들의 죽음'이라는 피눈물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아버지가 변했다.
'오픈 마인드'라는 말은 그런 '생각의 틀'을 굳게 걸어잠그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나이에 무관하게 꾸준히 '생각의 융통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문화 혹은 올바른 생각에 항상 귀기울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나치게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기보다는 삶의 '초점'을 오늘에 맞출때라야, 비로소 '자기 생각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느날 문득 내 지난 날의 생각들이 모두 틀렸음을 인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항상 그 순간에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어떤 삶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대본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삶은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수학 문제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세상과 부단히 소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
나이를 먹을수록 '자기 생각' 속에 갇히는 것을 경계해야 함은 마땅하다. 하지만 오랜 시간을 살아가는데 있어서 나름의 원칙과 믿음, 소신이 없다면 매번 번민하고 방황하느라 많은 시간을 허비했을 것이고, 자칫 '삶의 동기 부여' 자체가 미약해져 의욕 자체를 떨어뜨릴 수도 있다. 그런 '삶의 가치관'은 개개인의 일생을 지탱하는 근간이기도 한 셈이다. 더구나 나이가 먹을수록 '지난 과거'와 '영광스러웠던 추억'을 '그릇된 시간'으로 스스로 매도하기란 쉽지 않다. 어쩌면 자신의 삶 자체를 송두리째 부정해야만 하는 상황이 닥친다면 깊은 좌절감과 패배감을 면하기 어려울 것이다. 평생을 땅에 의지해 농사짓고 살아온 아버지로서는 한글을 깨우치는 일보다 밭을 갈아엎는 일이 더 중요할 수 밖에 없다. 그렇게 믿으면서 살아왔고, 그런 원칙과 믿음이 '과거의 시간'에 정당성을 부여해준다.
비단 아버지만의 문제가 아니다. 회사나 학교 안팎에서 형성되는 다양한 인간관계를 보면 '살아온 시간' 즉 나이에 비례해서 '믿음'이 강해지는 경우가 많다. '세대차'라고 하는 문화의 격변과 더불어 때로 '시니어 세대'와 '주니어 세대'간의 트러블이 사회문제가 되기도 한다. 아버지 혹은 前 세대들의 굳건한 '생각의 틀'을 무너뜨리려는 後 세대들의 눈물겨운 노력은 번번히 좌절되곤 한다. 영화속에선 '아들의 죽음'이라는 피눈물의 희생을 치르고서야 아버지가 변했다.
'오픈 마인드'라는 말은 그런 '생각의 틀'을 굳게 걸어잠그지 않았음을 의미한다. 나이에 무관하게 꾸준히 '생각의 융통성'을 유지하고, 새로운 문화 혹은 올바른 생각에 항상 귀기울이는 자세를 갖추어야 한다. 지나치게 '과거'나 '미래'에 집착하기보다는 삶의 '초점'을 오늘에 맞출때라야, 비로소 '자기 생각에 대한 무조건적인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어느날 문득 내 지난 날의 생각들이 모두 틀렸음을 인지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억울해할 일도 아니다. 오늘을 사는 것이 중요하고, 항상 그 순간에 '소신'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으면 그것으로 만족스러운 일이다. 어떤 삶도 처음부터 끝까지 완벽한 대본을 갖추고 있지 못하며, 삶은 하나의 정답이 존재하는 수학 문제도 아니다. 다른 사람들을 이해하고, 세상과 부단히 소통하려는 노력을 게을리 해서는 안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