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 7. 18. 16:51
반가운 살인자, 유오성, 김동욱 영화2010. 7. 18. 16:51
2005년 우리나라의 극장수는 301개, 2008년에는 309개였다고 한다. 반면 스크린수는 2005년에 1648개, 2008년에 2004개였다고 한다. 극장수는 그대로인반면, 스크린수는 꽤 증가했다는 통계에서, 대형 프랜차이즈 영화관들이 시장을 잠식하면서 소규모 극장들이 자취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을 유추할 수 있다. 실제로 서울에 단관극장은 유일하게 서대문아트홀(舊 화양극장, 드림시네마)만이 남아있다고 한다. 영화 산업에 대한 이야기를 하자는 것은 아니고, 그저 현재 얼마나 많은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는지 궁금해서 자료를 검색해보았다. 지금 이 시간에도 2,000개가 넘는 화면에서 영화가 상영되고 있는 셈이다. 그렇게 많은 영화들이 상영되고, 또 상영되고 있다. 요즘은 모든 것이 '홍수의 시대'다. 흔히들 정보의 홍수 때문에 우리가 진정으로 습득해야 할 정보를 찾는 것이 더욱더 어려워졌다고들 한다. 그래서 어떤 정보가 필요한지를 잘 파악하고, 그 정보가 어디에 있는지를 잘 찾아내고, 습득된 정보를 잘 이해하고 조합하는 능력이 중요하다고들 한다. 마찬가지로 '영화의 홍수' 속에서, 어떤 영화를 선택해서 어떤 관점에서 보아야할지 궁금할때가 있다. 사회의 가치 체계가 다양해지고, 개인들의 기호 역시 다변화하는 시기에 '좋은 영화'와 '그렇지 못한 영화'의 구분 자체가 가능한 것인지, 영화 속에서 어떤 가치들을 발견할 수 있는지.
몇년전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D-War'를 놓고 문화평론가와 네티즌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학교 교수는 영화 속에서 스토리의 구성 요소인 '개연성'은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하고 감독을 향한 동점심을 유발하는 저질 영화라고 폄하했었다. 네티즌들은 반면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관객의 기호'일 뿐 아니라, 나름 열심히 노력해서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 그토록 '저질'스러운 평을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반발했다. 애초부터 논쟁 자체가 '감정' vs '감정'이었다. 최초에 어떻게 논쟁이 촉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진중권 前 교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영화에 대한 평을 한 것이 네티즌들의 감정적인 반감을 사게 되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진중권 교수의 평소 어투나 문투를 감안했을때, 당시 외국 시장 진출을 앞둔 '디워'를 염려하고 사랑하고 또 기대하는 네티즌이나 국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공격적인 어투'는 늘상 시원시원한 면이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기분이 더 상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적인 대립'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그럼, 우리 논리적으로 따져보자'고 한들 제대로된 논쟁이나 토론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더욱이 그것이 소수 대 다수의 대결구도라고 한다면 '마녀사냥'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좋은 영화'인지 '그렇지 못한 영화'인지를 놓고 토론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스토리(plot)도 있지만, 영상, 음악, 배우, 유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종합예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화다. 스토리가 다소 엉성하더라도, 아름다운 영상이나 음악에 매료될 수 있고, 배우의 열연에 감동할 수 있으며, 유머코드에 박장대소할 수도 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어지러운 '혼돈'을 표현하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듯이 예술엔 '규정된 틀'이 있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산물들을 평가하는 주체는 '평론가'나 '비평가'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론가나 비평가는 일반 대중이나 관객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따져보았을때 다수의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 '성공작'인 셈이다. 물론 '포퓰리즘'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상업영화'나 '대중영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보편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맞다. '상업성'과 '대중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신적인 가치를 외면하거나 주제 의식이 없어질 수 있다고 염려할 수 있지만, 그 가치들은 모두 '보편성'의 하부 목록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다.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여러가지 가치를 발견하면서 성숙해가기 마련이다. 독립영화와 같이 일반 '대중'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편성' 외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대중문화를 대변하는 '상업영화'와는 별개로 다양한 창작 욕구를 고취시키고,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존재 기반이 취약한 '독립영화'와 같은 영세 제작자들을 위한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독립영화 전문관이나 독립영화제 지원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일부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또 하나, 가치 체계가 다양해지고, 정보의 공유가 쉬워지며 대중 지식의 전문화가 진행되는 이 시대에는 문화 영역에서의 '전문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 역시 과거 대중을 가르치고 선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쓰레기 영화'인지 아닌지 논쟁을 한번 해보자는 태도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마녀사냥'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어떤 영화에 대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다.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고 하여 감정적으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것은 '소수의 이견'을 무시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한 모습이다. 2006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 심판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종적을 감춘 신문선 해설위원도 '마녀사냥'의 피해자다. 무조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온정을 주고 받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상대방과 상대 집단의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
몇년전 심형래 감독이 만든 영화 'D-War'를 놓고 문화평론가와 네티즌들 사이에서 뜨거운 논쟁이 벌어진 적이 있었다. 당시 문화평론가 진중권 중앙대학교 교수는 영화 속에서 스토리의 구성 요소인 '개연성'은 눈씻고 찾아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애국심에 호소하고 감독을 향한 동점심을 유발하는 저질 영화라고 폄하했었다. 네티즌들은 반면 영화를 선택하는 것은 '관객의 기호'일 뿐 아니라, 나름 열심히 노력해서 영화를 만든 감독에 대해 그토록 '저질'스러운 평을 하는 것은 너무하다고 반발했다. 애초부터 논쟁 자체가 '감정' vs '감정'이었다. 최초에 어떻게 논쟁이 촉발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후 사정을 따져보면, 진중권 前 교수가 어떤 경로를 통해 영화에 대한 평을 한 것이 네티즌들의 감정적인 반감을 사게 되어 시작된 것으로 보인다. 진중권 교수의 평소 어투나 문투를 감안했을때, 당시 외국 시장 진출을 앞둔 '디워'를 염려하고 사랑하고 또 기대하는 네티즌이나 국민들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 것이다. '공격적인 어투'는 늘상 시원시원한 면이 있지만, 받아들이는 사람 입장에서는 감정적으로 기분이 더 상하기 마련이다. 그런 '감정적인 대립'이 이미 시작된 상황에서 '그럼, 우리 논리적으로 따져보자'고 한들 제대로된 논쟁이나 토론이 이루어질리 만무하다. 더욱이 그것이 소수 대 다수의 대결구도라고 한다면 '마녀사냥'만이 기다리고 있을 뿐이다. 더욱이 '좋은 영화'인지 '그렇지 못한 영화'인지를 놓고 토론한다는 것이 가능하기나 한 일인지. 영화를 구성하는 요소들은 다양하다. 스토리(plot)도 있지만, 영상, 음악, 배우, 유머 등 다양한 요소들이 결합하여 하나의 종합예술을 이루고 있는 것이 영화다. 스토리가 다소 엉성하더라도, 아름다운 영상이나 음악에 매료될 수 있고, 배우의 열연에 감동할 수 있으며, 유머코드에 박장대소할 수도 있다. 기존의 질서를 파괴하는 어지러운 '혼돈'을 표현하는 것이 시대에 따라서 하나의 예술이 될 수 있듯이 예술엔 '규정된 틀'이 있을 수 없다.
개인적으로 문학, 미술, 음악 등 창작의 산물들을 평가하는 주체는 '평론가'나 '비평가'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평론가나 비평가는 일반 대중이나 관객이 판단을 내릴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역할을 하는 것이고, 결과적으로 따져보았을때 다수의 관객으로부터 호평을 받은 작품이 '성공작'인 셈이다. 물론 '포퓰리즘'만으로 성공과 실패를 가늠하는 것에 한계가 있을 수도 있지만, '상업영화'나 '대중영화'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면 '보편성'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이 맞다. '상업성'과 '대중성'에 치중하다 보면, 정신적인 가치를 외면하거나 주제 의식이 없어질 수 있다고 염려할 수 있지만, 그 가치들은 모두 '보편성'의 하부 목록에 해당된다고 볼 수도 있다. 관객들은 영화 속에서 여러가지 가치를 발견하면서 성숙해가기 마련이다. 독립영화와 같이 일반 '대중'만을 목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면 '보편성' 외에 다른 기준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현재의 대중문화를 대변하는 '상업영화'와는 별개로 다양한 창작 욕구를 고취시키고, 문화예술의 발전을 위해서는 존재 기반이 취약한 '독립영화'와 같은 영세 제작자들을 위한 보호장치가 필요하다. 이를테면 독립영화 전문관이나 독립영화제 지원 같은 것들이다.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어떤 일부 집단을 위한 것이 아니라 문화를 만들어나가는 '대중'을 위한 것이다. 또 하나, 가치 체계가 다양해지고, 정보의 공유가 쉬워지며 대중 지식의 전문화가 진행되는 이 시대에는 문화 영역에서의 '전문가'라는 이름이 무색할 뿐만 아니라 전문가 역시 과거 대중을 가르치고 선도하는 입장에서 보다 겸허해질 필요가 있다.
'쓰레기 영화'인지 아닌지 논쟁을 한번 해보자는 태도도 문제가 있지만, 그렇다고 '마녀사냥'이 문제가 없다는 것은 아니다. 누구든 어떤 영화에 대해 생각을 표현하는 것은 자유다. 그것이 기분이 나쁘다고 하여 감정적으로 매도하고, 배척하는 것은 '소수의 이견'을 무시하는 건강하지 못한 사회의 한 모습이다. 2006년 월드컵에서 우리나라에 불리한 판정을 내린 심판을 두둔하는 발언을 했다는 이유만으로 종적을 감춘 신문선 해설위원도 '마녀사냥'의 피해자다. 무조건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판단을 해야만 한다는 것이 아니라, 온정을 주고 받고 감정을 공유하는 것이 상대방과 상대 집단의 의견을 이해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행해져야 의미가 있다는 것이다. 아쉬운 면이 없지 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