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9. 9. 20. 06:58
국화꽃 향기, 장진영 영화2009. 9. 20. 06:58
얼마전 가슴아픈 소식이 있었다. 영화배우 장진영씨가 37세의 나이로 세상을 등졌다. 사인은 '위암'
사인이 '위암'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열연했던 영화 '국화꽃 향기'가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의 장진영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영화 속에서 박해일이 있었듯이, 실제의 장진영 옆에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남편이라는 설도 있다.)
대부분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오는 '새드 엔딩(sad ending)' 영화의 큰 특징은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비효과를 노린다는 점이다. 나는 잭 니콜슨 주연의 '애정의 조건'이라는 영화에서 그 점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일상적인 팍팍함이 있긴 하지만 천성이 발랄하고 생명력이 있었던 영화속 여주인공 데보라 윙거를 바라보다 그녀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서점을 배경으로 마치 연극 무대를 연상시켰던 영화의 첫머리 부분은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분위기가 계속 지속되어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 했으면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어색하고, '하하', '호호'거리는 느낌은 이야기가 시간에 따른 서술이 아닌, 어릴 적 풍경을 회상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액자 속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이랄까. 아마도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애정의 조건'에서와 같은 전, 후반부의 극적 대비는 사실 없었다. 영화 속 장진영의 관점에서 보면 한편의 '인간극장'처럼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그녀의 불행한 운명이 줄곧 그녀 곁을 맴돌았다. 행복은 잠깐이지만, 슬픔은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미처 관객에게 그 행복을 공감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담담하게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살 가능성이 높은 쪽을 택해야지'
영화 속 장진영의 생각이었다. 스스로 살기 위해 '아이'를 희생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확고했다. 이기적 유전자론의 관점에서처럼 인간이 진정 유전자들의 존속을 위한 생존기계일 뿐이라면, 새로운 유전자(아이)를 탄생시키고, 그 양육의 책임은 다른 사람(남편)에게 떠넘김으로써 그 목적을 다한 것이 된다. 그녀가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큰 손해지만, 아이가 살아날 확률이 자신이 살아날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를 아이로 대체하는데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 이론에 따르면 장진영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 관점에서 보자면 '숭고한 희생'이나 이기적 유전자론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절차'가 되는 셈이다. 읽고 있는 책이 그런지라, 그런 흥미로운 생각도 들었다.
살아있는 남편에게 '아이'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훗날 남편에게 큰 짐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속 박해일이 훗날 아이에게서 장진영의 채취를 느끼면서 살아가도록 유도할 수 있겠지만, 박해일이 누구보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장진영이다. 아이를 희생시키고 스스로가 살아날 확률이 어느정도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살아날 수만 있다면 또다른 유전자 복제(아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없다. 그녀의 선택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죽어가는 그녀만큼이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느껴지는 영화였다.
사인이 '위암'이라는 이유로 그녀가 열연했던 영화 '국화꽃 향기'가 주목을 받았다. 영화 속에서의 장진영도 '위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또 영화 속에서 박해일이 있었듯이, 실제의 장진영 옆에는 그녀의 남자친구가 있었다. (남자친구가 아닌 남편이라는 설도 있다.)
대부분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오는 '새드 엔딩(sad ending)' 영화의 큰 특징은 영화의 전반부와 후반부의 대비효과를 노린다는 점이다. 나는 잭 니콜슨 주연의 '애정의 조건'이라는 영화에서 그 점을 절실히 느꼈다. 아무 생각도 없이 일상적인 팍팍함이 있긴 하지만 천성이 발랄하고 생명력이 있었던 영화속 여주인공 데보라 윙거를 바라보다 그녀의 죽음에 큰 슬픔을 느꼈던 기억이 난다.
서점을 배경으로 마치 연극 무대를 연상시켰던 영화의 첫머리 부분은 경쾌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그 분위기가 계속 지속되어 한편의 연극을 보는 듯 했으면 하는 느낌이 들었다. 다소 어색하고, '하하', '호호'거리는 느낌은 이야기가 시간에 따른 서술이 아닌, 어릴 적 풍경을 회상하는 듯한 느낌이 있었다. 액자 속 행복했던 시절의 사진이랄까. 아마도 영화의 결말을 알고 있었기에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도 모른다.
'애정의 조건'에서와 같은 전, 후반부의 극적 대비는 사실 없었다. 영화 속 장진영의 관점에서 보면 한편의 '인간극장'처럼 생각보다 빨리 찾아온 그녀의 불행한 운명이 줄곧 그녀 곁을 맴돌았다. 행복은 잠깐이지만, 슬픔은 오래도록 지속되면서 미처 관객에게 그 행복을 공감할 시간적 여유를 주지 못했다. 영화 속 주인공들이 자신들에게 닥친 '운명'을 어떻게 풀어나가는지 담담하게 지켜볼 도리밖에 없었다.
'이왕이면 살 가능성이 높은 쪽을 택해야지'
영화 속 장진영의 생각이었다. 스스로 살기 위해 '아이'를 희생시킬 수 없다는 점에서 그녀는 확고했다. 이기적 유전자론의 관점에서처럼 인간이 진정 유전자들의 존속을 위한 생존기계일 뿐이라면, 새로운 유전자(아이)를 탄생시키고, 그 양육의 책임은 다른 사람(남편)에게 떠넘김으로써 그 목적을 다한 것이 된다. 그녀가 죽음을 택한다는 것은 스스로에게 큰 손해지만, 아이가 살아날 확률이 자신이 살아날 확률보다 높기 때문에 자신의 유전자를 아이로 대체하는데 조금도 망설일 이유가 없다. 그 이론에 따르면 장진영이 죽음을 선택한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인간의 이성 관점에서 보자면 '숭고한 희생'이나 이기적 유전자론의 관점에서 보면 '당연한 절차'가 되는 셈이다. 읽고 있는 책이 그런지라, 그런 흥미로운 생각도 들었다.
살아있는 남편에게 '아이'를 남기고 떠나는 것이 훗날 남편에게 큰 짐이 될 수도 있다. 영화 속 박해일이 훗날 아이에게서 장진영의 채취를 느끼면서 살아가도록 유도할 수 있겠지만, 박해일이 누구보다 함께 하고 싶은 사람은 장진영이다. 아이를 희생시키고 스스로가 살아날 확률이 어느정도 되는지 가늠하기 어렵지만, 살아날 수만 있다면 또다른 유전자 복제(아이)가 가능하다는 점에서 이기적 유전자론의 관점에서도 문제가 없다. 그녀의 선택을 이해못하는 바는 아니지만, 죽어가는 그녀만큼이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 느껴지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