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
[HardballTimes] 특별히 '중용'되었던 선발투수들...(5)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6. 13. 02:05
by Chris Jaffe
April 30, 2007
* 제목을 클릭하시면 원문을 보실 수 있습니다.
[HardballTimes] 특별히 '중용'되었던 선발투수들...(1)
선발투수 레버리징과 관련한 하드볼 타임스의 기사가 이어집니다. 주지한대로, 선발투수 레버리징이라 함은 팀을 위해 특정팀을 상대로 특정 선발투수를 의도적으로 기용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젠 그러한 방법이 더이상 비중있게 경기에서 활용되고 있지 않지만, 거의 한세기 동안 각 감독들은 그러한 로테이션을 활용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는 새롭게 만든 AOWP+라는 스탯을 활용해서 통산 최고, 최저의 커리어 기록과 싱글 시즌 기록들, 그리고 흥미로운 다른 분야의 기록들을 살펴보았습니다. 궁금하시다면, 전 기사에서 AOWP+가 무엇인지 살펴보시기를 바라구요, 하지만 이번 기사에서는 AOWP+를 심도있게 다루지 않을 예정입니다. 좀 다른 메트릭에 초점을 맞출 생각이거든요.
지난 기사들에서 다소 놀라웠던 점은 AOWP로 순위를 매겼을때 커리어의 경우나 싱글시즌 경우 모두 좌완투수들이 유독 두각을 나타냈다는 점입니다. AOWP의 수치를 구한 투수들 중에서 좌완투수는 약 1/4에 불과하지만, 리스트상에서는 가장 높은 기록을 보여준 커리어의 16명의 선수중에서 14명이 좌완이었습니다. 이유는 바로 플래툰 레버리징 때문인데요. 감독들은 타이콥과 샘 크로포트의 타이거스나 스탠 뮤지얼과 이노스 슬라우터의 레드버즈 그리고 루쓰와 게릭의 양키스처럼 좌타 라인이 강한 팀들을 상대로 최대한 자주 그들의 좌투수를 마운드에 올렸다는 점입니다. 많은 팀들이 위협적인 좌타 라인을 보유하고 있었기 때문에, 플래툰 레버리징은 선발투수 레버리징에 있어서도 아주 중요한 하나의 형태로 자리잡은 것입니다.


Cobb & Gehrig
투수 레버리징에 있어서 플래툰 레버리징은 아주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기 때문에, 그것을 분석하고, 정량화하는 일은 가치가 있습니다. 이를 위해, 지금까지의 AOWP+와는 다른 새로운 형태의 메트릭이 필요합니다.
Enter L#
새롭게 이름지어질 메트릭 L# 라고 불리는 것은 AOWP+와는 약간 다릅니다.("L"이 단지 좌완 또는 레버리징을 상징하는 것이라면 그렇게 결정을 못했을텐데요. 둘다를 상징하죠) AOWP+가 어떤 팀이 특정 투수를 어떤 식으로 활용했는지를 나타내 주는 지표라면, L#는 특정팀을 상대로 상대투수들이 어떻게 활용되었는지를 보여줍니다. 이를테면, A's가 1914년에 에디 플랑크라는 투수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는 대신, 다른 AL 팀들이 1914년의 A's를 상대로 좌완투수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보는겁니다.

Eddie Plank
이런 개념입니다. 제가 AOWP 수치를 구한 170여명의 좌완투수들을 보자구요. 그리고 매년 그들이 각팀을 상대로 얼마나 많은 선발등판을 했는지를 파악합니다. 그것이 L# 의 분자가 됩니다. 분모는 모든 투수들이 공평하게 등판을 할때 몇번의 선발등판을 하면 되는지에 해당하는 수치입니다. 분자를 분모로 나누고 100을 곱한 뒤에, 정수에 가깝게 반올림을 합니다. 그것이 바로 L# 입니다.
하나의 예를 들어볼까요. 1941년의 내셔널리그를 보자면, 저는 10명의 좌투수의 AOWP를 구했습니다. 죠니 벤더 미어, 켄 라펜스버거, 죠니 슈미츠, 하위 폴레트, 칼 허벨, 맥스 래니어, 래리 프랜치, 클리프 멜튼, 켄 헤인젤맨, 데이브 코스로. 그들은 154게임을 등판했습니다. 따라서 보스턴 브레이브스는 그 선수들을 약 22번 정도 마주쳤어야 맞습니다. (154/7=22.0, 이 투수들이 7팀들을 상대로 투구를 하기 때문에 7로 나누는게 맞죠). 실제로, 그들은 보스턴을 상대로 도합 24번 등판을 했구요. 결과적으로 24를 22로 나누고 100을 곱하면 109가 됩니다. 그것이 바로 L#입니다.

아니면 다시 1941년 내셔널리그를 활용하자면, 레즈가 있었습니다. AOWP가 구해졌던 선수들 중에서 로스터에 단 한명도 보유하지 않았던 브레이브스와는 달리, 레즈는 벤더 미어를 데리고 있었습니다. 그의 32번의 선발을 빼면, 남은 좌투수들의 선발등판수는 122경기가 됩니다. 17.4가 신시내티를 상대로 등판해야 할 숫자가 되죠. 실제로 다른 팀들의 좌투수들은 레즈를 상대로 총 3경기만 선발등판했습니다. 맞아요. 3경기입니다.
모두 컵스를 상대로 한 것들입니다. (두번은 프랜치에 의한 것이고, 나머지 한번은 슈미츠에 의한 것이죠). 3을 17.4로 나누고 100을 곱하면 L#는 17이 나옵니다. 신시내티는 디펜딩 월드 챔프였고, 마지막 2시즌의 정규리그에서 우승을 했고, 그들의 유일한 좌타자였던 로니 프레이는 그다지 대단한 타자가 아니였습니다. 그 당시의 크로슬리 필드는 우투수에게 아주 친화적인 구장이었습니다.

전 1969년까지 가능한 모든 팀들을 대상으로 L#를 구했습니다. 그 과정에서 새로 안 사실이 있는데, 19세기에는 좌투수가 별로 없었다는 사실입니다. 1880년대 중반까지, 리 리치몬드가 거의 유일한 좌투수였습니다. 처음 좌투수가 등장할때는 주로 TheA에서 뛰었습니다. 1891년 후반까지 NL 전체를 통털어 단 한명의 좌투수 AOWP를 구할 수 있었습니다. (듀크 에스퍼, 이 선수 역시 들어본 적이 없군요). 1890년대에는 좀 더 많은 좌투수가 등장을 했지만, 20세기의 그 어떤 시기보다도 미약한 등판수를 기록했습니다. 새로운 세기의 첫 10년동안 굉장히 많은 수의 좌투수가 등장을 했는데, 그 이유는 잘 모르겠습니다. 여튼 그랬죠.

Lee Richmond
1892년 이후에, 실제로 전체 MLB를 통털으면 적당한 수의 좌투수가 존재했는데요. 피더럴 리그는 제외하구요. 좌투수의 부재와 낮은 경쟁력으로 인해 좌투수에 대해서는 AOWP를 구하지 않았고, 그래서 피더럴리그는 그냥 간과하기로 했습니다. 그 외 AOWP 기록을 가진 좌투수들이 100번 이하의 선발등판을 한 해는 1892년 이후로 1992년 AL(85번), 1945년 NL(67번) 이었습니다. 따라서 1892년부터 1969년까지는 어떤 팀이 플래툰 레버리징 시스템을 가장 많이 활용했는지 파악할 수 있습니다.
Highest L#s, 1892-1969
한가지 제한조건이 있습니다. 이 기록들은 전체 투수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 아닙니다. AOWP 기록이 구해진 투수들이 대상이고, 따라서 전체 선발등판의 2/3 정도만이 해당됩니다.
Year Team L#
1 1895 PHP 202
2 1909 BOX 185
3 1957 CWS 182
4 1955 STC 176
5 1892 CLV 174
6 1942 STC 173
7 1933 PIT 172
8 1940 STC 168
9t 1945 CHC 167
9t 1908 NYG 167
11 1936 WAS 166
12t 1908 DET 165
12t 1951 CIN 165
14 1915 CHC 164
15 1908 WAS 162
16t 1939 NYY 161
16t 1892 LOU 161
18t 1940 CLE 160
18t 1955 CLE 160
20t 1935 PIT 159
20t 1959 CWS 159
먼저 플래툰 레버리징은 19세기에도 존재했습니다. 상대적으로 1890년대 좌투수의 결핍은 필리스의 공격을 더 빛나게 했는데요. 그 해에는 리그에 단 7명의 AOWP 기록을 가진 좌투수들이 있었고, 그 중 한명(키드 맥길)은 필라델피아 소속이었습니다. 나머지 선수들은 136게임 정도만을 선발등판하였고, 그것은 12개팀의 리그였던 당시에 필리스를 상대로 약 12.4번의 등판을 의미합니다. 테드 브리튼스타인은 그의 총 51번의 선발 중에서 필리스를 상대로 7번 등판했습니다. 듀크 에스퍼는 총 25번 중에서 6번. 윽, 필 크넬은 19번 중에서 6번 등판했습니다. 그것을 다 더하면요. 12.4번이라는 수치 대신 25번이라는 결과가 나옵니다. 쿠퍼스타운에 헌액되기 전에 좌타자였던 샘 톰슨과 빌리 해밀턴은 모두 4할을 쳤습니다. 더불어, 우타자 에드 에라헌티도 마찬가지였지만, 분명 상대팀에서 가장 두려워하는 타자는 아니였습니다.
이 경우 다음 의문이 뒤따르는데요. 언제부터 플래툰 레버리징이 시작되었는가? 리스트의 두 팀들은 1892년부터 존재해왔는데요, 그것을 보면 플래툰 레버리징의 개념이 그때 이미 보편적인 전략으로 존재했다고 보여집니다. 그 기원은 더 거슬러올라가야 할지도 모르죠. 1885년에서 1886년까지, AA에서는 괜찮은 좌완투수들을 데리고 있었습니다. 1886년의 더블A는 20세기까지의 어느 리그보다도 좌완투수들이 많은 게임을 던졌습니다. 좀더 깊이 들어가보면, 당시의 L# 기록들은 초기에는 그렇게 뚜렷하게 나타나지는 않습니다. 실제로 모든 팀들이 70에서 130까지의 점수를 지닙니다. 극단적인 점수들은 AA의 존재가 끝날때쯤에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좋습니다. 실제 리그에서 증가되는 만큼 단계적으로증가되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을텐데요. 좀 더 쉬운 설명을 위해 분명한 패턴을 지닌 한팀을 살펴보면 되겠군요. 세인트루이스 브라운스입니다. 다음은 그들의 L# 기록들입니다.
Year L# Rank
1886 85 Lowest
1887 86 2nd Lowest
1888 88 2nd Lowest
1889 112 Highest (!)
1890 65 Lowest real team
1891 84 3rd Lowest
1892 65 2nd Lowest
(1890년에, 볼티모어 오리올스가 더 낮은 L#를 기록했지만, 그들은 40게임 이하를 뛰었습니다.) 브라운스는 AA에서 최고의 팀이었고, 거의 우타자 일색의 라인업이었습니다. 어느 팀보다도 좌타자 상대가 적었죠. 완벽합니다. 그들의 낮은 점수를 보면, 플래툰 레버리징이 그때 리그에 자리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889년에, 한명의 투수 프랭크 포어맨만이 브라운스를 상대로 10번을 등판하면서 약간 이색적은 결과를 가져온 것 뿐입니다. 그때는 1885년이나 1886년보다도 좌투수들이 적었기 때문에, 그 혼자서 데이터에 미친 영향이 클 것입니다.

이것이 시작일까요? 음, 1885년을 돌이켜보면, 세인트루이스는 평범한 98의 L# 기록을 보이고, 이것은 별 의미없는 기록이죠. 그 해에 어떤 팀들은 상대적으로 높고 낮은 L#를 기록했지만, 그 숫자는 제멋대로입니다. 그다지 많지 않은 100번의 등판이 좌투수로부터 이루어졌지만, (그것도 대부분 한투수에 의한 것이죠, 에드 모리스), 이론적으로 상대해야 하는 것보다 실제로 상대한 것이 더 적을 경우 예를 들면, 브루클린은 1885년에 137번을 기록했는데, 그들의 로스터를 살펴보면 이유는 모르겠습니다. 자 이제, 팀들이 투수들을 플래툰 레버리징 했는지를 알아보기 위해서 각각의 팀들이 그들의 좌완투수를 어떻게 활용했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
분명하게도 초창기 AA에서 플래툰 레버리징이 드러납니다. 이 기사 시리즈의 파트2에서 전 1879년 해리 라이트를 조사하면서 그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경기의 뛰어난 감독이었던 그는 선발투수들을 플래툰 레버리징 방법으로 등판시켰습니다. 그는 프로비던스 클럽을 상대로는 에이스 토미 본드를 아꼈는데요, 프로비던스 클럽은 가장 좌타라인이 뛰어난 팀이었습니다. 대신 라이트는 좌완이었던 커리 폴리나 리 리치몬드 등의 선수를 활용했습니다. 전 짐 타잉이라는 선수 역시 좌완이었을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그의 선발 등판은 모두 프로비던스를 상대로 한 것이었습니다.) 이건 그때부터 플래툰 레버리징이 시작했다는 명확한 근거가 될 수 있습니다. 여러분들은 이렇게 오랫동안 적용이 되었던 방법이 오래전 어떤 지혜로운 한 사람에 의해 시작되는 것을 생각할지도 모릅니다. 물론 그 사람은 해리 라이트이구요.

하지만 실제는 우리들의 생각과는 좀 다릅니다. 과거를 거슬러 올라가 보면, 좌투수가 거의 없었지만 1879년 이전에 단 한 명이 레버레징된 것처럼 보입니다. 해리 라이트가 최초의 사람이 아니라, 신시내티 감독 칼 맥비에게 그 영광이 돌아가죠. 그는 1878년에 좌투수 바비 미첼을 혁신적인 방법으로 기용합니다.
미첼은 그해에 단 9번만의 선발등판을 했는데요, 단 9번임에도 불구하고 1년내내 로스터를 지켰습니다. 그것은 마치 초창기 시대에 한팀당 61게임을 치르던 시기에 제 2선발과 같은 것인데요. 리그의 다른 5개의 팀들을 상대로(그 당시에서는 다른 구단이 5개 뿐이었습니다.) 얼마나 많은 등판을 했는지 알아보고, 상대팀의 라인업에서 좌타자는 얼마나 되었는지, 또 그 좌타자들의 ops+는 어땠는지를 알아보겠습니다.
Team GS Lefty OPS+
Prov 4 3 158, 144, 82
Ind 2 1 186
Mil 2 2 151, 71
Chi 1 2 152, 110
Bos 0 0 None
인정하건대, 시카고는 동시에 두명의 스위치 히터도 데리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어떤 명백한 패턴은 없었구요. 그는 플래툰 레버리징되었고, 더 거슬러 올라갔을때, 이와 같은 현상을 더 찾아볼 수는 없었습니다. NA리그에서 누군가 했을 가능성은 있지만, 단정짓기 어렵습니다. 어떤 정해진 스케쥴이 없었기 때문이죠.
L#와 공격에서의 플래툰의 기원
다소 인상적인데요, 탑20의 리스트를 보다보면, 눈에 띄는 또하나의 아이템을 찾아볼 수가 있는데요. 올타임 순위차트에서 공동 12위는 1908년의 타이거스였습니다. Historical Baseball Abstract에 빌 제임스는 플래툰의 기원에 대해서 썼는데요. 투수 부분이 아닌 타자 부분에서요. 짐 베이커의 도움으로 제임스는 1906년 타이거스가 공격 플래툰을 이용한 첫 팀이라는 것을 밝혀냈습니다. 타이거스는 존 워너, 보스 슈미트 그리고 프레디 페인을 포수 자리에서 플래툰으로 활용했습니다. 플래툰을 발명한 이 평범한 두번째 디비전의 팀은 제임스를 크게 실망시켰습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적었습니다.

Boss Schmidt
이건 끔찍한 이야기죠. 첫번째 플래툰 시스템은 빌 아모어라는 사람에 의해서 시작이 되었는데, 그는 거의 알려지지 않은 사람입니다. 그는 메이저리그 감독으로서 5번째와 마지막 시즌에 플래툰 시스템을 생각해내고 실행에 옮겼는데요. 실망스러운 시즌을 보내고 그리고 해고당했습니다.
2년 후에 같은 팀은 역사상 가장 높은 L#의 수치를 기록합니다. 음,, 단순히 우연일까요? 아니면 무슨 인과관계가 있는 걸까요. 한번 자세히 볼까요. 20세기초 디트로이트의 L#를 나열해 보겠습니다. AL에서의 순위입니다.
Year L# Rank
1904 114 2nd Highest in AL
1905 113 2nd Highest
1906 118 2nd Highest
1907 120 4th Highest
1908 165 Highest
1909 150 2nd Highest
1910 154 Highest
1911 141 Highest
화이트삭스가 주로 1등을 차지했구요, 1907년에만 타이거스는 2위 이하로 밀려났는데, 레드삭스(123 L#)와 브라운스(124)가 2위부터 비슷한 차이를 유지했습니다. 타이거스가 공격부분에서 플래툰시스템을 처음으로 도입한 그때, 그들은 꾸준히 리그의 어느 팀보다도 좌투수를 많이 상대했습니다. 흥미로운 일인데요.
그럼 이 기사 초반부에 제가 했던 말을 다시 떠올려볼까요? 세기가 변하면서 좌투수의 급증을 확인할 수 있는데요. 첫 10년동안은 AL에 NL보다 더 많은 좌투수가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점점 균형을 이루어갔지만, 그땐 AL에 좌투수가 있었습니다. 어떻게 1895년의 필리스가 단 25번 좌투수를 상대하면서 200이 넘는 L#를 기록하게 되었는지를 기억하세요. 06년 공격 플래툰을 시작한 타이거스는 118의 L#를 기록했고, 36 AOWP의 좌투수들을 만났습니다. 1895년에 좌투수들은 매번 7경기마다 한번 꼴로 선발등판을 했구요. 1906년부터는 모든 게임의 약 1/4의 게임에 등판했습니다.
테디 루즈벨트 시대의 화이트삭스와 타이거스는 지금까지 야구 역사상 그 어떤 팀보다도 좌완투수를 자주 만났습니다. 투수 플래툰에 대비해 공격적인 전략을 갖추려고 한 팀들이 있었다면, 바로 그 팀들 중 하나일 것입니다. 어떨까요? 맞습니다. B때문에 A가 일어났다는 것을 분명히 보여줄 순 없지만, 환경적 증거들을 보자면, 바로 투수 플래툰이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또한 타자 플래툰보다 먼저 생겨났을 뿐만 아니라, 공격 플래툰이 투수 플래툰에 대응해서 나타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쿠~~울 (Cooooool)
이것은 또한 Historic Abstract의 하나의 수수께끼도 해결줍니다. 일생동안, 제임스는 플래툰의 기원에 대해 논의하는 기사를 찾을 수가 없었죠. 제임스는 가설을 세웠는데요. "그것은 플래툰이 처음 시작될때 사회적 통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다른 것과 마찬가지로. 그것은 알게 모르게 모든 사람들에게 스며들었고, 그것이 정착되었다고 사람들이 인식할때는 이미 15년이 지난 후였다." 음, 뭐 그런 셈이죠. 역으로 1906년의 플래툰은 그다지 새로운 발명이라고 할 것도 없었던 셈이죠. 그것은 어떠한 행동의 '시작'이라기 보다 반응으로 먼저 나타났기 때문에, 제임스는 플래툰의 기원에 관한 기사를 찾을 수가 없었던 것이죠.
안타깝게도, 이야기는 점점 더 원하지 않았던 방향으로 흘러갑니다. 이런, 플래툰은 당신이 한번도 들어본 적이 없는 감독이 자신의 커리어 말년에, 디트로이트가 강해지기 몇년 전에 한 선수를 플래툰 기용해서 타이콥을 상대하면서 시작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160게임도 채 감독생활을 해보지 못한 한 사람이 루더포드 B. 헤이즈 정부 시대에 사라져버린 한 프랜차이즈에서 커리어동안 채 400이닝을 던지지 못한 한 투수를 기용한 것이죠. 브라보~
1879년에 해리 라이트가 토미 본드와 그의 좌투수들을 보스턴에서 기용함으로써 시작한 것이라면 훨씬 더 멋진 일일 것입니다. 하지만 역사는 엄연한데요. 플래툰은 칼 맥비가 평범한 바비 미첼을 기용하기 전 해에 시작되었습니다. 한 세대가 지나고, 타자 플래툰이 그것에 대한 대응으로 활성화되었죠. 이것이 현대 사회 많은 루기(좌완 스페셜리스트)를 양산하는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제시 오로스코는 바비 미첼의 손자뻘이 되는 셈이죠.
여전히 L#의 하위 20위권도 살펴봐야 되지만, 제가 원하지 않게도, 기사가 다소 길어지는 것 같습니다. 이번 시리즈의 다음 언젠가 다시 논할 기회가 있을리라 싶습니다. 하지만 다음 작업의 핵심은 방대한 데이터 작업이 될 것입니다. 지금으로서는 제가 공유할 생각을 하기 전까지는, 그 누구도 계산해보지 않았던 L#의 값들에 의지하고 있습니다.
출처 : 제임스 빌. 빌 제임스 Historical Baseball Abstract. 뉴욕 : 빌라드 북스, 1986. 플래툰에 대한 기사는 책에서 가장 긴 기사들 중 하나입니다. 그것은 페이지 112에서 123까지 수록되어 있고, 121에서부터 122사이에 있는 말들을 인용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