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파리대왕, 윌리엄 제랄드 골딩

retriever 2009. 11. 22. 13:03
책을 읽는 것보다 재미있는 일들이야 많겠지만, 가급적이면 항상 책을 몸 가까이에 두려고 한다. 책을 읽는 것이 재미있기도 하지만, 또 생산적인 일이라는 믿음에 보람도 있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화요일에 지인들을 만나는 자리에 '파리대왕' 책 한권을 옆구리에 끼고 갔다. 그때 만난 두분은 모두 '책은 왜 항상 끼고 다니는거야'라는 가벼운 핀잔을 주시더니, 이미 읽어본 책이라며 잠깐동안의 감회에 빠져 드셨다. 놀랐다. 얼마 전까지 책의 제목조차 모르고 있었는데 모두 다 읽었다고 하니 왠지 당연히 읽어야 될 책을 읽지 못했다는 괜한 '부끄러움' 같은 것이 밀려들었다.
 
소년들이 아무도 살지 않는 무인도에 표류하게 되는 소설의 시작은 대강 이 소설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갈 것인지에 대한 '암시'를 해주었다. 묘하게도 올해 읽은 책인 주제 사라마고의 '눈먼 자들의 도시'라는 책이 떠올랐다. 두 책의 상황 설정은 다르지만, 작가들이 관심을 쏟았던 주제나 분위기가 닮아 있었다. 오랜 역사를 통해 인류가 이룩해 놓은 시스템과 문화를 송두리째 벗어버렸을때, 인류가 어떤 상황에 직면하게 될 수 있는지를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인간 본연의 심성과 본성에 근접해가는 일로, 그동안 우리가 믿고 신봉했던 '인간의 본질'에 대한 생각을 다시 해보게 된다. 

그런 점에서 주제 사라마고는 긍정적인 곳으로, 윌리엄 제랄드 골딩인 부정적인 곳으로 방향의 키를 잡았다. '눈먼 자들의 도시'에서도 인간 본성에 의거해 '악의 무리'가 존재하지만 '배려'와 '협동'을 통해 따뜻한 마음을 공유하는 새로운 '사회성'의 형성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아무 것도 보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눈뜬 세상'의 기준을 통해 나뉘었던 서로간의 '계층화'가 아무 의미가 없게 되고, 서로가 서로에게 의지하게 되는 '인간성의 회복'을 호소하고 있는 셈이다. 반면 '파리대왕'은 인류가 제도와 문화를 잃어버릴 경우, '약육강식'의 정글 법칙을 방불케 하는 혼란을 거친 뒤에 '정글의 질서'로 재편됨을 보여주고 있다. 인간의 이성은 합리적인 해결책을 찾아 그 역할을 다하고자 하지만, 결국은 인간 본성에 무릎을 꿇고 만다. 이성의 소유자인 독자들은 그런 상황에 분노하겠지만, 골딩은 것이 '인간의 본질'이라고 준엄하게 꾸짖고 있는 셈이다.
 
만일 '눈먼 자들의 도시'가 단지 정신병원 안에서의 이야기만을 조명한다면, 그곳 정신병원은 대체적으로 '파리대왕'의 무인도와 비슷한 성격을 갖게 된다. 정신병원에서도 무기를 가진 호전적인 강자들이 그 '공동체'를 지배하고 있다. 냉철한 이성과 지식을 소유한 이들도 결국 '목숨의 위협' 앞에서 한마리의 나약한 토끼가 되고 만다. 그런 와중에서 안과 의사가 보여주는 비윤리적 행위는 도덕과 문화가 제약하고 있는 '인간 본성의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기도 하다. 결국 정신병원을 탈출하는 것은 '어두운 곳'에서 '밝은 곳'으로의 이동을 의미하며, 그것을 통해서 '이성'과 '도덕'을 되찾게 된다. 

문학작품이나 대중예술 등 많은 작품들은 항상 그 시대와 연결고리를 갖게 된다. '파리대왕'이 그 시대적 배경을 안고 더욱더 주목받은 작품이라고 한다. 당시 '행복은 자연 상태에 있다'는 루소의 주장을 포함한 낭만주의가 유행이었다고 한다. 기계를 위시로 한 산업사회가 인간 본연의 심성을 파괴하며 '공동체'를 악의 구렁텅이로 몰아넣고 있다는 비판을 정면으로 반박한 것이 '파리대왕'인 셈이다. 골딩은 오히려 인류가 지닌 시스템과 문화를 잃어버리면 오히려 더욱 재앙이라고 경고하는 것이다.
 
합리적 이성을 토대로 해결책을 강구하는 랠프와 새끼돼지가 '문명'을 대표한다고 보기엔 둘의 '지도력'이 매우 형편없었다는 점은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소설은 항상 그럴듯하게 꾸며놓은 스토리로 반드시 그렇게 전개되리라는 보장은 없다. '자연상태로의 회귀'를 가정한 그 무인도에서 처음 대장이 된 무리들이 그토록 답답하게 실행력이 부족한 채로 '회의'만 고집하고, 집단의 구성원들과 목표를 공유하지 못하는 것이 필연적인 상황은 아니라는 것이다. '라다크로부터 배우다'라는 책에서 저자는 개발되지 않은 '라다크' 지역을 배경으로 제시하며 자연과의 '조화'를 통해 삶의 방식을 개척하고, 공동체를 형성하는 이상적인 모델을 제시하고 있다. 소설 속의 랠프와 새끼 돼지는 '오로지 탈출'만이 살길이라는 그들만의 대전제가 있었기 때문에 그 무인도를 '삶의 터전'으로 새로운 공동체를 구성하는 것에는 하등의 관심이 없었던 셈이다. 

문명과 기술이 발달하면 발달할수록 인간의 '자연으로의 회귀' 또는 '도피' 욕구도 강해진다. 그런 점에서 소설이 지금의 현대사회에도 여전히 시사하는 바가 크다. 하지만 한 인간으로 살아감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은 '생의 유한함'을 깨닫고, 인간에 대한 '따뜻한 시선'을 갖는 것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