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책만 보는 바보(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 안소영

retriever 2009. 9. 27. 23:45
한비야님께서 '그건, 사랑이었네'라는 책에서 추천한 몇개의 도서 중 한권이다. '책만 보는 바보'라고 하는 제목이 마음에 와 닿았다. 막연히 '책'과 '바보'라는 어울리지 않는 한 쌍을 떠올렸을 뿐인데, 머리말을 읽고나니 그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하루도 손에서 책을 놓은 적이 없었던 그는 늘 자신의 자그마한 방에서, 온종일 햇살을 따라 상을 옮겨 가며 책을 보았다 합니다. 누가 깨우쳐 주는 사람도 없이 혼자 읽었기에, 막히는 구절이 나오면 얼굴이 어두워지고 그러다 문득 뜻을 깨치게 되면 혼자 바보처럼 웃기도 했답니다.

(중략)... 스물 한 살이면 한창 나이인데, 그는 왜 날마다 방에서 책만 보고 있었던 걸까요. 드러내 놓고 표현은 안하였지만 이덕무의 글에서는 어딘지 모르게 외로움이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내가 너무 그의 마음속 깊이 들어간 걸까요?

이덕무는 이 책에 나오는 다른 벗들과 마찬가지로, 서자로 태어났습니다. 어디에도 낄 데가 없던 반쪽 양반의 핏줄이었지요. 글을 읽었으나 뜻을 펼칠 자리는 없었습니다. 그의 글에서 묻어나는 외로움은 그런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었나 봅니다.'

햇살을 따라 상을 옮겨가며 책을 본다는 구절을 읽을때는 햇살 비친 방에 앉아서 책을 읽는 그의 모습이 떠오르는 것만 같았다. 더불어 햇살의 따스한 느낌이 듬뿍 느껴지는 어느 한가로운 오후의 기분도 느낄 수 있었다. 비록 그 처지가 처량한 면도 있었으나, 책과 함께하는 그 여유로운 느낌을 생각하니, 이 책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책의 부제가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라는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이덕무의 입을 빌었지만 같은 시대 그와 함께 '시대의 변화'를 꿈꾸었던 이덕무와 그의 벗들 이야기를 담고 있다. 가까운 곳에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고, 시대를 논하고, 친구처럼 격의없었던 일상을 말하고 있다. 박제가, 유득공, 백동수, 홍대용, 박지원 등이 그의 벗들이었다.
 
책의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관직에서 역량을 펼치는 이야기도 하게 되는데, 정조 대왕에 대해서도 다루고 있다. 정조대왕의 소소한 일화나 그 심원한 뜻을 동시대를 같이 살았던 신하의 목소리로 듣는 신선함도 있었다.

정조가 뒤주에서 죽은 아버지 사도세자 때문에 평생 마음 아파한다는 내용을 볼때는 드라마 '정조 이산'에서 어린 정조가 뒤주에 갇힌 아버지 사도세자를 몰래 찾아간 장면이 떠올랐고, 당파 싸움 속에서도 소신을 잃지 않고 자신의 치세를 펼쳤지만 항상 긴장하는 삶을 살다가 죽음에 이르렀다는 내용에는 드라마 '한성별곡'에서의 '정조'가 눈에 어른거렸다. 드라마도 드라마지만 안내상님의 연기도 인상적이어서, 정조대왕이 언급될때마다 그 이미지가 기억에 남는다. 

더불어 서자이기 때문에 괴로워하고, 체념하고, 슬퍼하는 모습에는 '다모'에서의 '이서진'이 떠올랐다. 덕분에 드라마 2편을 다시 보면서 감회에 젖기도 했다. 하지원의 아역을 맡은 귀여운 꼬마아이를 다시 봐서 반가웠다.

정조대왕, 그리고 이덕무와 그의 벗들은 어렸을때 아버지를 잃은 아픔과 신분적 제약이라는 슬픔을 경험하면서 성장했다. 이덕무는 정조대왕이 겪은 그 고통과 그 후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는 슬픔이 승화되어 '백성들의 아픔'을 함께 공감하고 이해하게 되는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이야기하고 있다. 그와 그의 벗들 역시 슬픔과 고통을 안고 살았기에 다른 사람들의 아픔을 마음 깊이 느낄 수 있다고 말한다. 고통없이, 슬픔없이 살아갈 수 있다면 그것으로도 행복한 삶이지만, 고통과 슬픔마저도 잘 극복하고 승화시킨다면, 더 훌륭한 인격을 갖추게 되는 '토대'가 될 수 있음을 보여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