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림 1편 왕도(하늘에 이르는 길), 최인호
유학에서 가장 이상적인 정치사상으로 꼽는 '왕도정치'를 현실정치에 적용하려고 애썼던 조선시대 불세출의 사상가이자 정치가인 조광조의 이야기를 다룬 것이 유림 1편 '하늘에 이르는 길'이다. 기묘사화의 희생량으로서 자신의 37년의 짧은 생애를 마감하고, 또한 짧은 4년의 정치생명을 그만둘때까지 조광조는 그야말로 주어진 짧은 시간에 그 누구보다 굵은 삶을 살았다. 중종의 총애를 받으며 빠르게 자신의 권세를 확장해 나갔으며, 기득권 세력이었던 훈구파에 맞서 자신의 정치 이념을 마음껏 펼쳐나갔다. 거의 자신의 입지를 완전히 굳히고, 세력의 기반을 완전히 다질 무렵, 그만 반대파인 훈구파의 모략과 중종의 변심이 맞물려 하루아침에 그 모든 것들이 '일장춘몽'이 되어버린 셈이다.
정상명이 '조광조'의 그 높은 뜻을 훌륭히 기리는 것을 모르는 바 아니나, 나 역시 그 누구보다 현실정치인으로서 그의 실책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난세는 '영웅'을 필요로 한다. 정상명과의 긴 통화에서도 느닷없이 '그릇론'이 튀어나왔지만, 이념과 사상은 '영웅'이 되기 위한 자질에 불과할 뿐이다. 무릇 실현하는 과정에서는 현실정치력도 필요하고, 인화력도 더없이 중요하고, 이런저런 부수적인 문제들을 잘 조율해내는 능력이 당연히 뒤따라야 한다. 이퇴계와 이율곡이 훗날 지적한 것처럼, 성급하고 너무 급진적이었으며, 그 과정에서 아마추어리즘을 보여준 셈이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생각하는 부분은 인화력인데, 강력한 카리스마든 아니면 겸손의 자세든 결과적으로 주위 사람들을 묶고, 통일시키고, 새로운 사람들을 끌어들일 수 있는 능력은 지도자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다. 물론 조광조에게 그런 능력이 없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권세를 확장해나가는 과정에서 초심의 겸손한 마음을 잊고 혹시나 자만하고, 거만해져 주위를 돌아보는데 소홀해지지 않았나 싶어서다. 책 중간중간 그런 뉘앙스의 내용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갓바치가 조광조에게 마지막에 흰신발과 검은신발, 즉 짝짝신발을 선물하면서 적어준 구절 중
'천년 세월도 검은 신을 희게 하지는 못하는구나'
이 부분의 경우 작가는 검은 신과 흰 신을 진보와 보수에 빗대면서 결과적으로 진보와 보수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검은 신이든 흰 신이든 상관없다. 몸에 잘 맞아 편안한 신발이면 좋은 신발인 것이다.'라고 결론을 내리고 있다. 진보와 보수도 일견 정치 사상이자 이념일텐데 그런 것이 중요하지 않고, 백성들에게 좋은 것이면 다 좋은 것이다라는 이야기로 그 예를 들며 등소평의 '흑묘백묘론'을 들었다. 즉 흰고양이든 검은 고양이든 쥐를 잘 잡는 고양이야말로 좋은 고양이인 것이다. 실용주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조광조의 '왕도정치 시도'에 큰 의미를 부여하며, 그를 '훌륭한 정치가'로 칭하며 마무리를 짓고 있다. 요즘에도 선분배 후성장이니, 선성장 후분배니 또는 성장위주니 복지위주니 등등 하면서 말그대로 여러갈래의 정치이념과 철학이 있다. 물론 '왕도정치'의 이념은 그러한 세부적인 노선 및 전략보다 높은 수준의 이념이겠지만, 무조건 쥐를 잘 잡아야 좋은 고양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은 '방법론'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 같다는 느낌을 받는다. 물론 작가의 의도는 진보와 보수를 너무 구분하지 말고, 잘 융합해서 잘 살자는 의미겠지만, 막연한 이야기일 뿐이고.
더불어, 검은 신과 흰 신을 이념의 대립으로 보지 않고, 다르게 규정지어 볼 수도 있다. 무릇 흰 것과 검은 것이라고 한다면 가장 보편적인 의미는 깨끗함과 더러움으로 인식이 된다. 천년 세월이라 하면 굉장히 긴 시간을 의미하는 것이기에 결국 오랜 세월이 흘러도 더러운 신은 더럽게 남을 수 밖에 없다는 것. 정치가 결코 깨끗해지지 못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어, 조광조가 가진 높은 뜻도 결국은 검은 색이 하얗게 될 수 없듯, 현실정치의 벽에 부딛힐 수 밖에 없는 필연적인 귀결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