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위대한 개츠비, 스콧 피츠제럴드
retriever
2009. 7. 28. 09:10
어떤 경로를 통해서인지를 모르겠으나, 꽤나 제목을 많이 접했다. 늘상 베스트셀러로 손꼽히던 작품이었을 수도 있고, 혹자는 뮤지컬 때문에 유명해진 것이라고 한다. 책을 접해본 입장에서 후자가 더 신빙성이 있지 않나 싶다. 스토리나 구성 자체만으로 독자들의 큰 관심을 끌었다기보다 어떤 식으로든 재해석 내지는 각색되어 다른 형태로 가공되었기에 유명해졌다고 생각한다. 소설 속 뉴욕의 한 풍경을 그리면서, 주인공 개츠비의 저택을 그리는 것보다는 아기자기한 뮤지컬 무대를 상상하는 것이 훨씬 더 박진감 넘치고 재미있을 것 같다. 작품에서 보여주고 싶었던 것보다 분명한 메세지를 전달할테고.
같은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책의 재미와 공연의 재미는 엄연히 다른 법이다. 아무래도 시각적이고 역동적인 공연이 책에 비해서 전달의 폭이나 공감의 정도 면에서 큰 장점을 지닌다. 무료한 책도 한번 공연을 거친 후에 다시 읽으면 재미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개츠비는 아마도 그런 류의 소실이지 싶다. 소설만으로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서 주는 이끌림이 왠지 책의 내용에서 충족을 못 시켜주는 면이 있었다.
개츠비의 옆집으로 우연히 이사오게 된 '나'라는 주인공이 일면 신비감이 있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일면 동정심을 갖게 되는 내용을 그렸다. 언제나 지나치게 화려한 것은 공허한 법이다. 개츠비의 집과 들려오는 소문, 그리고 일상은 일면 위대해 보이지만, 그런 내용을 뒤집어버리는 결말은 개츠비라는 인물의 '위대함'이라기보다 현상의 '위대함'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신비감' 또는 '놀라움'이다. 마치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엉뚱한 일을 하는 친구에게 '너 참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삶이 가치가 없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는, 스스로가 존재할 가치가 있었던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길을 함께 가느냐 하는 것이다. 결혼식때든, 장례식때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복해주고, 슬퍼해주는 것만이 비로소 '잘 살았다'는 말을 듣는 길일까. 더욱이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내 삶의 영역 밖'에 있는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사회의 부품이 되는 것만이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가치는 스스로만이 결정할 수 있다.
시각에 따라서 개츠비는 엉뚱한 면이 있을 뿐더러 현실 감각도 떨어진다. 아마도 소설에서 보여주는 개츠비의 단편적인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를 향한 확신, 믿음 그리고 열정. 그런 것들이 묘하게 개츠비의 주위를 두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현실적인 모습, 그러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이중성과 개츠비의 소박한 꿈과 이상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마지막을 몇명을 함께 해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삶이 스스로 만족스러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일면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
같은 작품이라고 할지라도 책의 재미와 공연의 재미는 엄연히 다른 법이다. 아무래도 시각적이고 역동적인 공연이 책에 비해서 전달의 폭이나 공감의 정도 면에서 큰 장점을 지닌다. 무료한 책도 한번 공연을 거친 후에 다시 읽으면 재미가 되살아나기도 한다. 개츠비는 아마도 그런 류의 소실이지 싶다. 소설만으로는 '위대한'이라는 수식어에서 주는 이끌림이 왠지 책의 내용에서 충족을 못 시켜주는 면이 있었다.
개츠비의 옆집으로 우연히 이사오게 된 '나'라는 주인공이 일면 신비감이 있는 '개츠비'라는 인물을 조금씩 알아가면서 그의 마음에 공감하고, 일면 동정심을 갖게 되는 내용을 그렸다. 언제나 지나치게 화려한 것은 공허한 법이다. 개츠비의 집과 들려오는 소문, 그리고 일상은 일면 위대해 보이지만, 그런 내용을 뒤집어버리는 결말은 개츠비라는 인물의 '위대함'이라기보다 현상의 '위대함'이다. 생각하지 못하는 일들이 일어나는 것에 대한 '신비감' 또는 '놀라움'이다. 마치 누구도 생각지 못한 엉뚱한 일을 하는 친구에게 '너 참 대단하다'라고 말하는 것과 비슷하달까.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얻지 못하고, 또 사람들 사이에서 빛을 발하지 못했다고 해서 그 삶이 가치가 없었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짐승은 죽어서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긴다'는 옛말처럼 사람들은 무언가를 남기고 싶어하는 것 같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미덕 중에 하나는, 스스로가 존재할 가치가 있었던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가치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나의 길을 함께 가느냐 하는 것이다. 결혼식때든, 장례식때든 많은 사람들이 와서 축복해주고, 슬퍼해주는 것만이 비로소 '잘 살았다'는 말을 듣는 길일까. 더욱이 내가 죽으면 슬퍼해줄 사람이 몇명이나 될지를 계산하는 것은 '내 삶의 영역 밖'에 있는 일이다. 인간은 사회적 존재이기에, '사회성'이 없는 사람이 되어서는 안되겠지만 사회의 부품이 되는 것만이 삶의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할 필요도 없다. 스스로의 가치는 스스로만이 결정할 수 있다.
시각에 따라서 개츠비는 엉뚱한 면이 있을 뿐더러 현실 감각도 떨어진다. 아마도 소설에서 보여주는 개츠비의 단편적인 모습이 그랬을 것이다. 스스로를 향한 확신, 믿음 그리고 열정. 그런 것들이 묘하게 개츠비의 주위를 두르고 있다. 주위 사람들이 현실적인 모습, 그러한 현실에 적응하기 위한 이중성과 개츠비의 소박한 꿈과 이상이 대비를 이루고 있다. 그의 마지막을 몇명을 함께 해주느냐가 중요한 게 아니라 그의 삶이 스스로 만족스러웠느냐 하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일면 '위대'하다고 할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