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술, 책 그리고 나

retriever 2009. 8. 26. 11:53
술을 가까이 하고 살지 않으나, 또 한번 만나면 정신없이 반가울 때가 있다. 내겐 어제가 그런날. 대학 친구들을 만나서 오랜만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모두들 자기 삶에 충실하여, 자주 오는 기회가 아니다. 언제까지나 우리의 이런 관계가 변함없기를 바라지만, 인생사 한치 앞을 내다보기 힘든 관계로 그저 오늘을 즐거워하면서 살아야지. 소주에 그리고 소주,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시고 우린 헤어졌다. 진영이와 나는 한잔을 더 하고 혼자 사는 유부남 진영이의 오피스텔로 가서 잠이 들었다. 결혼해서 얼마전 예쁜 딸아이까지 낳은 진영이에게는 미안한 말이지만, 그렇게 혼자 운치있게 사는 것도 참 그럴 듯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침에 눈을 뜨니 이미 진영이는 출근 준비를 마친 상태다. 나를 전혀 깨울 기색이 없는 걸로 봐서 그냥 내버려두고 갈 모양이다. 일어나려다 보니 몸이 무겁고, 머리가 어지러워 그냥 다시 쓰러졌다. 진영이가 열쇠를 건내며 문을 꼭 잠그고 나가라고 한다. 우선 속이 메스껍기도 하고 몹시 피곤한 느낌에 과음한 스스로를 탓해보기도 한다. 친절하게도 진영이가 새 양말을 두고 갔다. 그런 세심한 배려는 하루아침에 덜컹 생겨난 것이 아닐 것이다. 훗날 그에게 큰 재산이 되줄 것을 빌어본다.

친구들끼리 만나면 언제나 과거의 풋풋했던 시절의 어리숙한 연애 이야기들이 꼭 화제에 오른다. 한때 술로 충격을 이겨내기도 했었다는 한 녀석은 이제 마음의 정리가 된 것 같다. 시간이 가장 위대한 약이라는 말을 항상 실감하게 된다. 더불어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큰 선물 중에 하나가 '망각'이라는 것도. 결혼한 친구, 결혼할 친구, 결혼할 사람을 찾는 친구 등등. 앞서거니 뒷서거니 우리의 삶은 오늘도 '현재진행형'이다. 

6권의 책을 또 주문했다. 독서에 취미를 붙여야 되는데, 책 사는 것에만 열중이다. 읽고 싶은 책은 많으나 독서 시간과 속도가 그에 미치지 못해 답답할 노릇이다. 하지만 배달되어온 박스를 열어 가지런히 놓여 있는 새 책들을 접하고, 한권씩 집어내어 표지를 넘겨보는 재미는 쏠쏠하다. 한비야님의 말씀처럼 '독서의 즐거움'에는 단지 책의 내용에서 오는 만족감 뿐만 아니라 책을 살때의 기쁨, 책을 읽고 다시 리뷰해보는 즐거움, 다 읽은 책을 다른 사람에게 추천해주는 기쁨이 모두 포함되어 있는 것 같다. 책이 이토록 고마운 존재인 줄 예전에는 미처 몰랐다. 책에게 감사하다. 

친구들을 만나는 자리에 법정 스님이 쓰신 '아름다운 마무리'라는 산문집을 들고 나갔더니, 이 녀석들이 아직 별로 살지도 않았는데 벌써부터 왠 마무리냐고 낄낄댄다. 물론 나를 두고 하는 소리다. 비록 오늘이 마지막이라는 각오로 살진 않지만, 가끔 삶을 관조하는 분의 글을 읽다 보면 마음이 편해서 좋다. 자꾸만 현실에서 외쳐지는 삭막한 가치들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조급한 마음으로 나아가려다 제풀에 그만 넘어질 것만 같다.
 
어떨때 나는 꽤나 성격이 급하기도 하고, 변덕이 심하기도 하다. 스스로의 감정에 못이겨 관계를 그르치는 경우도 많다. 물론 일상에서 관심사가 지속적으로 바뀌는 것이 꼭 나쁘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가벼워 보일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관심이 없어진 일을 계속 붙잡고 있을 수도 없기 때문이다. 싱숭생숭했던 마음이 술한잔에 제 자리를 찾은 느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