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수레바퀴 밑에서, 헤르만 헤세

retriever 2008. 6. 21. 00:29

한스는 압착기 옆에 엠마와 두 사람만 남게 되었다. 그는 이를 악물고 적을 맞대고 있는 것처럼 일했다. 그때, 어째서 이렇게 핸들이 무거운가 하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얼굴을 쳐들자, 엠마가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장난치느라고 반대쪽을 잡고 버티었던 것이다. 한스가 이번에는 화가 나서 잡아당기자 그녀는 또 버티었다.

헤르만 헤세 <수레바퀴 밑에서> 중에서

'데미안'에 이은 헤르만 헤세의 또다른 작품 '수레바퀴 밑에서'이다. 자꾸만 제목에서 <나의 라임 오렌지 나무>를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다. 하지만 언급된 세작품 모두 읽었던 기억은 어렴풋하게나마 남아 있지만, 그 내용은 도무지 떠오르질 않는다. 올해 역시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예비군훈련의 쉬는시간 및 대기시간을 이용해 '수레바퀴 밑에서'를 읽었다. 지난해 톨스토이의 '부활'을 읽고 느꼈던 독서의 감동을 다시 한번 느끼기를 희망하면서.

톨스토이, 헤르만 헤세와 같은 작가들은 역시나 훌륭한 고전의 저자로서 손색이 없는 분들이다. 인간의 내면을 훌륭하게 묘사하고, 또 스토리의 흥미와 긴장을 지속적으로 유지시켜 주면서, 독자에게 나름 메세지를 던지고 있다. 어떠한 책이 옳다 그르다 말하기 어렵고, 또 고전이 현대의 인스턴트 도서보다 더 가치있다고 쉽사리 단언하긴 어렵겠지만, <부활>이나 <수레바퀴 밑에서>와 같은 작품들은 절대적인 가치를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책을 읽다보면 한번 읽고 지나치기엔 너무도 아까운 장면들이 있다. 마른 밤하늘에 번개가 순간적으로 번쩍 하듯이 갑작스럽게 깜짝 놀라게 되거나 행복이 물밀듯이 밀려오거나 너무도 슬퍼진다거나 하는 그런 순간들이다. 한스가 이성의 소녀에게 알면서 사랑에 빠져 안절부절못하는 모습을 그린 부분은 책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부분이었다. [어째서 핸들이 이렇게 무거울까]라고 너무도 천연한 생각을 하고 있을때, 소년에게 장난을 치는 소녀의 모습이 마치 그림을 그리듯이 머리 속에 떠올라 한참을 웃음짓게 했다. 번역본이라서 그런지 전체적으로 잘 읽혀지지 않았던 부분들도 있었지만, 역시 풍부한 표현력이 책의 가치를 한층 더해주었다.

공부를 해야 한다는 강박과 주변의 기대는 '자유의 억압'으로 이어졌고, 두통에 자주 시달리곤 했던 소설 속 주인공 한스는 결국 '희생량'이 되고 말았다. 결국 처음부터 그 과정에 문제가 있었던 것일까, 아니면 그 길 속에서 자아 정체성을 제대로 확립하지 못한 것이 문제일까. 어려운 문제라고 생각한다.

성장하지 않은 어린이의 경우 어떻게 인격이 형성되어야 할지, 어떤 방향으로 공부를 해나가야 할지, 무엇을 삶의 목표로 삼아야 할지... 그 모든 것들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다. '행복'이라는 이상향에 우리가 좀 더 가까워지기 위해서는 충분한 '자유'가 보장되어야 하고, '선택'에 의한 삶이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한스가 열심히 공부하고, 놀시간도 많이 빼앗기고, 성적에 많은 신경을 쓰는 것 자체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스스로가 그것에 즐거움을 느끼고, 자발적인 '선택'에 의해서 나아간다면. 하지만 소설 속 한스는 어렸을때 이미 본인의 '자유'를 억압당한 채로, 거짓 자신과 대면하고 살았다. 진정한 자아를 마주하게 되었을때 그는 이미 모든 게 혼란스럽고 복잡했을 뿐이다.
 
동생의 고등학교 입학때 항상 건강을 염려하시던 아버지와 남보다 앞서 나가기 위해 미리 공부를 해 두어야 한다고 주장했던 나. 늘상 하던 생각이지만, 아버지는 항상 옳았다. 교육이 왜 중요한지, 완성되지 않는 '자아'를 두고 고민하는 자라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신 것만 같다.  
   
여담이지만, 책을 읽으면서 줄곧 이런 너무도 좋은 소설을 애니메이션화 한다면 얼마나 좋을까 라고 생각을 했다. 내가 그릴 수 있다면 너무도 좋겠지만... 과연 그럴 날이 올 수 있을지 모르겠다. 아, 이 빈곤한 예술적 재능이여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