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상

새벽공기 가르기

알 수 없는 사용자 2007. 1. 18. 18:52

나의 애마는 나에게 온 이후로 겨우 2-3번 세상 구경을 했고, 그 외의 시간은 어두컴컴한 이모부댁 차고에 갇혀 있다. 미안한 일이지만, 고유가 시대에 날씨 좋다고 무모하게 세상구경을 시켜줄 나는 아니다. 어쨌든 구입동기 자체가 소유로서의 만족이었기 때문에, 충분히 그 목적이 실현되었고, 더이상 차에 대한 불필요한 관심을 제거했다.
 
이유없이 우울해지는 마음이다. 다시 생각해보면 또 이유는 명백하다. 갑자기 무엇이 달라진 것도 없어서 그런 이유로 우울해지는 것도 우습지만, 잊고 지내다 또 생각하면 우울해지는 것들은 완전한 해결에 도달하기 전까지는 가끔씩 찾아오는 그 마음들을 어떻게 돌려 보낼 길이 요원하다. 이틀연속 새벽공기를 가르며 뜻하지 않은 한겨울에 나답지 않은 '시위'를 해보았다. 그 시위는 또 언제까지 지속될지 모르지만, 그것이 지치고 자칫 구심점을 잃어버릴지도 모를 일상에 큰 비중으로 하루살이에 대한 존경이요, 삶에 대한 노력의 투영 쯤의 의미를 심어줄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
 
'몸존 산소량'의 부족을 다시금 경험함으로써 그동안 내 자신이 겪어왔던 생활의 이런저런 불편함들이 비로소 스스로를 소중히 다루지 못한 자신을 탓하게 해주고 있다. 그로 인해 제 모습을 잃어버린 스스로를 대면하고, 다시 원점으로, 아니면 적어도 그 원형을 찾아 비로소 그것이 나라는 사람이라고 확인할 수 있게끔 돌아가려고 하니 아득한 그 길에 그 끝이 보이지 않아 답답한 마음만 앞서는 것이다. 믿음과 신념은 언제나 행동에 앞서 필수적인 가치임에도 불구하고, 그 마음엔 변덕이 심해 우울과 허무를 동반하지 않고선 자립할 수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른 새벽의 시위' 중에 떠올랐던 두가지 생각은 자율과 건강. 자유롭다는 것은 얼마나 큰 행운이며 건강하지 못하다는 것은 얼마나 큰 불행인가. 똑같은 복장으로 졸린 눈을 비비며 문을 나서 추운 공기를 대면한다는 것은 그때나 지금이나 지독히도 반갑지 않은 일이지만, 자율과 타율의 큰 차이는 무시할 수 없는 것이다. 스스로 했다는 그 자부와 번거로운 것을 비로소 끝냈다는 안도의 차이는 너무도 크기에.
 
물론 당장 죽을만큼 병든 몸을 지탱하고 있는 이 땅 위의  수많은 분들에게 너무도 죄송한 이야기가 되겠지만, 나에게도 총체적인 그 무엇인가가 비틀려있다는 생각이 든다. 분명한 것을 찾지 못하고 그저 아슴푸레한 형체만을 가진 그것과 싸워보자니 다시금 우울해지지 않을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