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마담 보바리, 구스타브 플로베르
retriever
2009. 3. 24. 08:36
내 인생에서 인상적으로 남을 엠바 보바리와의 만남, 그리고 그녀를 창조해 낸 작가 구스타브 플로베로와의 만남이었다. 나에게도 새로운 생각을 떠올리게 하고, 또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감성을 가지고 만난 작품이다. 직전에 읽었던 책, 아마도 자유에서의 도피, 에서 플로베르의 보바리 부인이 한두번 인용되었다는 이유로 책에 관심을 갖게 되었다 .물론 그 책이 '자유에서의 도피'가 아닐 수도 있다. 엠마 보바리가 넘치는 자유를 어찌하지 못해 자신의 삶을 통제하지 못했다는 가정은 왠지 잘 들어맞는듯 하지만 왠지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게끔 만든다. 엠마 보바리에게 적용을 하자면, '자유'라는 것은 곧 시간이다. 자유롭게 지낼 수 있는 시간이 많을수록 생각이 많아지는 법이고, 생각의 여백을 채우다보면 잡념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생의 허무라는 것은 어쩌면 '시간의 넘침', 곧 '과도한 자유'로부터 파생되는 것인지도 모른다. 물론 스스로의 선택에 의해서 이루어진 일상과 삶이 주체적인 삶임은 분명하지만, 누가 더 행복한 삶을 살고 있느냐는 질문에는 쉽사리 대답을 못할 것 같다.
엠마 보바리에게 있어서 가장 의아한 점은 한 인간이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이다. 엠바 보바리가 진정 보편성에서 벗어나 버린 인간의 전형인가? 그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은 얼마나 다른 마음을 가지고, 또 행동을 취하게 될까, 물론 마음먹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녀의 행위가 어떠한 기준에서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떠나 행위의 보편성 문제에서 접근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녀의 타고난 선천적인 인성인가, 혹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격인지. 시기의 문제인지, 또는 인간관계의 문제인지. 그녀는 제대로 된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위기로 빠지고 만 것일까, 수많은 의문점이 배회한다.
어떠한 일방적인 결론을 얻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보편적인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때 그녀는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재미없는 매력적이지 못한 남편을 만난 것은 분명 그녀에게 운이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의 권태와 삶에 대한 회의에 대한 원인으로 남편에게 어느정도 책임을 돌릴 순 있겠지만, 엠마 보바리의 해결 방법은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실망 그리고 좌절의 마음은 잘 그려져 있지만, 그녀의 행위를 그녀 스스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현실에 적당히 안주해서 남편이 가진 지위와 부를 자신의 외도에 활용을 했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소비를 일삼았다. 그리곤 삶이 불행하다고 스스로 한탄했다. 그녀의 일방적인 의존 성향은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끝날때가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고, 처음엔 남편이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대상도 바뀌어갔다. 결국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주체할 생각을 갖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선해나갈 용기도 없었다.
엠마 보바리에게 있어서 가장 의아한 점은 한 인간이 가지는 보편성과 특수성의 문제이다. 엠바 보바리가 진정 보편성에서 벗어나 버린 인간의 전형인가? 그런 상황에서 모든 사람은 얼마나 다른 마음을 가지고, 또 행동을 취하게 될까, 물론 마음먹는 것과 행동하는 것에는 현격한 차이가 있다. 그녀의 행위가 어떠한 기준에서건,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을 떠나 행위의 보편성 문제에서 접근하면 어떠냐는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녀의 타고난 선천적인 인성인가, 혹은 자라나는 과정에서 형성된 인격인지. 시기의 문제인지, 또는 인간관계의 문제인지. 그녀는 제대로 된 남편을 만나지 못했고, 제대로 된 인간관계를 이루지 못했기 때문에, 스스로도 감당하기 힘든 위기로 빠지고 만 것일까, 수많은 의문점이 배회한다.
어떠한 일방적인 결론을 얻기란 쉽지 않을 것 같다. 분명한 것은 보편적인 사회적 기준으로 봤을때 그녀는 '옳지 못한 행동'을 했다는 점이다. 재미없는 매력적이지 못한 남편을 만난 것은 분명 그녀에게 운이 없는 일일 수도 있다. 결혼 생활의 권태와 삶에 대한 회의에 대한 원인으로 남편에게 어느정도 책임을 돌릴 순 있겠지만, 엠마 보바리의 해결 방법은 사회적인 것으로부터 매우 동떨어진 것이었다. 남편에 대한 그녀의 실망 그리고 좌절의 마음은 잘 그려져 있지만, 그녀의 행위를 그녀 스스로 설명하지는 않았다. 다만 현실에 적당히 안주해서 남편이 가진 지위와 부를 자신의 외도에 활용을 했고, 경제적인 능력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과소비를 일삼았다. 그리곤 삶이 불행하다고 스스로 한탄했다. 그녀의 일방적인 의존 성향은 작품의 시작에서부터 끝날때가지 조금도 변하지 않는다. 누군가 자신의 삶을 구원해줄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를 갖고 있었고, 처음엔 남편이 그 역할을 해주기를 바랬으며, 시간이 지나면서 그 대상도 바뀌어갔다. 결국 삶을 스스로 개척하고 주체할 생각을 갖지 못한 셈이다. 그리고 그것을 개선해나갈 용기도 없었다.
구스타브가 엠마 보바리를 두고 자기 자신을 투영하는 인물이라고 이야기했듯이, 나 역시 어느 부분에선 엠마 보바리 속에서 내 자신을 보기도 했다. 주어진 삶을 뜻깊게 사는 길은 끊임없이 삶의 보람과 목표를 찾아내서 자신을 변화시켜 나가는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엠마 보바리의 결심들이 너무도 쉽고 허무하게 무너져버리기도 한 것을 보면, 그래서 자신만의 가치관을 정립하고 의지를 다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서적으로 반향이 있었던 작품이고, 그래서인지 재미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