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랑에는 흙탕물이 굽이치며~
두 사람은 우산을 쓰고 집을 나섰다. 장대비가 내리꽂히더니 그새 물이 불어나서 도랑에는 흙탕물이 굽이치며 콸콸 내리쏟아지고 있었다. 들판은 선명하고 쾌적한 푸른빛으로 전개되어 연신 부슬비에 젖고 있었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박경리의 [토지 5부] 중에서
올해 안에 토지를 모두 읽겠다는 나의 약속은 착실히 다행히도 이행되고 있다. 마지막 달에 충분히 한눈을 팔아도 넉넉한 시간이 내 앞에 놓여 있다.
문득 책을 읽다 보면 별 다를 것이 없는 구절에 퍼뜩 하고 흐리멍텅한 정신이 맑아질 때가 있다. 위의 구절도 나에게는 그런 경우이다. 사실 토지를 읽다보면, 작가의 이런저런 묘사가 머리에서 잘 그려지지 않을때가 많다. 작가의 표현이 머리속에서 잘 소화가 되지 않는 것인지, 책을 읽을때 여유가 사라지는 것인지.
그런데 마치 동화를 보는 것처럼, 영상을 보는 것처럼 선명하게 기억속에서 그려졌다. 두 사람이 걸어가고, 장대비가 내리고, 그래서 도랑의 흙탕물이 굽이치는 모습... 그것은 아마도 기억속 아득한 내 어린시절의 한 장면이다. 내가 살던 곳도, 아버지를 따라 나서 노닐던 곳들도, 큰 아버지와 친척 형 누나들이 살던 곳도 모두 책 속의 그 도랑의 흙탕물이 굽이치던 곳들이었다. 작가가 비유한 '쾌적한 푸른빛'의 그 세상이 선명하게 그려져 너무도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지하철을 타고 오면서 읽은 구절을 마음 속에 꼭꼭 담아 잊어버리지 않게 기록해두리라 다짐했던 것이다.
집에 와서 다시 그 구절을 읽다보니 뒤따라오는 작품 속 '한복'의 대사가 어른거려 같이 실었다.
산다는 거는... 참 숨이 막히제?
나는 숨이 턱턱 막히던 그 가을의 밤들로부터 먼 길을 떠나왔다. 그저 남들과는 다른 슬픔 하나로 이 세상 모든 아픔을 품은 사람처럼 굴 생각은 추호도 없다. 산다는 게 숨이 막히진 않아, 그저 살다보면 숨막히는 날들이 찾아올 뿐이지. 그저 숨을 꾹 참고 있으면, 그런 날들은 어느새 떠나버리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