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천과 허무
낙천과 허무... 내가 가진 모순이다. 굉장히 낙천적이면서 또 굉장히 허무주의적인 것. 그래서 어쩌면 친구들은 나를 두고 마음 편하다고 생각한다. 두 가지가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게 되면, 세상에 걱정할 일은 별로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도 그래왔다. 고민을 하고 걱정을 해야 하는 문제라면 그것은 내 자신 자체에 대한 것일뿐. 하지만 그것 역시 한번더 생각을 해보면 그래서 다른 걱정거리가 없었다는 생각도 든다. 인간의 능력이란 언제나 한 순간에 하나밖에 고민을 못하기 때문이다. 그렇게 따지면, 고민으로 점철된 내 삶은 밖에서 바라보는 것처럼 그렇게 평화롭지 못하다.
나는 정말 아무 생각이 없었는데, 병원에서 나를 두고 왜 이렇게 긴장을 하느냐고 물었다. 그 말을 들으니 내가 너무 생각없이 긴장을 하고 사는 것이 아닌지 의심스러웠다. 항상 무언가 팽팽한 긴장감이 나를 압도하고 있는 것 같은 착각도 들었다. 왠지 그런 모든 것들이 선천적으로 고칠 수 없을 것 같다는 패배감도 고개를 든다.
자신을 바꾸기 위해서 며칠간 좋은 생각을 하고, 웃어도 보고, 멍하니 있어보기도 하지만, 나란 사람은 결국 허무의 벽을 부서뜨리기가 너무 힘들다. 주위를 돌아보면 허무한 것 투성이다. 그래서 또 모든 것이 잘 해결될 것이라는 막연한 기대도 가능한지 모르겠다. 부질없는 일들도 많고, 부조리한 것들과 그릇된 문제들에 순응하면서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 그렇지 않고서는 단 한순간도 마음 편하지 못할 것이라는 감정적 결벽증이 원인일까...
문득 소설 토지를 읽다가 국가와 민족 문제가 나왔다. 2004년일 것이다. 지금은 모두의 기억속에서 거의 잊혀져버린 일이지만, 먼 땅 이라크에서 김선일씨가 조국에 목숨을 구걸하다가 참혹한 죽음을 당했다. 그때 군복무중이었던 나는 선후임들과 그 문제에 대해서 논쟁을 한 적이 있었는데 나는 이라크에서 철군을 할 지언정 그를 구해야 한다는 편에 섰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국가의 가장 근본적인 존립 자체에 관한 문제이고, 감정적으로 본다 해도 정녕 자신의 가족이 그런 상황에 처했던들 그렇게 쉽게 개인의 희생을 논할 수 있을까 싶었다. 인간의 본성인지 왜 그렇게 집단은 개인의 희생에 무심한지 모르겠다. 그 개인이 자신이 될 수 있다는 가정은 만에 일도 하지 않기 때문이겠지만.
여튼 결과적으로 그는 국가의 외면을 받았다. 한 국가의 수장이라는 자리는 그렇게 힘든 고뇌의 결정을 내려야 한다. 일말의 죄책감이 있을까... 어쩔 수 없는 선택. 결국 나란 사람도 같은 상황에서 개인의 희생을 묵인하는 결정을 내릴 수도 있다는 사실.. 결국 원칙이라는 것은 컴퓨터 드라이브의 디렉토리를 정리하는 것처럼 여러 변수에 의해서 이합집산이 되고 정체성이 불분명한 경계에 서 있는 문제들로 인해 결국 타협하는 선에서 마무리를 짓게 되는걸까... 이런저런 생각을 하다보면 허무의 늪에 빠지지 않을수가 있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