끄적끄적...
오랜만의 외출, 낯설음.
일주일만에 다시 사당을 향했다. 누군가에게 나 자신을 이해시키기 위해서(?) 아니면, 누군가를 만나고 하루를 마무리한다는 안도감(?). 아무렴 어떨까. 곧잘 언어로서 내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때론 순화시키는 나로서는 '경청의 기술'이 남다른 사람들이 언제나 큰 재산이라고 생각했다. 그런 경청자를 찾아 오랜만에 외출에 나선 셈이다. 무언가를 정리하고만 싶었던 심사가 있었으리라.
그런대로 회사에서 '대화의 상대'가 되어주었다고 생각했던 두 사람을 만나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는 와중에, 그리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나는 더할 수 없는 '답답함'을 느꼈다. 그들 앞에서 나 자신을 이해시키지 못하는 스스로의 일천한 언변에도 화가 났지만, 나도 어찌 못하는 거대한 벽이 그들과 나 앞에 가로막힌 것만 같은 암담함이었다. 이제 나를 굳이 발가벗기어 그들 앞에 내 놓아도 얻을 게 없어진 셈이다. '정리와 순화의 대화'라고 믿었던 시간들엔 '막막함' 밖에는 없었다. 다시 그러한 시도를 하지 않을 거라는 고집이 고개를 쳐드는가 하면, 유일하게나마 내 이야기를 있는 그대로 경청해주는 친구 녀석에게 그 울분을 토로할 길 밖에 없었다. 그런 상대가 있으니 천만 다행이다. 그렇지 않았다면야 자칫 생각이 꼬리를 물어 세상과 나 사이에 '넘나들 수 없는 벽'을 스스로 생산해낼 뻔 했다.
결국 내가 듣고 싶었던 이야기는 겨우 '너는 그런 사람이구나' 정도뿐이었을 것이다. 나는 이미 나라는 사람을 알고 있고, 그것을 '나는 이렇다'고 가까운 사람들에게 알려주는 과정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공감대'를 형성해내지 못했기 때문에 그들은 나의 입장을 이해해주지 못했다. 오히려 '넌 정상이 아니야'라고 무시하는 친구 녀석의 말이 내가 원하는 '정답'이었는지도 모른다.
허무는 소비를 촉진한다.
이 말을 어제 하루동안 족히 다섯번은 쓴 것 같다. 몇달전 토지를 읽다가 우연히 마음에 와닿았던 문구가 오랜만에 생각이 났다. 요즘 갑자기 책에 대한 욕심이 동하면서, 7권의 책을 새로 구입했다. 물론 그 동기에 대해서 토지의 문구를 꺼내들은 것은 달리 이유가 없다. 말그대로 별 이유가 없었기 때문이다. 책 7권을 샀다고 갑자기 소비가 촉진되었다고 말하기도 뭐하고, 평소 이상의 '허무'가 달리 찾아오지도 않았다.
언제나 나를 감싸고 있는 '긍정의 허무'에 대해서는 아직 나 밖에 이해하지 못하는 것 같다. 하긴 나를 이해시키는데도 오랜 시간이 필요했으니, 다른 이의 이해를 구하는데도 그만큼의 인내는 필요하리라. 나를 둘러싼 '허무'를 보고 '명랑'해지라고 권하는 이를 향해 '명랑'의 반대말은 '우울'이라고 이야기해주고 싶었다. 물론 그래봐야 시덥잖은 말장난에 불과하다며 나를 탓할테지만. '허무'가 부정적인 의미를 어느정도 내포하고 있다는 점을 부인하지 않겠지만, '긍정'의 의미도 있다는 것을 알아달라. 적어도 내 삶에 있어선.
아이러니컬하게도 '허무' 자체는 감정과 그 맥이 닿아 있지만, 그것은 '감정적인 중용'의 의미를 담고 있고, '이성적인 판단력'을 유지시켜주는 밑거름이 되기도 한다. 종종 감정의 종단에 '씁쓸'과 '고독'이 반가운 친구처럼 기다리고 있는 경우가 있을 수 있지만, 그것은 일종의 삶의 카타르시스라고나 할까. 반가운 친구를 만나는 건 즐거운 일이니까. 이쯤되면, 특유의 궤변이라며 손사래를 치며 모두들 '경청의 자세'를 거두어들이리라.
다람쥐는 쳇바퀴를 돈다.
아마 오락 프로그램이었던 것 같다. 한 출연자가 우스개소리로 다람쥐가 쳇바퀴를 도는 이유가 무엇일까에 대해 질문을 했다. 기억은 안나지만, 이런저런 대답이 오갔던 것 같고 게 중 질문한 출연자가 원하는 답은 없었던 것 같다. 답은 '다람쥐만 알고 있다'. 대충 그러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직까지 다람쥐와 대화에 성공한 사람은 없었을테니까. 달리는 사람을 보고 그가 재미있어서 달리는지, 기뻐서 그러는지, 혹은 외로워서 그러는지 아무도 모를 일이다. 직접 진심을 듣지 않고서는 말이다.
여하튼 지켜보는 입장에서 그 행동 자체만은 분명하다. 쳇바퀴를 도는 것도 사실이고, 뛰는 것도 그렇다. 나의 항변과는 무관하게 나는 그런 분명한 행동 양식을 보여주기 때문에 어느덧 다람쥐가 되고 만다. '어떻게 매번 똑같냐', '이쯤 되면 달라질만도 한데...'. 하는 것이 매번 쳇바퀴를 도는 다람쥐를 대하고 있는 녀석들의 한결같은 반응이다.
끄적이다보니 나의 경우엔 해답이 나왔다. 내가 쳇바퀴를 돌고 있는 이유는 '도망치는 법'을 모르기 때문이다. 슬픔에 미친듯이 뛰다가 갑자기 멈추면, 뛰는동안 마음에 묵혀놓은 슬픔이 물밀듯이 밀려오는 것처럼, 무심하게 쳇바퀴를 도는 일상에 종종 절실하게 '도망치는 법'에 대한 해답이 필요할 때가 있다.
경제와 대면하기
다소 현실적인 이야기. 이제는 월급날이 되어서도 저멀리 관심밖의 이야기가 되어버린 나의 수입에 관한 고찰이다. 그러면서도 한번씩 그 내역을 마주할때면 다분히 현실적인 감정과 고민에 사로잡히게 된다. 어쩌면 검색이 잘되고, 더 많은 데이터를 저장해주는 편리하고 새로운 시스템을 탓해야 할지도 모르지만, 내역을 마주하자 그새 우울한 마음이 들었다. 한두번의 클릭이면 1년전과 지금의 월급을 비교할 수 있다. 그 유혹을 넘어가기란 쉽지 않다. 굳이 이렇게 직원들의 사기를 저하시킬 필요가 있나 싶지만, 관심있는 사람이 그만큼 많을테니까.
경우야 어찌되었든 꼬박 1년이 흘렀는데도 불구하고, 내가 수령하는 월급은 겨우 1만원이 늘어났을 뿐이다. 그저 물가가 상승하고, 화폐의 가치가 달라지는 것을 고려한 소폭의 인상분은 고스란히 국민연금과 건강보험의 인상분으로 넘어갔다.
그러니 시간만 나면 직원들이 모여앉아 주식이니 펀드니 부동산이니 하며 재테크를 논하는 것이 이해가 된다. 애써 또 재미없는 이야기가 시작되었구나, 라며 그 자리를 외면하던 나였다. '즐거운 일상'에 큰 암초를 만난 것 같은 거부감과 때론 '현실의 노예'가 되어버리지나 않을까 하는 염려도 있었으리라. 이제 갓 입사한 신입사원 후배가 주식 계좌를 개설할때만 해도 그저 '어라?' 했었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나 역시 은행과 증권사를 한번씩 방문하며 모든 준비를 마쳤다. '경제력'이 삶의 질을 좌우할 뿐만 아니라, '사람의 가치'를 결정하는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의 현실을 정면으로 맞설 채비를 했다. 그저 노동을 하는 것으론 모자라, 아무리 생각해도 부족한 나의 시간을 달리 투자를 해야 한다는 생각에 치기어린 불평도 해보았지만, 기왕 하는거라면 제대로 하자. 늘상 함께였던 '제대로 한다면 늘 길이 있다'는 믿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