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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 7. 5. 23:42

부활, 톨스토이 도서2007. 7. 5. 23:42

사용자 삽입 이미지

예비군훈련 3일동안 틈틈이 줄곧 독서를 했는데, 책의 제목은 다름아닌 톨스토이의 '부활'이었다. 예비군 첫날 아침, 어떤 책을 선택해야 할지, 집안의 한정된 도서 중에서 군복바지의 건빵주머니에 들어갈만한 크기의 책을 찾다보니, 굉장히 한정적일수밖에 없었다. 두세번을 망설인 끝에 오랜 시간에 이미 색이 바래진 톨스토이의 '부활'을 선택했고, 예비군 훈련이 끝나는 오늘 완독한 지금, 그 선택이 너무도 탁월했다는 것을 느낀다.

어찌보면 '부활'이라는 의미를 내 자신에게 붙여도 무방할 정도로, 책에서 받은 나의 감명은 대단한 것이었다. 4년간의 공돌이 생활과 군생활에서 배운 '최대한의 간결한 논리적' 표현 덕분에, 내 자신의 느낀 그러한 감정을 충분히 글로 들추어낼 수 없음이 한없이 안타까울 따름이다. 다만, 이 기억을 잊지 않기 위해, 그저 무언가를 끄적여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미 나는 15-16년전, 까까머리 중학생 시절에 이 책의 첫페이지를 열었다. 결과적으로 나는 어떤 경로로든 기회가 된다면, 중학생 정도의 성장 중에 있는 아이들에게 이 책을 절대로 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그 당시의 내가 이 책을 완독했는지 아니면 중도에 포기했는지 알 길이 없지만, 상당히 책을 읽어야겠다는 '열의'가 있었음은 분명하다. 그 당시에 그토록 따분하고 어렵기만 했던 소설을 꽤나 읽어나갔던 기억이 나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그다지 독서를 좋아하지 않았던 나에게 독서에 대한 더 큰 '절망'을 느꼈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독서를 좋아했다고 하더라도, 책으로부터 어떤 공감과 감동을 얻을 수 있을지, 의아할 따름이다.

비로소 15년 이상이 지난 지금에서야 나는 이 책을 덮을 수 있었던 셈이다. 이 책에서 감명을 받고, 또 이해할 수 있다고 느끼는 것 자체가 어쩌면 슬픈 일이겠지만,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난 많은 부분 주인공인 네흘류도프 공작의 심리를 나름 잘 따라갈 수 있었다. 어떤 소설이든 설령 그럴리는 없지만, 종국에 그가 '허무'라도 느껴버리는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그렇게 된다면 완벽한 본인의 재현이라고나 할까--; 어쨌든 책을 덮는 순간까지 매순간순간 진지하고 흥미롭고, 어떤 순간에 초조함까지 느껴졌다. 진실로 오랜만에 느껴보는 독서의 즐거움이었다. 그저 사건의 흐름만을 나열하는 단순한 소설이 아닌, 사색의 거리를 제공하고, 철학의 깊이가 있다는 점에서 무엇보다 '명작'이 '명작'으로서 대우를 받는 이치를 알 것도 같았다.

다만, 나는 책의 99%의 순간까지 나의 기대는 완전히 100% 이상 충족되었으며, 이 스토리의 결말에 더없이 큰 기대를 걸고 있었었다. 하지만, 크게 두가지 관점에서 깊은 실망을 느끼고 말았다. 그 기대라는 것이 너무 커서인지, 그 실망의 깊이는 책에 대한 전체적인 감명 자체를 뒤바꿔버릴 정도로 나에게는 파급효과가 컸다. 그것은 톨스토이라는 작가의 위대성과 '부활'이라는 고전이 지니는 그 '불가침'의 가치에 반론의 기치를 세우는 것이 아니다. 단지 다분히 개인적인 바램 및 견해에서 스토리의 결말이 내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는데서 오는 실망과 아쉬움이다.

이 책을 접하는 많은 사람들이 마찬가지겠지만, 물론 그것은 톨스토이의 원초적인 의도와는 별개의 문제일 수 있다, 주인공 네흘류도프의 사회를 바라보는 시선의 변화 및 도덕적인 깨우침 등이 책의 주제에 있어서 큰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것에는 공감하지만, 무엇보다 다분히 '흥미'의 요소이자 스토리의 '시초'로서 네흘류도프와 마슬로바의 관계에 관심을 가질 수 밖에 없다. 난 적어도, 마슬로바가 네흘류도프의 용서를 받아들이고, 다시 진실된 마음으로 그를 사랑하면서도, 결국에 '사랑하지만 떠날 수 밖에 없다는', 그런 말도 안되는 결론이 나올 줄은 몰랐다. 뭐지--; 그 황당함이란... 글쎄 네흘류도프 공작의 완전한 '부활'을 위해서 둘 사이에 오고가는 사랑의 '감정' 따위는 완전히 묵살되어도 무방하다는 것인가... 네흘류도프 공작의 심리가 굉장히 난해한 면이 없지 않지만, 애초에 마슬로바에 대한 '사랑'이 아닌 '사죄'만이 그 동기였다고 하더라도, 그토록 자신이 헌신해 마지 않았던 한 여자를 떠나보내면서 '견딜 수 없이 괴로운 마음'을 가지면서, 참된 기독교의 교리를 깨닫는다??

그 두번째 불만이 바로 마지막 부분에 절묘하게 끼워맞춰지는 기독교 교리 부분이다. 물론 톨스토이가 주장하는 그 교리라는 것이 교회의 존재나 부정으로부터 벗어나 원초적인 교리를 의미한다고는 하지만, 어떤 식으로든 나는 이처럼 종교적인 교리를 스토리의 전면에 떡하니 '주제'로 명확히 하는 것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종교를 잘 모르는 나로서는 그 점에 관해서도 난해한 점이 많아 딱히 잘라 말할 것이 없다. 그리스 정교의 예배 의식이나 현실속에서의 '적용'이 다분히 그릇되었다는 것을 비판하는 것은 좋은데, 어떤 종교든 현실 세계와 융합하는 과정에서 이런저런 '잡음'이 생긴다. 그러한 부분에서의 비판은 정당하다는 것이다. 다만, 교리적인 측면으로 어떠한 큰 거리감이 있는지 모르겠다. 네흘류도프가 느끼는 '회의'의 관점에서 다분히 바라본다면 말이다. 어쨌든 이 부분은 '톨스토이'라는 작가에 대해 더 알고 나서 한번 더 생각해봄직하다. 지금으로선 그저 막연한 거부감일 뿐이니까...

이 책의 재독이 나에게 큰 기폭제가 되어주리라 생각하진 않지만, 네흘류도프라는 주인공을 통해 일순간이나마 '정서적인 정화' 효과를 받은 것은 분명하다. 더불어 어떤 이유에서인지 독자를 빨아들이는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이것을 계기로 오랜기간 '역사적 증명'을 받아온 '고전'들이 지닌 가치를 가늠해보고 싶은 '호기심'이 생긴다. 나 자신에게 매우 즐거운 독서였고, 고마운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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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osted by retriev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