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서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이경혜
retriever
2010. 5. 25. 20:51
'어느날 내가 죽었습니다' 오로지 이 문구 하나에 매료되었다. 청소년 소설인지도 몰랐고, 어떤 내용을 다루었는지도 몰랐다. 왠지 육체에서 분리된 영혼이 자신의 죽음을 지켜보는 장면이 상상되었을 뿐이다. 실제 죽음에 이르는 시기에 실제로 그런 '유체이탈'을 경험할지도 모르지만. 무언가 철학적이기도 하면서 사색적인 내용을 담고 있으리라는 최초의 기대는 무너졌지만, 무난한 재미가 있었다.
쉽게 씌여지진 않았겠지만 쉽게 읽혔다. 전체적으로 내용을 미화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문체에 뚝뚝 묻어나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시체놀이를 즐겨하던 아이가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기에 자칫 곡해하면 인과관계로 오인될 수 있지만 그 아이의 죽음이 불의의 사고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전혀 없는 셈이다. 그러고보니 위기철 작가의 소설에도 유서를 쓰고 관에 들어가서 30분을 머무는 장례 이벤트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있었다. 죽음을 가까이 접했던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말처럼 때론 '죽음 앞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생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재준이가 오토바이를 타기 전에 되뇌었던 '설마 죽기밖에 더하겠어'라는 말은 그저 호기있게 외치는 상투적인 외침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평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또래의 아이들보다 진지하게 접근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의 벽이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찌보면 굉장히 성숙한 생각인데, 재준이에게 죽음은 색깔을 달리하는 또다른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너무 두렵다면 감히 목숨을 내놓고 무언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소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그런 '노하우'가 왠지 열여섯살의 어린 아이에게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왠지 그런 인위적인 해방구나 탈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만 하는 '현실도피'의 느낌이 일기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열여섯 소년에게 그저 죽음은 두렵고 슬픈 대상으로 남아있는게 더 좋지 않나 싶다.
iPhone 에서 작성된 글입니다.
쉽게 씌여지진 않았겠지만 쉽게 읽혔다. 전체적으로 내용을 미화하고자 하는 저자의 의도가 문체에 뚝뚝 묻어나와 다소 부자연스러웠다.
시체놀이를 즐겨하던 아이가 실제로 죽음을 맞이했기에 자칫 곡해하면 인과관계로 오인될 수 있지만 그 아이의 죽음이 불의의 사고라는 점에서 둘 사이의 연관성은 전혀 없는 셈이다. 그러고보니 위기철 작가의 소설에도 유서를 쓰고 관에 들어가서 30분을 머무는 장례 이벤트를 소재로 하는 작품이 있었다. 죽음을 가까이 접했던 스티브 잡스가 스탠포드 졸업식 연설에서 했던 말처럼 때론 '죽음 앞에 그 무엇도 중요하지 않다'는 의미와 일맥상통한다. 생의 가치를 재발견하는 계기가 되기 때문이다.
소설 속 재준이가 오토바이를 타기 전에 되뇌었던 '설마 죽기밖에 더하겠어'라는 말은 그저 호기있게 외치는 상투적인 외침과는 다른 의미를 지닌다. 평소 죽음이라는 것에 대해 또래의 아이들보다 진지하게 접근했기에 삶과 죽음의 경계의 벽이 다른 아이들과는 달랐을 것이다. 어찌보면 굉장히 성숙한 생각인데, 재준이에게 죽음은 색깔을 달리하는 또다른 삶이었을지도 모른다. 죽음이 너무 두렵다면 감히 목숨을 내놓고 무언가를 할 엄두도 내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다소 삶의 무게를 가볍게 하는 그런 '노하우'가 왠지 열여섯살의 어린 아이에게는 버겁게 느껴지기도 한다. 왠지 그런 인위적인 해방구나 탈출구를 스스로 만들어야만 하는 '현실도피'의 느낌이 일기 곳곳에서 드러나기 때문이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은 누구에게나 필요하겠지만, 열여섯 소년에게 그저 죽음은 두렵고 슬픈 대상으로 남아있는게 더 좋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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